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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84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4. 9. 7. 04:58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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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철학 184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DORfB9e-u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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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총명하게 태어났으며 그래서 어떤 사람도 제외시키고 있지 않다. 상대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둔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지성(어디에 그것이 있는지, 어떤 분야인지)을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그의 지성이고 그의 지성은 그 자신의 방식으로 꽃피어나야 한다. 그는 다른 사람을 흉내내지 말아야한다. 아름다움은 장미의 성분이 아니다. 장미는 드라마가 공연되는 무대일 뿐이지, 드라마 그 자체는 아니다. 아름다움은 장미속에 있지 않다. 아름다움은 저 너머로부터 오며 그것은 단지 장미 위에서 춤추고 있다. 그대는 본질을 볼 수 없다. 그대는 빛이 쬐는 사물을 보았지만, 빛 자체는 보지 못했다. 빛이 비출 수 있는 사물이 없다면 그대는 그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깨달음을 볼 수 없고 그 결과만을 볼 수 있다. 음악을 듣고 춤추고 싶은 것은 음악에 의해 야기된 것이 아니라 그대 속에서 강렬한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동시성이다. 원인과 결과는 물질적이지만 동시성은 영적이며 시적이고 사랑의 관계이다. 당신은 분리되어 있다고 꿈꾸어 왔다. 신과의 합일이라는 것은 없고 당신은 항상 존재와 하나였다. 단 한 순간도 분리라는 것은 없었으며 분리의 가능성은 없다. 인생이란 죽음과 저 너머의 세상을 준비할 기회이다. 인생은 오직 하나의 기회일 따름이다. 그대가 알고 있는 이 삶은 진짜 삶이 아니다. 진짜 삶을 얻을 기회일 뿐이다. 본질은 존재가 그대에게 부여한 선물이다. 인격은 사회, 부모, 학교, 문화, 문명이 부여한 선물이다. 인격은 그대가 아니라 가짜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격을 닦으며 본질에 대해선 완전히 망각해 버린다. 진짜 삶은 본질의 삶이다.(=신) 신은 결코 참견하지 않으며 자유가 전부이다. 육체는 공간에 해당하고 마음은 시간에 해당한다. 마음은 시간현상이고 몸은 공간현상이다. 시간이 사라지면 그대는 마음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은 우주의 축소판이다. 그대가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면 전 우주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이 전체 우주의 원자적인 성분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신비를 해독할 수 있다면 가능한 모든 신비(과거, 현재, 미래)를 해독한 것이다. 두려움이 있으면 성취란 없다. 원의 중심(내면)은 오직 하나다. 두 개라면 그것은 중심이 아니다. 그대는 가장 깊숙한 내면에 그대 혼자만이 존재한다. 그대를 의존적으로 만든 사람은 누구든지 그대의 적이다. 그대가 전적인 홀로있음을 받아들인다면 그대는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그때는 어떤 집착도 없다. 이 홀로있음은 텅비거나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완전한 충만이고 넘쳐흐르는 것이다. 그것은 텅빈 공허가 아니라 모든 것이다. 그대의 존재는 바로 神이다.
마음이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스승은 비논리로, 모순으로, 불연속으로, 역설적으로, 충격적으로, 혁명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다. 구도자가 될 때 물은 더 이상 물이 아니고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을 때 다시금 물은 물이 되고 산은 산이 된다. 그리고 집착하지 않아야 된다는 사실에조차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대 자신 외에는 아무도 그대를 속일 수 없다. 하지만 그대는 다른 사람이 그대를 속이고 있으며 그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대는 아내를 바꾸고, 남편을 바꾸고, 스승을 바꾸고, 신을 바꾼다. 죽음, 명상, 사랑 이 세 가지는 동일한 종류이다. 그대가 사랑과 명상의 깊이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죽음의 아름다움 또한 완전히 맛볼 수 없다. 황홀경(ecstasy)은 ‘바깥에 서 있다’는 뜻이다. 그대는 완전히 죽어서 사라지고 그대 자신의 바깥에 서서 그대의 죽음을 구경할 수 있는 것이다. 바깥에 있는 그대는 이미 그대가 아니다. 그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완전히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대의 죽음을 구경하는 주체는 이미 우주 전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시말해서, 그것은 우주가 그대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이 된다. 그것은 지고한 축복이다. 모든 종교의 핵심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배우는 기술이다.
성직자들에게는 살아있는 그리스도가 가장 위험한 존재이다. 오직 죽은 그리스도만이 만사형통이다. 성직자들은 그들이 죽고나서야만이 조직을 만들고 성전을 짓고 그대를 속이고 사기칠 수 있는 것이다. 그대의 기도가, 사랑이 소유욕에서 출발할 때 그대는 그것을 죽이는 것이다. 그대가 그리스도를 죽였는데 어떻게 그가(죽은 자가) 그대를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소유욕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다.
형체(形)는 움직이어 형체를 낳지 아니하고 그림자를 낳는다. 소리는 움직이어 소리를 낳지 아니하고 울림을 낳는다. 無는 움직이어 무를 낳지 아니하고 有를 낳는다.
삶이 있는 것은 곧 삶이 없는 것으로 되돌아간다. 사람들은 늙음의 피곤함을 알지만 늙음의 안일함은 알지 못한다. 죽음의 나쁨은 알지만 죽음의 휴식은 알지 못한다. 죽은 사람을 돌아간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곧 산 사람은 길을 가는 사람이 된다. 길을 가면서 돌아갈 줄 모른다면 그는 집을 잃은 자라 할 것이다. 한 사람이 집을 잃으면 온 세상이 그를 비난하지만 온 천하가 길을 잃으면 비난할 줄 모른다. 어떤 사람이 집안 일을 내던지고 유람하면서 돌아가지 않으면 방탕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또 육체적인 삶을 중히 여기고 교묘한 능력을 뽐내며 명예를 닦아 과장된 자랑을 하면서 그칠줄 모른다면 그릇된 자들이다.
당신은 몸도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늘과 땅이 맡기어 놓은 형체이다. 그대의 한 몸도 음과 양의 조화를 도둑질하여 그대의 삶을 이룩하였고 그대의 형체를 완성하였거늘 하물며 그밖의 물건이야 도둑질 아닌게 있겠소? 자기 것이라 인정하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은 모두가 미혹된 짓이다. 무릇 모습과 모양과 소리와 빛깔이 있는 모두가 물건이다. 곧 만물은 형체가 없는 것(道)에 의하여 만들어져서 변화가 없는 것으로 머물게 된다. 무릇 이러한 것을 터득하여 그것을 추궁하는 사람은 올바름(正)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은 하늘에 몸을 담아 두기 때문에 그를 손상 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강함은 자기만 못한 자에게 앞서지만 유함은 자기보다 뛰어난 자에게 앞선다. 그는 위태롭게 되는 일이 없다. 이러한 도를 지키면 천하를 맡아 다스리는 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보통 사람은 모습이 같은 사람은 가까이 하되 지혜가 같은 사람은 멀리 한다. 성인은 그 반대다. 정말로 힘있는 사람은 남에게 그 힘을 드러내는 일이 없다.
만물이 서로 다른 것은 삶이요. 서로 같은 것은 죽음이다. 삶을 즐기는 사람은 가난하지 않고 몸을 편히하는 사람은 재물을 불리지도 않는다. 죽어서 명성을 얻는 것은 취할 것이 못된다. 비록 그를 칭송한다 하더라도 알 수 없고, 비록 그에게 상을 준다 하더라도 알지 못하는 것이니, 나무 그루터기나 흙덩이와 다름 없는 것이다. 이름을 지키기 위하여 사실에 누를 끼친다면 위태롭고 망하게 되어도 구제할 수 없게 됨을 걱정해야 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어려움은 현명한 사람들을 알아주는데 있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 현명함에 있지 않은 것이다. 남의 말을 듣고 행동하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나를 위해줄는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남의 말만 듣고 나를 해치게도 된다. 선한 일을 행한다 하더라도 명성을 얻기 위하여 하면 안된다. 명성을 얻으면 명성엔 이익이 따르고 이익엔 다툼이 따른다. 이익을 놓고 남과 다투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이 파멸되고 말 것이다.
만물은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것이다.
불성이 곧 중도이다. 불성은 안도 밖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불성은 일체중생이 가지고 있지만 현재 일체가 진실한 불성의 본성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을 겸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즉 모든 중생이 근본무명인 제8 아뢰야에 덮여있기 때문에 능히 보지 못하는 것이다. 원인도 결과도 아닌 항상 무변한 것이 불성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십이인연을 보는 자는 곧 법을 보는 것이고, 법을 보는 자는 곧 부처를 보는 것이며, 부처는 곧 불성이다. 다시 말하면 십이인연은 일체의 양변을 모두 떠난 중도이지 시간적으로 생기는 법이 아니다. 이 중도가 바로 불성이다. 부처는 곧 열반이다. 그런데 이것을 바르게 알려면 오직 깨쳐서 불지佛地에 들어가야만 알 수 있다.
시장에 살면서 소음 속에서 고요해지라. 관계를 끊어야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자유는 초월속에 있으며, 초월이란 반대가 되는 양극이 동시에 더불어 있는 곳에 그대가 살 때 비로소 오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 속에 살되 세상이 그대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사랑하되 그 속에 빠지지 말고 관계를 맺되 홀로, 전적으로 혼자 힘으로 서라.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심각해하지 말라.
기억(과거)도 끝이 없고 상상(미래)도 끝이 없다. 그 둘 사이에 아주 미세한 현재가 있으며 그대가 절대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대가 만약 현재를 인식한다면 문이 열리고 그 문은 영원으로 향한다. 마음이 무심으로 들어가는 것은 바로 거기에서 부터이다.
신은 無이며 무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사랑은 맹목적이며 결혼은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이다. 몸 속에 사는 것과 몸을 떠나는 것은 같다. 그대는 집 속에서 살지만 그대가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와 똑같이 깨어있는 의식은 몸 속에 살고 몸을 사용한다. 즉 그대는 차에 앉아 차를 몰지만 그대는 차가 아님을 안다. 그대는 어느 순간 차에서 내릴 수 있다. 무한성은 그대의 본성이다. 몸은 죄인이 아니다. 몸은 결백하며 아름답다. 죄인은 마음이고 마음이 악마이다. 그대는 마음을 속여야 하고 그래서 노력(도, 요가, 탄트라, 선, 하시디즘, 명상)이 필요하다. 행위를 통해 무위를 성취하라. 노력을 통해 노력없음을 성취하라. 그런 다음 강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바로 그 흐름 속에 그것은 바다에 도달한다.
풍경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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