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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78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4. 7. 26. 03:29반응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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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철학 178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b6vk25Pz3v4
582.
성의 욕구는 성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 있는 것이다. 모든 금욕은 거짓된 것이다. 금욕을 명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주춧돌로 삼지 말라. 그러한 것은 없다. 오히려 사랑이 명상의 주춧돌이 될 수 있다.
그대 자신이 곧 우주이다. 닦을 도도 없고, 깨달아 얻을 法도 없다. 누굴 따를 필요도 없고, 어떤 경전을 외울 필요도 없다. 밖에 있는 어떤 것도 기억할 필요가 없다. 오직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만 기억하라. 그대는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처이다. 그대의 불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불성은 잃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본래 그대는 부처인 것이다. 일단 이 사실을 깊이 알면 삶에서 일어나는 일 모두가 신령한 것이 된다. 어떤 것도 거부되지 않는다. 별들의 반짝임을 잠재우며 밤 비가 내린다. 그러나 비가와도 별은 있다. 즉 내면의 빛은 변함없이 그곳에 있다. 윤회란 없다. 불행이 윤회할 뿐이다. 행복에는 이유가 없다. 행복은 우리의 본성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불행이 근본적으로 남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보다 불행, 고민, 상처, 문제에 대해 얘기한다. 그것은 불행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것을 듣는 것은 그 역시 불행의 전파를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갖고 다니는 것이다. 아무것도 환상적이지 않다. 외부든 내부든 둘 다 존재계의 일부이다. 세상은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곧 세상이다. 매 순간 모든 것을 누려야 한다. 그대의 존재는 불안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삶 이전에 그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삶 이후에 그대는 또다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불안하고 두려워 할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의 모든 교육제도와 문화적인 믿음들은 그대에게 야심을 갖도록, 무엇인가 되도록 강요한다. 야심이 클수록 불안의 파도가 더욱 커진다. 그리하여 거의 광적으로 그대는 욕망에 집착한다. 무엇인가 되려는 노력은 곧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대는 무이기 때문이다. 모든 차원에서 주시를 계속하면 주시 그 자체를 발견한다. 거기 주시할 대상이 사라진다. 이 사라짐, 이 무가 그대의 본질이다. 무의 체험은 그대의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대가 존재하지 않음을 아는 것이 가장 위대한 앎이다. 거기 인식하는 자도 사라질 때 모든 것이 존재계 속으로 해체된다. 무가 된다는 것은 전체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사랑은 설명되지 않고 비논리적인 하나의 혼란이다. 그것을 체험할 수 있지만 설명할 수 없다. 이슬방울이 대양 속으로 사라질 때 그것은 무가 되지만 동시에 대양 그 자체가 된다. 따라서 무와 충만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한 가지 현상의 두 가지 표현방법일 뿐이다. 무는 부재도 죽음도 아니다. 무는 곧 너무도 큰 충만이기 때문에 그대는 그것을 정의 내릴 수도 없고 한계를 정할 수 없다. 무는 자기를 잃는 것이다. 순간 그대는 우주 전체를 얻는다. 그대가 존재계 속으로 휴식해 들어갈 때 그대의 모든 차이와 차별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됨만이 남는다. 그 하나됨이 근본적으로 그것은 무이다.
명상은 다시금 순진무구해지는 길이다. 명상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것은 명상이 아니다. 그대는 강의 물결에 불과하다. 그러나 단 한 순간도 강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이 존재계 전체는 온갖 종류의 물결과 파도가 끝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거대한 대양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 대양 자체는 영원하다. 그 영원성 그것이 그대의 실체이다. 일어났다가 스러지는 것은 한낱 꿈에 불과하다. 하나의 현상이고 환상일 뿐이다.
그대가 집착하는 모든 것은 그대 자신의 상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신은 그대의 상상이며 그대의 철학 역시 상상이다. 존재계는 단지 하나의 순수 침묵일 뿐이다. 그 침묵은 무한한 다양성으로 표현되며 다차원적이다. 이 존재계 전체가 너의 것이다. 그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남에게서 주어진 것이다. 그것들을 밀쳐 놓으면 그대는 발견할 것이다. 하나의 순수한 텅빔 空이 그대의 것임을! 나머지 모든 것은 남에 의해서 그대에게 주어진 것이다. 남에 의해서 그대에게 주어진 그 모든 말과 믿음과 종교 뒤에 숨어있는 하나의 순수한 텅빔이 바로 그대이다. 바다는 언제까지나 기다려준다. 즐거움으로 가라. 비록 그대가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대는 바다의 한 부분이다. 늘 바다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중이다. 모든 중생이 오늘 아니면 내일 붓다가 될 것이다.
성과 죽음은 똑같은 에너지의 두 지점인 것이다. 성으로부터 태어나고 죽음 속으로 사라진다. 성행위조차도 그대가 존재 전체로 그 속에 있을 수 있다면 하나의 명상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대 자신이 완전히 몰입하여 시간도 정지하고 사념도 정지하고 모든 것이 절대적인 침묵 속으로 사라지는 그러한 순간이 바로 성행위에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침묵은 명상에 의해서도 얻어질 수 있다. 성을 통해서는 단 한 순간만 그것이 가능하지만 명상을 통해서는 언제든지 24시간 동안 그 궁극의 실체 곁에 머물 수 있다. 매순간이 하나의 틈이 된다. ‘나’라는 것의 사라짐을 알면 거기 두려워 할 것이 없다. ‘나’가 곧 전체라는 것을 알면 거기 잃을 것이 없다. 성과 명상은 동일한 체험으로 인도하지만, 명상이 지름길이다. 나는 너무나 넓어서 모든 모순들을 포함할 수 있다. 존재계에선 분명한 구분을 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서로에게 녹아들어가 있다. 동일한 생명 에너지가 수천 수만 가지의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모든 것은 동일한 생명 에너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삶의 신비다. 이 무한한 형상화, 이 영원한 형상화의 가능성이 삶을 하나의 기쁨으로, 하나의 노래로,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만일 모든 것이 설명되어질 수 있다면 삶은 매우 제한되고 매우 작고, 살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비다. 그 신비를 자각한다면 그대는 더욱 그 신비를 누릴 수 있다. 그것이 삶의 신비, 그것이 삶의 미지성未知性 불예측성이다. 그것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고 논리적이고 기계적이라면 삶은 그 빛과 풍요를 잃을 것이다. 그 신비는 사라지지 않으며 누구도 그 신비를 부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체계도 그것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은 더 없이 크고 그것과 비교해서 우리의 체계는 더없이 작다. 우리가 세운 체계는 우리 생각 만큼의 크기일 수밖에 없으며, 우리의 생각은 그다지 크지 않다. 사실 그대가 말하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 않다. 따라서 상대적인 개념으로는 모든 것이 설명되어 질 수 있지만 절대의 의미에서는 정의가 불가능하고 모든 것이 신비다. 절대계에서는 그대 자신조차 알지 못한다. 의식의 깊은 층에 도달하는 순간 그것은 너무도 신비하기 때문에 그대는 그것을 누리고 춤 출 수 있지만 그것을 정의 내릴 수는 없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이원적이고 말해질 수 없는 것만이 비이원적이다. 낮은 밤을, 삶은 죽음을, 남성은 여성을 포함하고 있다. 반대의 것을 포함하지 않고서는 그대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내면에서는 이원적이지 않은 ‘하나’를 체험할 수 있다. 그때 그 순수한 침묵은 소리의 반대가 아니다.
선은 깨달음의 욕구도, 동기도, 노력도, 목적지도 아니다. 선이 곧 깨달음이다. 선은 아주 단순한 현상이다.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다. 그대는 다른 무엇이 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버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것의 실체를 인정한 것이다. 허상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다. 허상은 그것이 허상임을 보면 된다. 그러면 그것은 사라진다. 그대는 그대의 그림자를 버릴수 있는가? 그림자로부터 달아날 필요가 없다. 그것이 그림자라는 사실을 알면 된다. 따라서 실체는 허상을 버림으로써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속세를 떠난다는 것은 속세에 의미를 주는 것이다. 허상에 실체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자신이 해답을 발견했다고 믿는 자는 더 이상 진리를 찾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상상 속에 갇혀서 지낼 뿐이다. 인간의 마음이란 사념과 감정과 생각과 과거의 기억들에 불과하다. 마음은 그대의 본질이 아니며, 사회에 의해서 그대의 순수한 바탕에 주입되어진 것이다. 과학은 물질에 국한되어 있고, 심리학은 마음에 국한되어 있다. 명상은 마음을 내던지는 것이며, 그러한 물질과학과 심리학을 초월하여 생명과 의식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다.
예술의 창조성은 주관적인 창조성이며 창조성이라기보다 모조품이다. 진정한 객관적인 창조성은 고요히 앉아있는 일에서 비롯된다. 그대가 완전한 침묵으로 앉아 있을 때, 그리하여 그대의 존재의 대양에 아무런 사념의 물결이 일어나지 않을 때, 그 침묵으로부터 질적으로 전혀 다른 종류의 창조성이 찾아온다.
무엇인가 된다는 것은 곧 한계에 갇히는 일이다. 그리고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사본에 불과하다. 존재의 침묵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름답고 진실성이 있으며 오리지널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 如如를 가르치기 위해 달마가 동쪽으로 갔다.(서쪽에서 왔다.) 그냥 자신의 의식 속에 존재하라. 그대가 우물로 가야한다. 우물이 그대에게로 오진 않는다. 우물은 그대를 초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냥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상태로 그곳에 존재할 뿐이다. 내면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곧 머리 속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뜻이다. 선은 그대에게 머리에서 나와 존재의 근원으로 들어갈 것을 요구한다. 세상의 모든 교육제도는 인간의 에너지를 머릿속으로 집중시켜, 그것을 사념과 이미지와 창조적인 생각들로 바꾸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선이 머리에서 작용하는 에너지의 효용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에너지가 머리에서 사용되면 그대는 결코 그대의 영원성을 자각할 수 없게 된다. 위대한 사상가나 철학자가 될지 몰라도 그대는 삶이 무엇인가를 경험을 통해서 알 수는 없게 된다.
풍경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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