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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81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4. 8. 15. 01:43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81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GWMlPzsDQ20
585.
삶은 시간을 통해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이해는 명상을 통해서 얻어진다. 그것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시간은 외부의 현상, 표면의 현상이다. 그대를 지혜롭게 하는 것은 경험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수백명의 여성과 잠자리를 했다고해서 그가 사랑을 남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가? 깨어있는 의식과 경험의 만남이 바로 지혜이다. 사람들은 내면으로 만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충고를 따를 준비가 항상 되어있다. 그리고 문제는, 바로 그 남의 충고 때문에 그들은 내면으로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그 충고를 구하러 다닌다. 모든 自動性이 사라졌을 때 그대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한 사람의 붓다가 된 것이다. 규칙을 통해선 그것이 불가능하다. 규칙을 통해선 그대는 군인이 될 수 있지만 산야신이 될 수 없다. 모든 규칙이 떨어져 나가야 한다. 그대신 진정한 이해가 심어져야 한다. 규칙을 떨쳐 버린다는 것이 반사회적이 되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은 그대가 사회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특정한 규칙들을 따르긴 하지만 그것이 단지 게임의 규칙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모든 도덕성이라는 것도 교통규칙과 다를바 없다. 산야신은 규칙들이 단지 하나의 게임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든 형식적인 것들이다. 산야신은 그것들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넘어서 간다. 초월한다. 그 자신은 그것들로부터 자유롭다. 그는 타인을 위해서 그 규칙들을 따르지만 그렇다고 자동인형이 되진 않는다. 그의 의식은 늘 깨어있다. 현자는 하나의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는다.
빛이 창문을 통해 집안으로 스며 들면 빛이 이루는 선속에 먼지가 춤을 추고 있지만 방안의 텅빈 공간은 움직이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질문하라. 나는 누구인가? 춤추는 먼지인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방안의 공간인가?
현재는 과거의 연속이 아니다. 그것이 현재이기 위해서는 현재는 과거와 불연속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 비로소 그것은 젊고 신선하고 새롭다. 그리고 그때, 그것은 시간의 일부가 아닌 영원 그 자체가 된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 없다. 즉 시간 속에서가 아니라 영원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영원의 현재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생각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낱말들은 사물이 되어 버린다. 신도 하나의 사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물에 대한, 물질에 대한 숭배를 행한다. 그러나 신은 물질이 아니다. 신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 모든 것의 복합체이다. 신은 따로 있으면서도 함께 있는 것이다. 신은 죽었다. 그러나 진정한 신은 죽지 않는다. 진정한 신은 실체이며 본질이고 함께 있음이다. 신은 창조자가 아니다. 창조성이다.
우주적 오르가즘(탄트라)에 도달하면 자연의 모든 것과 교섭을 이룰 수 있다. 사랑은 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성으로부터 나올 뿐이다.
기도는 요구가 아니라 감사이다. 그때 기도는 행위로서의 무엇이 아니다. 존재의 길인 것이다. 즉 전체성이 된다. 존재는 하나이다. 그러나 삶은 대극對極에 의존한다. 삶은 강과도 같다. 존재할 강에는 두 개의 둑이 필요하다. 삶은 남자와 여자, 어둠과 밝음, 삶과 죽음 사이의 변증법적 과정이다. 삶은 이원성을 필요로 한다. 최후의 것이 이원성을 초월한다.
분석적 방법은 물질과 사물에 대해서는 나무랄데 없다. 그런 것에는 내부 따위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식은 내부성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의식에 대해서 분석적 방법을 도입한다는 것은 전혀 객체가 아닌 그것을 한 객체로 다루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의식은 객체가 될 수 없다. 그 본성 자체가 주관성이고, 그 존재 자체가 주관성이다. 따라서 바깥에서 그것에 접근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 의식에 대해 안다 해도 의식을 깨달은 것은 아니다. 의식은 안쪽에서 접근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방법은 분석이 아닌 명상이다. 명상은 통합적이다. 그것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와 관련된다. 그것은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이다. 합리적이 아닌 비합리적 내지 초합리적인 것이다. 과학적이 아닌 종교적, 신비주의적인 것이다. 의식과 관련된 진정한 지식은 명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고 다른 모든 것은 그저 피상적인 식견으로 기본적으로 잘못돼 있다. 왜냐하면 그 바탕부터가 거짓이고 유해하기 때문이다. 당신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라. 同一은 마음의 뿌리이다. 마음의 뿌리와 그 뿌리와의 동일을 잘라내는 순간, 당신은 초월했음을 보게 된다. 초월은 성취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며 기억이다. 탄트라는 명백해진 형태를 초월하는 기법이며 명백하지 않은 것으로 들어가는 기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유래에 대한 원천으로 들어가는 기법이다. 그때 비로소 지복, 자유, 축복이 있는 것이다. 지복은 전혀 흥분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도 불행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인 비흥분과 편안함, 그리고 완전한 존재의 상태이다. 어떤 생각이나 구분 이원성이 없이 그때 조용함과 조화가 있다. 그 순간이 이러한 내면의 통일이 재발견될 때 당신은 전체와의 다정한 통일을 시작한다. 즉 오르가즘의 순간이 초월인 것이다.
신은 성의 에너지를 창조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만일 신이 성을 죄라고 간주한다면 이 세계에서 우주에서 신보다 더 큰 죄인은 없다. 꽃이 피고 있는 상태는 열정의 표현이고 그것은 성적인 행위이다. 성은 神性이다. 성이라는 원초적인 에너지는 그 안에 신을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는 에너지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신비로운 힘이다. 그러나 성교없이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것은 명상이다. 성교는 일시적이지만 명상은 지속된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가 자신의 미래를 형성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는 삶을 부조화이고 무익하며 의미가 없다는 음침한 생각을 당장 그만둘 것이다. 기본적인 충동은 창조하는 것, 즉 새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오르가즘은 항상 영적이다. 그것은 결코 성적인 것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씨앗을 가르치려 한다면 씨앗은 무엇을 할지 몰라 미쳐서 나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씨앗의 성장은 사적인 지식이 아니다. 우주적인 의식에 달려있다. 인간은 신이되는 청사진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신의 씨앗이다. 그것이 씨앗인 것은 인간의 의식이 단지 시작일 뿐이기 때문이다. 씨앗은 자라고 또 자라서 우주가 되는 곳까지 이르러야 한다. 이를위해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수행법도, 신조도, 교리도, 종교도 필요가 없다. 본성으로 족하다. 그대가 할 일은 단지 그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아기는 자궁 속에서의 장엄한 침묵을 안다. 이 기억은 무의식의 깊은 심층 속에 감추어져 있다. 사람들은 삶이 불행하다고 말한다. 만약 그대가 행복의 어떤 체험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대가 불행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대가 예전에 알 수 없던 것을 찾을 수 있겠는가? 무의식의 마음 속에, 거기에 체험의 빛이 있다. 거기에 감추어진 씨앗이 있다. 그대는 어떤 축복을, 과거에 살았던 어떤 천국을, 예전에 들었던 어떤 음악을 알고 있다. 그대가 그것을 모두 잊어 버렸다해도 그대의 모든 존재로 그것의 갈증이 침투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런 존재의 지식이 그대 안에 감추어져 있다. 오직 우리는 그것을 찾고 있을 뿐이다. 의식과 형상은 둘이 아니다. 우주 그 자체가 의식이다. 동과 정은 두 개의 상황이 아니다. 그것들은 오직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점의 다른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은 마음이 개입된 것이고 깨달음은 마음을 벗어나는 것이고,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전체성이다. 그래서 마음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마음은 분석과 분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마음은 오직 구별되는 것만 이해할 수 있다. 궁극에 대한 모든 지식을 모을수는 있지만 그대는 궁극 자체를 알지 못한다. 물질은 외부이고 외부를 아는 모든 것은 지식의 차원이다. 그리고 지식 속에는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지식을 통해서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한 결코 중심에 이를 수 없다. 중심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대가 바로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대는 중심 속에 뛰어들어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신을 알고자 한다면 그대가 신이 되는 길밖에 없다. 그것 자체가 되라. 진리에 관해서 알려고 하지 말라. 다른 사람들이 해 놓은 말을 긁어 모으지 말라. 그대가 아는 것은 무엇이든 떨쳐 버려라. 두 눈을 딱 감고 때가 있는 그 자리에 그저 존재하라. 사실 그대는 구하는 자가 아니다. 그대가 바로 목적지이며 깨달음이다. 외부에서 찾지말고 내면으로 눈을 돌려라. 목적지는 그대가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장소가 아니다. 근원에 이르는 것이다. 경전은 죽은 것이다. 그대가 무엇을 보든 듣든지 그것은 마음을 통해서 보고 듣는다. 그대의 마음은 그것을 변형 시키고 해석을 내린다. 그래서 그대에게 도달할 때는 이미 낡은 것이 되어있다. 마음은 항상 속임수를 쓰고 주석을 덧 붙인다. 올바르게 듣는 것은 마음을 통과하지 않고 듣는 것이다. 판단하지 않고, 해석을 붙이지 않고, 가치평가를 하지 않고 듣는 것이 올바르게 듣는 것이다. 사실 그대가 무엇을 보든지 그것은 하나의 영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그대의 눈에 비친 영상이다.(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영상들은 항상 진실과 다르게 왜곡되어 있다.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진 거울이라도 거기에는 실체와 차이가 난다. 그리고 거울을 통해 영상을 보는 것은 바로 환상을 보는 것이다.
그대가 아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야이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과거는 아무리 고쳐봐야 과거이다. 깨달음이란 불연속적인 현상이다. 연속성이 깨어진 것이다.
풍경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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