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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90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4. 10. 24. 01:57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90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7gEsSyOZtX8
594.
그대는 욕망을 통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있다. 그대는 자신의 욕망을 통해 창조하는 창조주이다. 그대가 그것을 갖고 싶어하면 그것은 가치있는 것이 된다. 갖고 싶어 하지 않으면 그 가치는 사라진다. 가치란 물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욕망 속에 있는 것이다. 수요가 있을 때 공급이 뒤따르지만 지금은 공급이 있으면 수요가 뒤따른다. 사업가들은 새로운 상품을 만들고 광고업자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욕망을 이끌어 낸다. 그들은 먼저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내고 다음에 광고를 한다. 욕망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러면 수요는 발생한다. 그대는 그 물건을 향해 돌진한다. 그대가 그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변하지만 그대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 만일 형태가 그곳에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변화한다. 형태가 없다면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는가? 내면의 이 무형의 것에 도달하면 그것은 처음으로 텅 빈 것으로 비칠 것이다. 그대는 형태없는 것을 자각할 수 없기 때문이고, 알고 있는 것은 텅 빈 공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을 알면 그 속에 자리 잡으면 그때 텅 빈 공간은 더 이상 텅 빔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형태 없음이 된다. 죽음은 그대 가장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대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즉 중심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죽음은 둘레에만 있다. 그대는 결코 죽지 않는다. 죽을 수가 없다. 그대는 하늘이다. 자아의 본성은 공간과 같다. 그것은 텅 비어, 무한하게 텅 비어 형태가 없다. 모든 사건이 그 안에서 일어나지만 그것 자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구분과 분리는 인간이 만든 것이다. 세계는 하나이며 마음을 통과하면 세계는 여러개로 나누어진다. 구분하는 마음의 매커니즘을 버리는 것 그것이 명상이다. 내면의 원이 생길 때 그대는 다시 하나가 된다. 삶과 죽음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깨달음이 없는 자비심은 위험한 것이다. 그리고 자비심이 없는 자각은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자각은 에고의 절반을 죽인다. 나머지 절반은 자비심에 의해서 제거된다. 에고가 사라져 버렸을 때, 비로소 그대는 붓다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신성으로부터 왔다. 우리는 신성의 아주 작은 입자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신성으로 되돌아간다. 이 사이에 우리는 수많은 꿈을 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늘은 길을 가지고 있지 않다. 존재의 하늘인 옛집으로 가라. 그대 의식이 자각하면 자각할수록 ‘환영의 세계’(마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다. 환영의 세계는 현상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 자신의 마음을 통해서 투영된 세계를 뜻한다. 이 투영의 세계는 마야이며, 그대 자신의 사고와 욕망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행복이란 밖(인간관계)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 존재의 내면(축복)에서 우러 나온다. 진리 속에는 처음도 중간도 종말도 없다. 진리는 전체이다. 모든 것을 다 포함한 하나이다. 지금 이 순간이 진리 자체로서의 시공간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존재의 시작을 알기 위해서 과거 속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으며, 존재의 종말을 보기 위해 미래로 갈 필요도 없다. 문제는 그대 자신이 붓다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이 붓다라는 이 사실을 아는데 있다. 붓다의 본질이 발견되면 그 순간 ‘나’는 사라진다. 모를 때는 아무 소리나 마구 지껄일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알게되면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단지 하염없이 언어의 주변을 서성거릴 뿐이다. 신이란 그대 내부의 경험하는 자이다. 우리는 결코 신을 볼 수 없다. 다만 신은 그대를 통해서 보는 자이다. 신을 경험했다고 외치는 사람은 모두 그들 자신의 관념에 속고 있는 것이다. 모든 관념이 사라져 버렸을 때, 거기 오직 경험자만이 남을 때, 그대 자신이 바로, 존재 그 자체로서 있게 될 때, 그때 신은 그대를 통해서 현현된다. 신은 안이면서 동시에 밖이다. 그러나 안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안에서 신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밖(삼라만상)에서 결코 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sadist↔masochist
중도란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포함하는 것이다. 한쪽 날개만으로 나는 새를 본적이 있는가? 아름다움은 긍정과 부정의 조화에서 온다. 삶은 바로 감각이 있다는 것이다. 감각은 아름다운 삶의 느낌이다.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과의 차이도 감각의 유무에 달려있다. 감수성의 예민함이나 느낌의 탐닉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감각기관의 절제로 방종과 탐닉에 헤매이게 될까 걱정하는 것이다. 절대로 감각을 억압하지 말라. 감각적이라는 것은 그대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므로 항상 감각적이고 탐닉적이어야 깨어있을 수 있고 신성에 도달할 수 있다. 몸을 사랑하고 숭배하고 존경하라. 인간의 몸은 변형에의 기본 바탕이기 때문이다. 순화시켜라. 억압하지 말라. 감각(오감)은 본질로 들어가는 그대 자신의 문이다. 즉 신에게로 가는 문이다. 어린아이를 보라. 무엇을 보거나 놀 때 전신으로 논다. 감각을 해방시켜라. 늘 새로운 방법을 찾아라. 습관이나 모방에서 벗어나 그대 자신의 방법을 찾아라. 지식이란 모아 두는 것이다. 지식의 축적은 멍에가 된다. 멍에가 그대를 굴레 씌우고 있는 한 자유란 있을 수 없다. 그대는 하나의 가능성 있는 잠재 세력이다. 신을 규정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만드는 신은 상징적일 뿐이다. 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언어나 이미지도 없다. 언어는 결코 진리를 표현할 수 없다. ‘신’이라는 단어 자체가 신이 아닌 것처럼 ‘불’이라는 단어도 실지의 ‘불’이 아니다. 차림표는 실지의 음식이 아니므로 그대의 배는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다름아닌 이미지들, 성전들, 판에 박은 종교 교리들 때문이다. 이미지(동상)들, 경전들은 모두 쓸모가 없다. 진리는 전체이다. 누구의 말도 듣지 말라. 오직 그대 자신의 경험에만 귀를 기울여라. 오직 본질적인 경험만이 그대에게 진리의 길을 보여줄 것이다. 진리, 아름다움, 신비는 모두 체험의 영역이지 언어나 이해의 차원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체험이 아무리 절실한 것이라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만의 것이다. 결코 그대 자신의 체험은 될 수 없다. 예수가 체험했던 세계가 아무리 절실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의 체험일 뿐, 그대 자신의 체험은 될 수 없다.
광물권(깊은 잠)은 자유가 없다. 자유는 의식을 통해서 들어오기 때문이다. 오직 원인과 결과만 있는 인과법칙만이 전부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니다. 물질은 씨와 같은 것으로서 자신의 삶이 싹이 틔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무의식 상태로, 정글이고 시간도 없다.
생물권(꿈)은 생명이다. 과거지향적이며 전의식 단계
정신권은 미래지향적이며 마음(자의식)의 부상이다. 깨어있지만(각성) 진정한 자유가 아닌 상태이다.
붓다권;완전한 의식의 현현으로 no-mind 현상이다. 니르바나 즉 하나님 아버지(God the Father)라고 한다.
신이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을 뜻한다. 이미 안 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는가? 그것을 초월하면 된다. 욕망의 무의미함을 완전히 이해하면 그렇게 이해하는 것 자체로 이미 초월이 일어난다. 이해를 하는 그순간 곧바로 하나의 다른 차원으로 변형된다. 즉 두 번째로 탄생한 것이다. 예수탄생(동정녀)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자기 자신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다. 침묵하기 위해서는 하나됨이 필요하다. 두 사람이 필요없다. 그러면 갈등과 긴장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오직 그때만 무엇인가 일어날 수 있다. 섹스는 가장 근본적인 이분법이다. 따라서 섹스가 소멸되지 않는한 하나됨, 비이원성, 브라흐마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르가즘은 외적인 일이 아니다. 내적인 반응이다. 환희가 일어났을 때 그것은 그대와 상대방인 외부의 여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그대와 그대 안의 여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외부의 여성, 외부의 남성은 내부의 남성과 여성을 대신한다. 그대가 한 여성 혹은 남성과 사랑에 빠질 때 여성이나 남성이 내부의 그것과 어떤 형태로든 호응하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왜 그런 사람을 사랑할 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대는 내부에 여성을 가지고 다닌다. 그리하여 어떤 여성이든 그러한 내부의 여성과 일치하면 갑자기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랑은 그대가 조작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음이 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무의식적이다. 이 여성 속에서 무엇인가를 흘낏 들여다 본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녀는 그대의 내부에 있는 여성과 일치한다. 누군가와 사랑을 할 때 그대 내부의 에너지는 정점에 이른다. 그대 속의 남성과 여성이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땐 온 몸으로 느낀다. 그것은 성적인 것 이상이다. 그것을 지켜보라. 정점에 도달하는 것. 내적인 에너지가 만나는 것을 지켜보라. 그리고나서 서서히 에너지의 분리가 시작되는 것을 다시 지켜보라. 몇 번 이렇게 하면 곧 외부의 여성, 외부의 남성은 필요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은 외부의 대상 없이도 가능하다. 일단 그것을 알게되면, 그것을 내부에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대는 관찰하고 지켜 보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에너지가 나와서 어떻게 오르가즘이 일어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분리되어 다시 둘이 발생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눈을 감고 내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라. 무엇을 행하려고 하지 말고 단지 지켜보라. 그 일어나는 일을 단지 지켜보라. 그것은 서서히 일어난다. 그대의 눈이 외부의 세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어둡게 보일뿐이다. 기다려야 한다. 앉아서 조용히 지켜보라. 조금씩 어둠은 사라지고 모든 사물을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내면 세계는 어둡지 않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아주 선명해져서 눈을 뜨고 외부세계를 보아도 그것이 암흑으로 보이는 그런 순간이 온다.
풍경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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