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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79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4. 8. 1. 22:28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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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철학 179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Dsag3EUnfKM
583.
좌선은 어느 곳으로도 움직이지 않고 존재의 근원에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그냥 존재하는 것이 바로 좌선이다. 모든 지식(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손가락에 집착하고 있다. 부처와 도라는 말은 단지 실체를 가리키는 것일 뿐 그 속에는 아무런 실체가 없다. 안으로 향할 수만 있다면 물방울은 큰 바다가 된다. 사실 물방울이 바로 큰 바다이다. 하지만 물방울은 그것을 모른다. 그것이 유일한 분리이다. 명상의 空에서 그 분리마저 없어지고 만다. 명상이야말로 삶이라는 수행의 중심이다. 자아의 부재야말로 신의 현존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이 보이는 때야말로 흙 속에서 씨앗이 끊임없이 꿈틀대고 있다는 것을! 똑같은 경우를, 진리를 구하는 탐구자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무엇하나 이루지 못한 듯이 보일때도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모든 생명 에너지의 성장은 그 전부가 눈에 보이는 게 아니고 인간에게 알려지는 게 아니다. 그저 그 결과만 알 뿐이고 과정은 모르는 것이다.
침묵은 대화의 부재가 아니라 사고의 부재이다.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오로지 앉아서 생각의 흐름을 지켜보라. 오로지 지켜보는 이것이 저절로 생각을 소멸시켜 준다.
욕망은 생각의 그림자일 뿐, 미래로 달려가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에고의 투영이다. 필요는 지금 이 순간에 관련된 것이다. 즉 필요는 실존적인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결코 충족되어 질 수가 없다. 지평선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지평선도 그 만큼 뒤로 물러난다. 그것을 마야 즉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말해 욕망이 그렇다는 것이다. 안정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확실성이 삶의 본질이다. 어떤 것이 살아있을 때 그것은 매순간 변화한다. 오직 죽은 것만이 변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안정을 구하려고 노력하지 말라. 미지의 세계로 걸어들어 가라. 자기자신에 대해 근심하는 자는 세속적인 인간이다. 자기자신에 대해 근심하지 않는 자는 구도자다. 삶이 그대를 보살펴 준다. 신은 언제나 그대가 그에게로 간 그 방식 그대로 그대에게 온다. 신은 하나의 반응이다. 그것은 그대 존재의 메아리다. 그대가 신을 바라보는 바로 그 눈을 통해 신이 그대를 바라본다. 마음은 논리적이지만 삶은 모순적이다. 생각에 매달리지 말고 생각으로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 과학에는 머리가 필요하고 예술에는 가슴이 필요하다. 그러나 삶에는 존재 전체가 필요하다. 만일 머리만이 활동한다면 메마른 이론만 늘어난다. 가슴만이 활동한다면 꿈과 허구만 늘어난다. 남의 기대를 채우려는 생각을 버려라. 그리고 남이 그대를 채워주리라는 기대도 버려라. 맨 앞줄에 서려고 하지 말라. 그러면 뒤에 서있는 모두가 그대의 적이 될 것이다. 옳은 행동은 잘못된 행동에 반대되는 의미가 아니다.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뜻이다. 세상에 대해 야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곧 그가 열등하다는 의미이다. 그대의 모든 추구는 부질없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실제 모습과 정반대되는 것을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추한 사람이여, 그는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한다. 그대가 아름답다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의식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의식하지 않는 아름다움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의식적이 될 때 그때 추해지기 시작한다. 꽃들은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비교하라. 그러면 열등감이 생긴다. 비교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단순히 존재할 뿐이다.
예술은 객관성을 상징하지만 종교는 주관성을 상징한다. 관념없이 본다면 삶은 하나의 신비. 우리는 계획하는 것에 미쳐있다. 계획을 통해 자연스러움이 사라진다. 자연스러움의 아름다움이 파괴된다.
본질적으로 섹스는 육체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모습을 바꾼 마음의 한 형태이다. 섹스에 대해서 고의로 적대감을 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인위적인 무집착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섹스하고 있는 동안에도 깨어있는 상태로 있으라. 그 상황의 입회인이 되는 것이다.
도의 사람은 알려지지 않게 머물러 있는 것이다. 진실로 현명한 이는 올바른 도 안에서 세상을 본다. 인간이 꿈이란걸 깨닫자마자 그 꿈은 사라진다. 꿈이란 내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곳에 없는 것을 어떻게 버릴 수가 있겠나?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아라는 것은 인간의 꿈이고 인간의 수면이다. 그것을 내버리려는 사람들은 재차 또 다른 환각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그들의 겸허함, 그들의 무자아는 그저 더욱 많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 덫에 빠지지 말고 딱 하나만 마음 속에 담아 두라. 눈을 뜨고 바라보는 것이다. 물방울이 바다가 될 필요는 없다. 물방울은 이미 바다이다. 오로지 그런 것을 알기만하면 된다. 존재하는 그것. 그게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그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리가 된다. 그것이 인간을 해방시킨다. 자신을 완전히 풀어 놔 줘라. 노를 저을 필요는 없다. 그저 그게 흘러가는 대로 맡겨두라. 헤치고 나아가는 게 아니라 그저 떠서 흐를 뿐이다. 그러면 강물 그 자체가 바다로 데려다 줄 것이다. 물속에 빠지는 걸 무서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런 두려움이 자네를 헤엄치게 하기 때문이다. 목표도 갖지 말라. 목표를 지닌 인간은 헤쳐 나가는 걸 시작하기 때문이다. 죽은 자만 밟아다져진 길을 걷는다. 삶은 새로운 것으로의 끊임없는 탐구다. 목적없이 사는 것이야말로 참되게 살아가는 것이다. 사는 것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을 까? 뭔가를 하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실행한다고 해서 반드시 신에게 도달하는 건 아니다. 그냥 멈춰 서서 지켜보라. 자기를 버리고 갈 필요는 없다. 있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버릴 수가 있나? ‘자기’는 관찰되고 이해되지 않으면 안된다. 사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것과 싸우지 말라. 사고에서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은 사고 그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자신의 사고를 깨닫도록 하라. 사고를 지켜보는 게 바람직하다. 인간의 삶에 감각의 소란은 있어도 평안과 고요함이 없다. 즉 미친듯한 분주함은 있어도 차분함은 없다. 그것은 인간의 삶에 자신의 일만 있고 신과 관련된 것은 없는 탓이다.
세상에 있다는 게 집착이 아니라 마음속에 세상이 있다는 게 집착이다. 그리고 마인드에서 세상이 사라져 버렸을 때 그것을 무집착이라고 한다. 무집착은 사물과 관계된 게 아니라 생각과 즉 바깥이 아니라 안쪽과 관계가 있고 세상과 관련된 게 아니라 자기자신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씨앗은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지만 인간에게는 가능하다. 그런 내관內觀을 명상이라 한다. 그것을 통해 자기가 자신을 깨닫는 것이다. 즉 지금의 상태 그대로 아는 것이다. 존재하는 그것은 말할 수 없다. 무엇이든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는 그것이 아니다. 진리는 언어를 초월한다. 오로지 침묵만이 진리와 연결돼 있다. 마음은 언어를 초월한 것마져 말하고 싶어한다. 인간은 만년 결핍상태이다. 그것은 자기자신을 알지 못하고 욕심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실존을 알지 못하고 무언가 될 것을 야망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다. 죽음은 바깥쪽에 있는 것도 미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은 그대 안에 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의 또다른 한 면이니까. 삶은 죽음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똑같은 에너지에 속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있다면 그때 명상은 없다. 그리고 그곳에 명상이 있다면 그댄 없다. 열쇠를 집안에서 잃어버렸으면 집 안에서 찾아야지 집안보다 밖이 밝다고 집밖에서 찾으면 안된다. 존재의 모든 형태는 한계(유한)가 있다. 하지만 존재는 무한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형태없는 것만이 무한일 수 있고 존재라는 건 형태가 없는 것이니까. 그리고 존재가 모든 형태를 취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형태를 취한다는 것은 죽음을 불러 들인다. 왜냐하면 존재 그 자체는 영원한 삶이지만 형태는 죽음의 선고니까. 형태에 자기 동화하지 말라. 그 동화가 죽음의 공포를 낳는다. 형태없는 것을 마음에 담아두라. 그렇게 하면 불사성不死性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대가 그때 그것이니까! 무리하지도 않고 강요하지도 않으며 필요를 느끼지도 않고 유혹되지도 않는다. 그때 그대의 일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대는 자유인이다. 쉬운 것이 옳은 것이다. 옳게 시작하라. 그러면 쉬어진다. 쉽게 나아가라. 그러면 그대는 옳다. 쉽게 나아가는 옳은 길은 그 옳은 길을 잊는 일이며 또 쉽게 나아간다는 것조차 잊는 일이다. 이 세계에선 노력은 공격적이며 폭력적이며 경쟁적이다. 그러나 다른 세계에서는 노력을 통해서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 그리고 노력으로 시작한 사람은 마지막에 가서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노력이 사라지면 어떤 것도 불완전하지 않다. 이때 꿈은 필요없다. 꿈이란 어떤 것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모든 것을 완성하려는 경향이 있다. 완성된 것이 아니면 마음은 늘 불편해 한다.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 노력이 기울여진다. 그래도 미완성이면 꿈이 그것을 완성 시킨다. 욕망이 있는 곳에 꿈이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욕망은 곧 꿈이기 때문이다. 꿈은 욕망의 그림자이다. 미완성인 것은 그대에게 긴장을 준다.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면 긴장이 있다.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전체 상황을 이해하라. 부자연스러운 것은 피하라. 삶이 그 자체로 흘러가게 하라. 자연을 파괴하고자 한다면 즉 비난하고자 하면 성을 비난하라. 그리고 사랑을 비난하라. 왜냐하면 자연 전체가 성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자연 전체가 성의 에너지, 사랑의 에너지로 흘러 넘치고 있다. 새들이 노래한다. 나무가 꽃을 피운다. 이것은 모두 폭발하는 성적 에너지 현상이다. 자연 전체가 그 스스로를 번식시키고, 그 스스로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사랑과 존재의 더 깊은 환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아무런 노력 없이도 장미는 아름답고 뻐꾸기는 노래한다. 자연적이 못되는 것은 그대가 자기자신을 의식하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쉼을 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대를 쉼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나를 숨쉬고 있을 때 인식의 대상이 완전히 바뀐다. 관심이란 남들이 그대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는가 하는 것이다. 왜 그토록 남들에 대해 신경 쓰는가? 모두가 남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누가 그대를 신경 쓰는가.
풍경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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