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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83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4. 8. 29. 22:24반응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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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철학 183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VZ9bQ_INJ0w
587.
거짓 종교의 훈련은 매우 어렵다. 집중을 위하여 마음을 훈련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왜냐하면 마음은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마음은 계속해서 오래된 습관으로 되돌아가려 한다. 그대는 그 마음을 다시 잡아 당기고 마음은 또 도망친다. 그러나 마음을 옆으로 밀어 놓는 일은 매우 간단하다. 결코 어렵지 않다. 그대가 하는 일의 전부는 주시하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 속에 무엇인가가 계속된다. 그러나 절대 간섭하지 말라. 그것을 중지시키려고 하지 말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 그대가 무엇을 하든간에 그것은 훈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코 아무것도 하지 말라. 단지 주시하라. 주시는 행위가 아니다. 하늘의 구름이나 석양을 지켜보듯이, 또는 길거리의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듯이, 생각과 꿈과 악몽들의 흐름(관련된 것, 관련없는 것, 일관된 것, 모순된 것,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지켜보라. 그 흐름은 항상 러시 아워이다. 그대는 단지 지켜볼 뿐이다. 아무 관계도 없다고 느끼는 것, 그것이 마음을 주시하는 간단한 방법이다. 마음이 일으키는 대부분의 생각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그 생각들은 그대의 부모, 선생, 친구, 책, 영화, 텔레비전, 신문들로부터 온 것이다. 그대 자신만의 생각이 얼마나 있는지 헤아려보라. 그대는 자신만의 생각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랄 것이다. 모든 생각들은 다른 곳으로부터 왔다. 모든 생각들은 빌려온 것이거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주입된 것이다. 그대만의 것은 없다. 일단 명상이 발생하여 그대가 단 한 순간이라도, 주시자가 된다면, 그대는 이제 어떻게 하면 주시자가 되는지 알게 된다. 마음에 관한 현상 중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그대가 주시자가 되면 마음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마치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이 주시하는 마음을 몰아낸다. 생각과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로 가득찬 마음이 사라진다. 명상은 단순히 지켜봄, 깨어있음이다. 이 지켜봄은 아무 것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것은 발명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지켜봄은 드러낸다. 그것은 단지 ‘거기 있는 것’을 발견할 뿐이다. 거기엔 무엇이 있는가? 그대는 자신 속으로 들어가고 무한한 ‘비어있음’을 발견한다. 너무나 아름답고 고요하며 빛으로 가득 차 있고 너무나 향기로운 비어있음을 발견한다. 그대는 신의 왕국에 들어섰다. 그대는 신성 안에 들어선 것이다. 그대가 일단 이 비어있는 공간 안에 들어섰다가 나가면 그대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다. 그대는 여전히 똑같은 세상 속에 살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살진 않을 것이다. 그대는 물 위에 핀 연꽃처럼 살 것이다. 연꽃은 물 위에 피어 있지만 물에 의해 오염되진 않는다. 필요한 것은 노력없는 깨어있음과 지성, 의식의 각성, 그리고 긴장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다. 깨달음을 위한 노력은 어리석은 짓이다. 깨달음은 그대의 본성이다. 단지 그대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이미 깨달았다. 사회나 정치가나 기득권층은 그대가 깨닫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마치 그대가 생활용품인 것처럼 기독교인, 불교인, 흰두교인, 마호메트교인 같은 딱지를 붙여서 어리석은 수준으로 끌어내려 그대의 피를 빨아 먹는다. 깨달음은 모든 사람이 동등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경험이다. 너의 의식속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외부세계에 구체화된다. 따라서 외부세계에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너의 의식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외부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먼저 너의 생각 속에 존재한다. 머리는 근본적으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오로지 의심하는 일만이 가능하다. 처음에 믿음은 하나의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그 믿음이 꽃피어나면 그것은 존재 그 자체이다. 의심은 두려움에서 일어난다.
오직 죽은 것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되어 질 수 있다. 삶이란 하나의 신비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신비할 수밖에 없다. 삶이란 원래 시적인 것이다. 그것은 눈으로 보아야 할 아름다움이지 설명되어질 수 있는 하나의 이론이 아니다. 삶에는 왜?라는 것이 없다. 네가 천국을 얻기 위해서 세상을 떠난다면 그것은 진정한 떠남이 아니다.
두려움은 죽음의 심부름꾼이다.
모든 예술의 근원은 명상이다. 그러나 예술은 명상에서 멀리 일탈해버렸다. 그것은 크나큰 재앙이다. 예술가들은 예술을 명상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길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음악가든, 시인이든, 화가든, 조각가든,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명상에 도달하지 못하고 광기에 머물고 말았다. 광기란 명상과 정반대다. 그렇게 된 이유는 자명하다. 처음에 예술적인 영감이 일어났을 때는 말이 아니라 침묵이 더 중요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침묵보다 말이 더 중요하게 되어버렸다. 다시 말하면, 예술적 감흥을 표현하기 위해서 말을 쓰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닌 여백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말이 중요해지기 때문에 예술의 우아함은 사라지고 대신 언어의 광기만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경험하는 것은 동시에 과거의 모든 것과 미래의 모든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순간은 둘을 다 포함하기 때문이다. 과거는 계속해서 지금 이 순간으로 흘러오고 있다. 미래는 이 순간부터 성장하여 흘러간다. 현재의 순간은 과거 모든 세대의 나무들을 품고 있는 씨앗이다. 그 씨앗은 나무에서 왔다. 그 나무는 또다른 씨앗에서 왔다. 그대의 씨앗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마침내 최초의 나무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나무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존재해 왔다. 또한 씨앗은 미래의 나무를 품고 있다. 이 씨앗으로부터 새로운 나무가 자랄 것이며 나무는 수천의 씨앗으로, 씨앗은 다시 수천 그루의 나무가 될 것이다. 한 씨앗의 모든 세계를 만들 수 있다. 나아가서 모든 우주를 푸르게 만들 수 있으리라. 이 작은 씨앗안에 그만큼 많은 것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현재는 시간의 씨앗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모든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고 있다. 단지 현재에 살아라. 그러면 모든 과거도 모든 미래도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다. 시간의 방해를 받는 것은 ‘미지의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이다. 미지의 것은 시간이나 다른 어떤 것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대가 미지의 것을 환영할 자세가 되어 있다면 결점과 실패를 딛고 성공을 이룩할 수 있는 비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답게 죽기 위해서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깨달음은 단지 시작일 뿐 그것은 영원히 성장한다.
사랑은 감정도 느낌도 아니다. 사랑은 모든 에너지의 근본이다. 그 자체로 스스로 존재하는 그것을 道라한다. 그것은 유일한 본질이자 유일한 근원적 영혼이다. 그것들은 보이지 않지만(이름도 형상도 없다) 하늘 빛 속에 또한 두 눈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인간은 의식의 꽃을 피워낼 씨앗을 간직하고 있으며, 신이 될 가능성을 지녔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와 국가, 기득권층 그리고 조직화된 종교에 의해 최면에 걸렸기 때문이다. 사회는 노예를 필요로 하며 인간은 기계로 태어나서 기계처럼 살다가 기계처럼 죽는다. 인간은 기계인 것이다. 그대는 그대 속에 육체 이상의 그 무엇을 알고 있는가? 심지어 그대가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했던 어떤 것을 그대 속에서 보았는가? 그것을 본적이 있다면 그대는 불멸이다. 만약 그대의 본래 얼굴, 태어나기도 전에 가졌던 그 얼굴을 알고 있다면 죽은 뒤에도 그대가 거기에 있을 것이라는걸 그대는 안다. 사회는 그대가 육체 이상을 알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즉 그대의 육체에만 관심이 있다. 내면에 불멸의 영혼을 가진 자는 인간이 만든 사회, 문명, 문화, 종교의 구조에 대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것들은 그에게는 감옥이다. 그는 군중의 일원이 될 수 없다. 그는 한 개인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사회는 외부에 있으므로 사회는 그대의 에너지가 외부로 계속 움직이도록 만들기 위해 그대가 돈, 권력, 특권 그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갖고 외향적이기를 바란다. 만약 그대가 내부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회에게는 위험한 일이지만 그대에게는 불멸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대가 교회와 절에 간다고 내부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는 그대가 내부로 향하고 싶다면 교회에 가라고 믿게끔 최면을 걸어왔다. 그러나 교회는 다른 그 어떤 것만큼이나 외부에 있다. 교회의 사제는 국가와 사회의 대리인이다. 사제는 항상 신비에 대해 반대해 왔다. 왜냐하면 그대가 신비가에게 가게되면 그대는 내부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가까이 이를수록 길을 잃을 가능성은 더 높다. 그대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대는 그 전체성으로 성취하지는 못했기에 절반의 진리를 나누는 것은 위험하다. 거짓말은 곧 탄로나지만 절반의 진리는 수세기 동안 존속하며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그대는 단지 씨앗이며 아직 영혼이 아니라는 것을. 외부로부터는 나의 육체만이 관찰될 수 있다. 내부로부터 나는 나의 의식을 알 수 있다. 남들의 의견을 가져옴이 없이 그대 자신을 직접적으로 만나 본적이 있는가? 삶은 자신을 만남으로써, 자신을 직접, 즉각적으로 봄으로써만 시작된다. 삶은 남들이 그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대 자신을 볼 수 있을 때만 존재한다. 지켜봄이 그대 속에 주의를 일으킨 것이다. 그대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라.
사람은 물과 같아야 한다. 세상에 새로운 진리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새로운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는 같으나 표현만이 다르다. 진리는 새롭지도 오래된 것도 아니며 어디에 있든 그것은 영원하다. 아무도 진리를 정의할수는 없지만 그 길은 정의될 수 있고, 길은 분명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일단 길이 있으면, 해야 할 일은 그 길로 걸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道 속에 살지만 인식하지 못한다. 물고기가 바다속에 살면서 바다를 잊고 지내듯이. 양 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중도에 남아 있으라. 그러면 그 중도에서 초월이 생긴다.
풍경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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