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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86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4. 9. 26. 00:19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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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철학 186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3HKKKArpW2A
590.
그대가 미래의 어느 곳으로도 갈 욕망이 없다면 다른 누군가가 될 욕망이 없다면 그대는 전적으로 현재에 있을 수 있다. 이것을 각성이라 부른다. 사랑과 각성은 초월이 일어나는 양극성의 가장 높은 형태(최후의 양극성)이다. 사랑은 관계이며 외부로 움직이는 에너지이다. 각성은 홀로 깨어있음이며 다시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빛의 움직임이다. 그것으로 서클이 완성된다. 황금꽃의 비밀은 그대 에너지의 이러한 역류하는 움직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역설적으로 그것은 사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랑은 영적인 성장을 위한 필수사항이다. 게다가 사랑은 하나의 거울로 작용한다.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으로 그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면 그대 자신을 알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대의 물리적인 육체를 보기 위해 거울을 보아야 하듯이 그대의 영적인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거울을 보아야 한다. 사랑은 영적인 거울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자양분을 주고 그대를 통합시키고 그것은 그대가 내적인 여행을 할 준비를 시키고 또한 그대에게 본래의 얼굴을 상기시켜 준다. 또한 사랑은 호수로서 작용한다. 호수에 비친 달은 진짜 달에 대한 탐구의 시작이다. 그대가 호수에 비친 달을 결코 본적이 없다면 진짜 달을 결코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대는 달을 찾아 호수 속으로 들어갈 것이고 어느날 이 달은 그림자일 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반대로 위로 올려다 볼 수 있다. 결코 사랑해본 적이 없고 사랑 속에서 결코 좌절해 본 적이 없는 자들, 달을 찾아 사랑이라는 호수에 잠수해 본 적이 없고 좌절해 본 적이 없는 자들은 하늘에 있는 진짜 달을 결코 올려다보지 못할 것이다. 사랑보다 높은 것은 자유이다. 사람은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으로 구속받길 원하지 않는다. 사랑은 여행의 반쪽일 뿐이다. 그 나머지 반은 명상으로, 각성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은 그 나머지 반을 그대에게 준비시켜 준다. 사랑은 전반이고 각성은 후반이다. 이 둘 사이에서 그대는 신에 이른다. 사랑과 각성 사이에, 이 두 가지 강둑 사이에 존재의 강이 흐른다. 일단 그대가 실재하게 되면 다시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된다. 사랑은 한편으로 대단한 기쁨을 주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대에게 영원한 기쁨에 대한 갈증을 줄 것이다.
새로워지고자 애쓰는 그 자체가 이미 옛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의 과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고의 과정이 사고하는 자를 만들어 낸다. 보통은 나는 사고하는 자이며 그래서 사고하는 과정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대 속에 사고하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만약 사고가 없으면 내부에 사고하는 자는 없다. 그래서 사고하는 자는 전체 사고의 연속에 대한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내면 속을 찾으면 그대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면 ‘어떻게’, ‘어디로’에 대한 문제란 없다. 그것은 이미 일어났다. 매일 단지 몇 분간만 그대의 눈을 감아라.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라. 그대가 그것을(양자도약)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가 하는 그런 것이 전혀 아니다. 그대가 바로 장애이기 때문에 그대가 그것을 할 수 없다. 도약할 곳도 없고, 도약할 자도 없고, 도약할 방법도 없다. 이 세 가지 모두가 이해되었을 때 그것은 일어난다. 그러면 사람은 하나의 텅빈 공간으로 전적으로 텅 비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가득찬 상태에서 살아간다.
옛것을 선택하는 것은 삶이 아닌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익숙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익숙한 것의 감옥에 남아 있는 것이다. 알려진 것을 선택하는 것은 미지의 것을 피하는 것이다. 즉 신을 거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항상 미지未知이기 때문이다. 미지일 뿐 아니라 不可知이기도 하다. 신은 항상 이슬처럼 신선하다. 항상 전적으로 새롭고, 익숙하지 않으며, 지도가 그려져 있지 않으며, 예정에 없고 계산될 수 없다. 신은 미지로서만 온다. 그대의 과거란 익숙한 것을 제외하고 매달릴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것들이 친근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들이 비참함에 매달리고 있는 까닭이다. 그들은 그것에 집착하고 주장한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선택하는 자들만이 산다. 삶이란 계산될 수 없고 예정되지 않은 것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삶은 미지의 근원으로부터 오는 도전에 항상 기꺼이 귀 기울일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위험하지만 산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장소가 무덤이다. 거기에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는 세상에 머물면서 그것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 그대에게 예리함을 주는 것은 바로 삶이며 그대는 생존하기 위해 총명해져야 한다. 수도원이나 교회나 종단에 의해 보호 받으면 그대는 생존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그대는 그저 다른 사람들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기만 하면 옷도 음식도 나온다. 가능한한 세상에 깊이 들어가라. 그러나 그대 자신을 그대 자신의 존재 속에 중심 잡혀 있도록 유지하라. 관찰자가 되어 배역(직업, 남편, 아빠, 아들...)임을 기억하라. 지구는 거대한 무대이고 드라마가 진행되고 있다. 신이 그 저자이고 감독이며 그대는 단지 배우일 뿐 막이 내리면 그대의 배역은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연기했던 그 배역은 아닐 것이다. 세상은 그대 자신을 기억해 낼 하나의 좋은 기회이다. 그대는 하나의 방식으로만 살아왔는데 그것을 또 다시 계속해서 반복할 이유가 무엇인가. 새로운 스타일로 살아보라.
두 육체가 서로에게 이끌리면 그것은 섹스이다.
두 가슴이 서로에게 이끌리면 그것은 사랑이다.
두 영혼이 서로에게 이끌리면 그것은 기도이다.
자발적인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흉내낼 수 없다. 주는 자는 항상 신선함을 유지한다. 주지 않고 붙들고만 있는 사람은 항상 고여 늙고 썩은 채로 남아있다. 주는 자가 감사해야 한다. 주라. 그리고 감사하라. 논리는 미지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즉 모험을 하지 않는다. 논리는 ‘먼저 나는 알아야 한다. 그 다음에 나는 들어 갈 것이다.’ 그대가 지식을 많이 쌓을수록, 삶은 위험해진다. 삶은 항상 미지 속으로 움직인다. 논리에 매여 있을 때 그대는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 온다. 논리는 항상 이미 알고 있는 것, 과거의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대가 이미 여행해 온 길에 관해서 말이다. 붓다의 침묵은 제3의 침묵이다. 그것은 전혀 그대가 알지 못하는 침묵이다. 그것은 잡음이 나는 침묵도 아니며 잡음이 나지 않는 침묵도 아니다. 거기에는 침묵하려는 어떤 노력도 없는 침묵이다. 이 침묵은 중도에서 나오는 침묵이다. 그것은 말에 대한 반대 작용의 침묵이 아니다. 겁이 나서, 상황이 위급해져서 생기는 강요된 침묵도 아니다. 거기에는 말도 없고 말없음도 없다. 그는 단순히 침묵하고 있다. 잡음을 반대하는 침묵이 아닌 것이다.
사람은 영원한 연속체이다. 그것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단지 이 육체만이 태어났다가 죽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에너지는, 그 생명력은, 그 영혼은, 그 진아는, 그대가 어떻게 부르든 육체 속에는 의식이 존재하며 그것은 결코 태어나거나 죽는 일이 없다. 누가 오고 누가 가는가? 만약 그대가 이해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깨닫지 않는다면 그때 그대는 ‘나는 홀로왔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에고이다. 그 ‘나는’은 진아가 아니다. 즉 하나의 속박이다. 그대가 존재하는 현상을 단지 인식하라. 단지 깨어 있으라. 그대에게는 어떤 시작도 끝도 없다. 그러면 자신의 탄생과 죽음의 과정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는 단지 한 사람의 구경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볼 수 있다. 그대가 새집으로 이사를 가거나 새옷을 갈아 입는다면 그것을 탄생이라고 말하겠는가? 아니다. 그대는 단지 집만 바뀐 것이고 옷만 갈아 입은 것이다. 그대는 변하지 않았다. 중심은 결단코 변하지 않는다. 육체만 바뀌었을 뿐 그것은 영원하다. 그대가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꿈이다. 그대가 신성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실체다. 그대가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는 것도 꿈이다. 실체는 그대가 존재의 중심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시장에 가는 것은 그대가 꿈 속에서 헤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은 무한정 계속될 수 있다. 만약 그대가 육체가 그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꿈이다. 그대는 결코 육체가 아니다. 만약 그대가 태어나고 죽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꿈이다. 그대는 결코 태어날수도 죽을수도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태어나고 죽는 실체는 없다. 와야할 곳도 가는 곳도 없다.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 올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 죽음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붓다는 그의 전 존재가 웃음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대 때문에 슬퍼한다. 그래서 깨달은 자의 상징은 바로 미소다.
물도 없고 물속에 비친 달도 없다. 손 안에는 허공만 남았다. 빈 손으로 가라. 그것이 모든 것이다. 그것보다 위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그대 손 안에 허공을 갖고 갈 수 있다면 그때 모든 것이 가능하다. 어떤 것도 소유하지 말라. 지식도 갖고 가지 말고 물이 담긴 물통도 갖고 가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그림자만 보게 된다. 지식, 명예, 권력 속에서 그대는 보름달의 그림자만 보게 될 것이다. 진짜 보름달은 저 하늘 위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물통을 엎어 버려라. 물통이 부서지지 않도록 그것을 지키지 말라. 그대 자신을 지키려 하지 말라. 그럴 가치가 없다. 물 속에 있는 보름달이 사라지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라. 오직 그때만이 직접 그대의 눈으로 진짜 보름달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빈 손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 완전히 텅 빈 채로 남아 있으라. 그대 자신을 공허한 것으로 여겨라. 그대가 마치 사라진 것처럼, 그대가 허공인 것처럼 행동하라. 허공을 갖고 가라. 그대의 에고, 마음, 생각들인 낡은 물통을 던져 버려라. 그리고 기억하라. 물도 없고, 달도 없다. 손 안에는 허공만 남는다.
풍경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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