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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88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4. 10. 13. 18:14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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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철학 188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pTnC826NpI4
592.
결과를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두려움에 끌려가는 마음이다. 추측하지 말고, 계산하지 말라. 히말라야에 갈 필요가 없다. 그대 안에 히말라야를 만들고 신성을 쌓으라. 산 속에 갈 일은 없다. 침묵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대가 어디에 가든지 그 산은 그대 안에 있다. 어중간한 타협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롭다.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을 행하라. 그러나 전체적으로 전적으로 행하라. 생각을 하는 것은 바로 마음에 빗장을 거는 일이다. 생각하지 않는 것, 생각이 없는 것이 바로 문을 여는 길이다. 그대가 생각하지 않을 때 바로 그대는 열려있다. 생각들 하나하나가 벽돌이 되어 벽을 쌓는다. 그리고 모든 생각의 과정이 하나의 벽이 된다. 모든 일들이 그대 주위에서 일어나도록 놓아두라. 주의깊게 바라보라. 행위하지 말라. 행위는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조용히 앉아 모든 일들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놓아두면서 점차로 그대는 침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대는 깨닫는다. 그 침묵은 마음의 침묵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은 침묵할 수 없다. 침묵은 그대 영혼의 일이다. 그대 내면의 존재가 하는 일이다. 그것은 언제나 그곳에 있지만, 그대의 지껄임 때문에, 끊임없는 마음의 지껄임 때문에 그대는 그것을 들을 수 없다. 그대가 모든 것을 수용하고 생각하지 않을 때면 그대는 그것을 깨닫게 된다. 그때 그대는 사로 잡히지 않게 된다. 그 사로잡힘이 없는 순간에 명상이 생겨난다. 받아들이는 자세로 있으라. 아무것도 행하지 말고, 다만 들으면서, 듣는 것은 행위가 아니다. 그대는 무엇을 듣기 위해서 무엇을 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귀는 항상 열려 있다. 보기 위해선 최소한 눈을 뜨기는 해야한다. 그러나 듣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귀는 언제나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언제나 듣고 있다. 아무것도 행하지 말고 다만 열린 채로 들어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말하지 말고(마음 속으로도) 다만 일어나는 모두를 그대로 들으라. 일어나는 모든 것과 함께 있으라. 그러면 거기 돌연 침묵이 있으리라. 마음을 열어 놓고 기다려라. 첫 번째 불꽃은 나의 주관성에서 나와야 한다. 나의 중심이 빛으로 충만할 때, 그때라야만 알려진 것은 무엇이나 진정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대가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그 아는 자가 거기에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대가 다른 것을 알 수 있겠는가? 그대 자신이 깊은 암흑 속에 있다면 그대가 외부에 일으킨 모든 빛은 기만과 환영들이다.
과학은 씨앗을 자르고 분해한다. 하지만 어떤 꽃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은 꽃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존재 속에는 신도 없고 영혼도 없고 저 너머의 것이 없으며, 삶은 단지 우연이며 삶에는 어떤 운명도 없다고 결론을 짓는 방식이다. 그러나 꽃은 봄을 기다리면 핀다. 화가가 자신의 그림 속에 잠길 때 그의 에고는 사라진다. 아마도 단 몇 순간 동안이지만 그러한 에고없는 순간에, 신이 그를 통해 그림을 그린다. 만약 그대가 신에 참여한다면 신도 역시 그대 속에 참여한다. 예술은 종교의 무의식적인 형태이고, 종교는 의식적인 예술이다. 모든 예술은 만드는 것이다. 모든 만드는 것은 신뢰를 필요로 한다. 그대는 거기에 없는 것을 보며, 보이지 않는 것, 만질 수 없는 것, 들리지 않는 것에다 시간과 공간 속의 형태를 부여하는 그런 방식으로 일한다. 창작되는 것은 감각들에 또렷한 이미지를 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그것이 창작하는 대상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예술은 하나의 그림이나 하나의 조각품이 아니다. 예술품을 거래하는 사람들이 사고 파는 것은 예술작품이지 예술 그 자체는 아니다. 예술이 예술작품과 같은 것이 아니듯이, 종교가 창작하는 대상과 그 결과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가령 교리, 신조, 강령, 성경, 코란, 기타, 교회, 사원, 성당, 이것은 예술작품들이다. 종교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종교의 부산물이다. 즉 부차적 결과이다. 모든 경전은 종교의 부산물이다. 시간이라고 하는 언덕에 남겨진 그림자, 발자국일 뿐이다. 붓다는 당연히 발자국을 남길 것이다. 그 발자국은 그 자신이 아니다. 그러나 그 발자국은 붓다에 속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부산물일 뿐이다. 그리고 그대는 붓다가 되어야지 발자국에 대한 경배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피카소는 그의 그림들을 팔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예술을 팔수는 없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대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반대로 그것이 그대를 소유한다. 그대는 그대의 존재를 활짝 열어 두어야 한다. 신이 들어와서 그대를 전적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그대는 물러나야 하고 텅 비어야 한다. 바로 그 소유 속에서 그대는 인간성을 초월했다. 그대는 더 이상 인간 존재가 아니며 그대는 신이다. 하나의 그리스도며 붓다이다.
밖으로 나가는 에너지는 이중적(눈이 두 개이기 때문에)이 된다. 그대가 그것을 거꾸로 흐르게 한다면 그것은 다시 하나가 된다. 일단 에너지가 안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빛으로 충만해진다. 창조적이 되어라. 그것이 깨어있음이다. 만약 봉사가 초롱불 없이 다녔다면 그는 더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성경, 코란, 기타를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엄청난 아름다움과 빛을 지닌 초롱불이지만 그대의 눈은 멀어 있다. 그 빛은 오래전에 이미 사라졌다. 스승이 죽을 때 그 빛도 사라진다. 그 메시지는 말에 불과하다. 그것은 불필요한 짐이다. 세상의 모든 경전들이 사라진다면 사람은 더 주의를 기울일수 있고 더 깨어있을 수 있고 자기 스스로 빛의 근원을 찾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기댈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므로 그는 자신의 발로 서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잘못된 묵상은 뭔가에 대해서 생각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일수도 있지만 섹스에 대한 생각이나 사마디에 대한 생각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생각은 생각이다. 생각들은 부딪치지도 포개지지도 않는다. 각각의 생각은 그 자신의 경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사이에 틈이 있다. 그 틈은 신성에 이르는 문이고 그 틈이 묵상이다. 그대가 그 틈을 깊이 들여다 본다면 그것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한다. 그대는 더 이상 사고에 역점을 두지 않고 그 틈에 역점을 둔다. 예를들어 사람들을 볼 때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틈을 본다면(센다면) 사람들은 모호해진다. 또한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보지 말고 자동차 사이의 틈을 보라. 계속해서 틈을 세어 보라. 변화가 올 것이다. 묵상은 하나의 사고에서 또다른 사고로의 도약이 아니라 하나의 틈에서 또 하나의 틈으로의 도약이다. 그러면 그대는 자신의 존재 속으로, 그대 자신의 중심 속으로 떨어지는 것은 그러한 틈들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신은 하늘 어딘가 저 위에 있지 않다. 신은 이미 실제이다. 신은 그대 내면 속에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사고들로 가득한 꾸러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머문다. 그 사고의 꾸러미는 그대에게 자아에 대한 의식 즉 ‘나는 존재한다’라는 의식을 준다. 그것은 실재가 아니며 그것은 거짓된 실재, 환영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 속에서 하늘과 땅이 태동되기 전에 존재했던 그 형태를 추구해야 한다. 그 형태는 침묵이고 모든 것이 씨앗의 형태로 있을 때이다. 그것을 맛보는 것이 불멸이 되는 것이다. 방법은 자신의 코 끝을 바라보라. 제3의 눈(미간, 양쪽 눈 사이)의 연장선 상에 있어 제3의 눈의 끌어 당김이 생긴다. 다만 어떤 짐도 어떤 스트레스나 긴장도 없이 아주 가볍게 바라봐야 한다. 집중하거나 초점을 맞추거나 고정시키면 안 된다. 그저 단순히 거기에, 현재에, 일종의 내맡김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즉 코는 하나의 가늠쇠로, 눈을 섬겨야만 한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눈은 반드시 반쯤 떠야(감아야) 한다는 것이다. 차 사이의 틈을 보듯이 생각 사이의 틈을 보라. 다만 생각들이 오고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라. 무심히 관찰하듯이 그러면 생각들이 뭉개져서 사라질 것이다.
결코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되지 말라. 항상 배우는 과정에 있으라.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결정하는 순간 그대는 성장하기를 멈춘 것이다. 성장 하기를 멈춘 것이 노이로제이다. 하루에 한시간 동안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어떤 기억도, 생각도, 상상도 한 시간의 명상 동안 그의 의식 속에 어떤 내용물도 없다면 그것이 그를 다시 젊게 해 줄 것이고 그것이 그를 상쾌하게 해 줄 것이다. 그것은 그 속에 새로운 에너지의 원천을 풀어줄 것이고 그는 더 젊고 더 신선하고 더 배울 수 있고 자신의 눈에 더 많은 경이로움을 가지고 자신의 가슴속에 더 많은 경외심을 가지고 세상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다시 아이가 되어서.
이완이란 어떤 정보도 그대에게 던져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라디오와, tv, 영화는 그대에게 끊임없는 정보를 던져준다. 반면에 명상이나, 아이들과 놀기, 새소리 듣기, 음악 듣기 등은 좋은데 왜냐하면 어떤 정보도 그대에게 던져주지 않기 때문이다. 음악은 어떤 언어도 갖지 않는 순수한 소리이며 그것은 어떤 메시지도 주지 않는다.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이 불균형(노이로제)이며 중도가 균형(각성)이다. 개인성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의 전체로 통일성이다. 즉 행위와 무위 사이에 균형(조화)을 잡으라는 것이다. 세상을 등지지 말라. 세상에 있으되 그것이 되지 말라. 그러나 세상의 일에 거부하지 말라. 종교는 죄의식을 일으키는 것에 의존한다. 만약 그대가 죄의식을 느낀다면 그대는 교회, 사제의 희생자가 될 것이고 그들은 그대를 착취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완벽하게 옳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대는 동면하게 되고 그대의 성장은 멈춘다. 삶은 진화, 성장을 의미하고 점점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전체의 삶은 성장하기 위한 도전이다. 죄의식을 느낀다는 것은 과거에 소유된 채로 머문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은 그대가 어디에 있든, 그대가 누구이든 그 상태로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생은 모험, 미지 속으로의 끊임없는 모험 이외에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죄의식도 자부심도 느끼지 말라. 그대가 둘 다를 떨굴 때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 호흡을 바꾸지 말고 그냥 그것을 관찰하라. 그러면 그대가 주의 깊으면 깊을수록 그대의 호흡은 줄어든다. 호흡은 더 길어지고 더 깊어진다. 그대가 성공을 찾고 있다면 그대는 이미 분열되어 있다. 그러면 그대의 가슴은 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결과에 가 있다. 그대의 마음은 미래 어딘가에 있을 것이며 그대는 현재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성공은 결론, 그 결과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여행 그 자체를 엄청나게 즐기며 그 목표에 대해 관여하지 않는, 분열되어 있지 않은 가슴에게만 일어난다. 그리고 성공은 그 일이 현재 전체적으로 행해질 때에만 올 수 있다. 전체성으로 선택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대에게 옳다. 그대의 전체적인 결정이 그대를 변형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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