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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87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4. 10. 3. 01:49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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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철학 187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ubzV-szy98E
591.
참 나에 머무는 것이 홀로 있는 것이다. 참 나는 어디에나 있으므로 홀로 있을 특정한 장소가 없다. 마음의 개념들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것이 홀로 머무는 것이다. 홀로있음은 마음 안에 있다. 초연한 사람은 언제나 홀로 있다.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더라도 홀로 있을 수 없다. 집착으로 행해지는 일은 속박이지만, 초연함으로 행해지는 일은 행위자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는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홀로 있다. 평화는 그대의 자연스런 상태이다. 즉 내적 맑음이다. 그대가 보는 모든 것은 보는 자에 의존한다. 보는 자와 별개로는 보이는 것이 없다. 보는 자 없이는 보이는 대상들도 없다. 보는 자를 찾아라. 그러면 창조물은 보는 자 안에 있다. 봄은 오로지 있음이다. 깨달음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얻거나 어떤 목적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대이고 언제나 그대였던 그것으로 그저 있는 것이다. 스크린이 없으면 아무런 영상도 없듯이 보는 자가 없으면 보이는 것도 없다. 마음을 내면으로 향하게하여 보는 자를 찾아라. 그러면 그대는 자신이 보는 자이며 외적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은 자기자신을 주체와 객체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으로 나눈다. 그러므로 이름과 형상으로 이루어진 외부 세상은 독립된 존재를 갖고 있지 않다. 보는 자만이 실재하며 영원하다. 보이는 것은 보는 자와 다르지 않다. 존재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참 나이지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생각의 꾸러미에 불과하다. 의식만이 그대이다. 그대만이 의식이다. 태어남과 죽음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의식 뿐이다. 자아를 소멸시켜 참나를 보는 것이 곧 신을 보는 것이며, 나머지 모든 것은 마음의 환영일 뿐이다. 스승은 내면에 있다. 명상은 스승이 바깥에만 있다는 무지한 생각을 없애려는 것이다. 자기탐구에서는 주체만 있고 대상은 없다. 참 나는 무엇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 것을 그만 둠으로써, 고요히 있음으로써 그저 진정한 자신으로 있음으로써 실현된다. 그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냥 존재하라.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만 그대는 신을 알게 된다. 생각을 통해서는 영원을 알 수 없다. 생각은 시간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의심이나 속임수가 없다.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할 필요가 없다. 어떤 방어 수단을 마련할 필요도 없다. 그대는 그 앞에서 자신을 열어 놓을 수 있다. 산이나 언덕을 오를 때 기쁨을 느끼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 기쁨은 언덕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대가 방어하는 마음을 내려 놓아도 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오는 기쁨이다. 한 그루 나무에게로 다가갈 때 그대는 문득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것은 나무로부터 오는 느낌이 아니라 그 느낌은 내부로부터 온다. 나무와 더불어 있으면 그대는 자신을 방어할 필요도 없고 마음을 열고 한가로이 노닐 수 있다. 꽃은 갑자기 그대를 습격하거나 해치지 않을 것이다. 나무는 그대로부터 어떤 것도 훔쳐가지 않는다. 따라서 그대는 경계심을 버리고 방어하는 마음을 내려 놓는다. 행복은 누군가 그대를 필요로 할 때 찾아온다. 오늘날 인간은 시대에 가장 뒤떨어진 제품이 되어 버렸다. 해마다 모든 것이 새로운 모델로 생산된다. 아무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삶의 무의미함을 느낀다. 이제 아무도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과학기술이 그대를 안락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더 나은 인간을 위해서는 다른 차원이 필요하다. 그것은 기계의 차원이 아니라 깨달음의 차원이다.
무엇인가 질문할 때 이미 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묻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기억하라.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을 통해서 묻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대는 그 대답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비어있지 않다. 답은 이미 그대에게 있는 것이다. 이미 편견에 사로잡혀 논쟁만 될 뿐이다.
씨앗은 나무 속에서 죽어 나무가 되었기 때문에 그대는 그 곳에서 씨앗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신은 이 우주 속으로, 이 실재하는 것들 속으로 들어가서 우주 그 자체가 되었다. 그대가 신을 찾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은 분리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신은 바로 이곳에, 모든 곳에(전체에) 편재해 있기 때문이다. 배고픔은 육신에 속한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요구이다. 의식에는 배고픔이란 없다. 육신에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의식이 그것을 대신 느끼는 것이다. 그것을 충족시키기는 하되 그것에 붙들려서는 안 된다. 즉 균형이 필요하다. 이것은 지상에 속하는 것이고 나는 지상의 것이 아니다. 에너지는 언제나 마찰(갈등, 싸움...)을 통해 창조된다. 그대가 굴복해 버리면 나쁜 결과가 찾아온다. 의식은 더 약해지고 육체는 더 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성공하면 그대는 에너지의 다른 층을 획득하게 된다. 즉 다른 부분에 있던 에너지가 그대에게 흡수되어 이전보다 더 강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의 중심에 뿌리를 두고 지상에 속하는 에너지 층은 완전히 분리하여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라. 그것을 사용하기는 해도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 하지 말라. 어떤 목적지를 설정해 놓으면, 그대는 언젠가 좌절하고 만다. 목표에 매달리면 매달리는 만큼 그대는 고민이나 불안, 좌절감에 빠지고 만다. 그대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곳이 바로 그대의 목적지가 되게하라. 그 목적지는 바로 순간순간이다.
다만 주시하라. 그대가 주시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눈을 감고 그대의 사념을, 부질없는 그대의 상상을, 그대의 생각들을 지켜보라. 사념들이 거기 그 속에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 속에 없다. 지켜보는 자는 언제나 밖에서 초월해 있다. 지켜보는 자는 언제나 언덕 위에 있다. 지켜보는 이는 넘어서서 있다. 새는 밖에 있다. 새는 결코 병 속으로 들어간 적이 없다. 그대는 밖에 있다. 그대는 결코 머리 속에 들어간 일이 없다. 지켜보는 자는 결코 내부에 있을 수 없다. 그는 언제나 바깥에 있다. 지켜본다는 것, 주시한다는 것은 밖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을 관조, 자각, 주의력이라고 부른다. 그대가 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는데 어떻게 밖으로 나올 수 있는가? 지켜보는 순간 그대는 그것을 넘어선다. 그대는 초월한다. 이것을 그대가 일단 깨닫기만 하면 그대는 이미 밖에 나와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대는 머리없이 존재할 것이다. 머리는 몸에 소속되어 있다. 결코 그대가 아니다. 지켜보는 동안 섣불리 판단하거나 평가를 내리지 말라. 다만 주시하라. 지켜보기만 하라. 그때 그대는 머리없이 땅위를 걸어가는 것이 가능해진다. 희망한다는 것은 거짓 속에 꿈꾼다는 것이다. 문제는 거짓 희망을 만들어 내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대가 무엇인가 희망을 가지게 될 때, 그대는 거짓 속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대가 진실로 그대의 존재를 안다면, 거기에 희망은 필요 없을 것이다. 에고라는 것은 모든 거짓 희망을 합친 것이다. 에고는 그대의 꿈들을 모아 놓은 집합체, 모든 비현실의 전체, 모든 가정假定들의 총체이다. 에고는 현재에 존재할 수 없다. 언제나 과거나 미래 속에 있다. 그리고 모든 희망은 에고의 음식이다. 깨달으려고 하는 그 사람이 문제이다. 깨달으려고 해서 깨달음을 얻는 자는 없다. 붓다는 무위의 상태를 만들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단지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게 두었고, 조용히 지켜봤을 뿐이다. 에고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억을 통해서이다. 에고는 말한다. 깨달음은 가능하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향해 일하고, 준비하고, 용의주도하게 계획하여야 한다고 이는 확실히 논리적이다. 결국 깨달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날 수 있지만(頓悟, 禪), 지금 이 순간이 오기 위해서는 몇 생이 요구 될지도 모른다.(漸修, 요가)
그대에게 희열을 주는 것은 섹스가 아니라 생각이 끊어진 상태, 무념무상의 행위 속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이다. 생각이 끊어진 상태는 섹스 없이도 만들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성은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성에 있어서는 일종의 속박, 구속 상태가 따르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일 없이 전적인 오르가즘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이 그대 내부의 원천이 된다면, 그대는 자유인이 된다. 그러나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 성을 거부해서는 안된다. 그대는 성을 삶의 일부로 수용해 자연스럽게 수용해야 한다. 성이 사라지는 것은 오직 그것을 전적으로 수용할 때, 억제하지 않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변형시켰을 때만이 가능하다. 성 속으로 빠져들라. 그러나 지켜보는 것에 보다 열중하라. 성의 전 과정을 흐르듯 느껴야 한다. 과정 전체를 통과하면서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결코 무의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켜보는 것은 모든 것의 첫걸음이다. 생활 속에서 지켜보는 자가 되라. 길을 걷고 있을 때 자신을 지켜볼 수 없다면 성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볼 수 없다. 즉 무의식적으로 되지 말라는 것이다. 항상 깨어 있으라. 이야기를 하거나 들을 때나 모든 곳에 적용시켜라. 그대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지켜보아야 한다. 심신 전체에 그대의 주의력을 집중시켜야 한다. ‘신성이 움직이는 길’이 된다. 그대 신성이 자리 잡고 변형이 일어난다. 그 에너지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그때 창조성의 새로운 차원이 그대 앞에 열린다. 그대가 하는 모든 일이 창조적이 되고 예술적이 된다. 그대가 무엇을 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대의 정신이 어떻게 움직였는가의 문제이다. ‘나는 그 여인을 강둑에 내려 놓았을 뿐입니다만 스님은 아직도 그 여인을 들고 계시는군요!’
풍경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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