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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77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4. 7. 17. 22:44반응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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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철학 177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uBitEpHdr4Y
581.
시,청,미,후각,감수성은 마음이 연출해낼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그것들로부터 탐욕과 분노와 무지를 일으키는 것은 모두 그것들이 좋아하고 싫어함에 따라 좌우된다. 만약 누가 처음부터 마음의 본질이 텅빈 고요 임을 깨우친다면 그는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마음은 그대의 것도 나의 것도 아니다. 마음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며, 또한 모든 사람의 것이다. 우주적인 마음은 모든 의식을 포함한다. 마음이 문제이고 무심이 해답이다. 무심은 단지 우주적인 마음을 다른 방법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 無는 마음이 아니다. 에고를 부정하고 우주가 아니라 개인을 부정한다. 그것은 단지 모든 한계를 부정할 뿐이다. 그것을 신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럴 경우 숭배의 관념이 생기고 그대는 한정되고 제한된다. 또다시 그대는 전체와 맞닿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개인이란 착각이다. 우주는 진리이다. 만약 누가 우주 속에서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진리는 죽음이다.(이기적인 마음의 죽음) 또한 그것은 부활이기도 하다.(우주속으로의 부활) 그대는 개인으로 죽지만 신으로, 붓다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므로 마음과 그 기능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도와 부합되는 길이다. 이기적인 마음은 그 자신을 늘 바쁜상태로 유지 시키기를 바란다. 그것이 마음이 그대를 속이는 한 방법이다. 마음은 그대를 너무 바쁘게 하여 그대가 그것을 들여다 볼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행위자들은 외향적인 사람들이다. 그 중간 지점에서 바라보며 한가로이 있어 보아라. 그대가 바쁘지 않을 때에 마음은 증발한다. 마음은 비즈니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일거리가 없을 때조차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이다. 마음은 지금 여기에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의 의미는 무위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워야할 수행은 현재에서 현재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그대가 아니다. 그대는 신이고 붓다다. 왜냐하면 마음이 용해되어 사라지기 때문이다. 현재에 존재한다는 뜻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리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들 자신을 제물로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도에 들어갈 수 있다. 현재에 담겨진 그 모든 아름다움과 조우하는 것. 단지 현재에 있는 것. 바로 이것이 명상이다. 사실 그대의 마음이 모든 것을 왜곡시켰다. 환상을 창조한 것이다. 그대는 그 환상을 통하여 보고 있었다. 그대의 마음을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대 자신의 중요함. 즉 그대가 특별하고, 비범하고, 탁월하고, 성스러운 누구인가가 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대는 계속해서 그대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그대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안다. 그대는 그리스도나 붓다가 될 수 없다.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대가 신이다. 현재는 우주적인 마음의 본성이다. 마음의 가장 좋은 장난감으로는 영적인 목표물들이다. 소위 영적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은 그들의 육체를 단식으로 파괴시키고 있다.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참된 도는 마음에 있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보고 비웃는다. 지혜로운 자들은 그 자신을 보고 비웃는다. 어리석고 바보같은 그 자신의 과거를 보고 비웃는 것이다.
언어란 복잡한 마음의 세계이다. 침묵은 소박한 마음의 세계이다. 참된 명상은 언어에 나타나지 않는다. 즉 완전한 침묵이다. 가슴속의 절대적인 침묵이다. 그것은 느낌이지 생각이 아니다. 별볼일 없는 철학자일수록 더욱 복잡하고 과대한 언어에 의존한다. 사실 진리는 매우 단순하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여 침묵에 의해서만이 전달될 수 있다. 진실에 대한 그대의 접근 방식은 언어를 통해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혼자 있을 때조차 그대 자신에게 계속 이야기한다. 마음은 멈춰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그대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진리는 주관적인 것이다. 그대는 오직 그대가 그것을 깨우칠 때만이 알 수 있다. 그대에게 그것을 깨우치게 해 줄 수 없다. 어리석은 탐구자는 지식을 요구하지만 현명한 탐구자는 실존을 요구한다.
단계적인 이해는 마음의 속임수이다. 깨달음 즉 참된 앎은 갑작스런 도약이다. 지식적으로 된다는 것은 아는 자가 아니라 오직 믿는 자가 되는 것 뿐이다. 이는 그대를 묶어 버린다. 어떠한 믿음도 없음이 참된 신뢰이다. 그것은 신념이 아니다. 믿음은 위조된 신념이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언어의 의미는 거짓된 것이다. 언어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말고 귀를 기울여 보아라. 단지 듣기만 하라. 그러면 그것이 명상이 될 것이다. 죄인은 악한 마음을 품는다. 성자는 선한 마음을 품는다. 그러나 현자에게는 마음이 없다. 그는 지혜와 무지 양쪽을 다 초월한다. 선택이 그대를 우둔하게 만든다. 언어에 달라붙지 말라. 그것을 경험하도록 하라. 선한 마음과 아무 관계가 없다. 에고를 버리려고 노력하지만 안된다. 에고를 버리려고 하는 주체가 에고이기 때문이다. 에고가 자신을 버리려고 노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깨달음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무가 되었을 때 일어난다. 거기 시간은 사라지고 영원만이 존재할 때 깨달음은 일어난다. 먼저 神의 관념을 버려라. 그러면 에고의 관념도 없다. 그러면 자아의 개념 역시 허구이다. 따라서 거기 자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존재계만이 있을 뿐이다.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허구의 관념이다. 그대가 마음을 초월하는 순간 ‘나’라는 관념이 소멸된다. 그때 존재계와의 깊은 합일의 경지가 체험된다. 중심으로서의 ‘나’, ‘아트만’,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존재계가 그곳에 있을 것이다. 춤추는 자, 노래부르는 자는 사라지지만 춤과 노래는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적인 이해를 통해서 가능하지 않다. 오직 명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禪은 명상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그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되는 것이다. 이슬 방울이 대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대양이 이슬방울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대가 ‘나’라는 것에 갇혀 있는 한,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그 생각이 그대를 불행하게 한다. 무는 텅 비고 공허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재물을 취하는 것에 대한 관심과 분노는 자신의 탐욕과 분노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은 마음의 산물이지만 선은 마음에 대한 반역이다. 그대를 가두고 있는 모든 울타리를 뛰어 넘어 무 속으로 사라지는 유일한 존재의 혁명이다. 그 무는 허무나 공허가 아니다. 그 무는 더없이 살아있는 無다. 즉 존재 그 자체이다. 명상하는 자는 나와(주체) 대상(객체)을 초월한다. 본다는 말 자체가 어떤 대상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선은 완전한 침묵 속에서 순수 존재 속으로 들어가는 일, 존재계와 하나가 되는 일이다. 거기엔 이원성도 없으며 하나됨도 없다. 즉 하나가 아니다. 둘이 아님 不二이다. 하나는 둘을 의미하고 셋...수억의 숫자가 따라온다. 혁명적인 것은 선 사상이 아니라 선 체험이다. 둘이 아님의 체험이다.
그대가 육체가 아니고 마음이 아님을 지켜보라. 그대가 오직 지켜보는 자임을 지켜보라. 그러면 모든 일이 시작될 것이다. 자기로부터의 자유. 그대의 내면 깊은 곳으로 한없이 추락하라.
선은 곧 우주에게로의 열림이다. 선은 체험보다는 끝없이 흐르는 하나의 강물이다. 왜냐하면 체험은 이미 끝나고 이미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선은 정지란 없다. 모든 명사를 동사로 바꿔야 한다. 선은 완성이나 구원의 길이 아니다. 하나의 해체작업, 하나의 사라짐이다. 얼음조각이 바다 속으로 녹아 사라진다.
신은 결코 영적인 현상이 아니다. 신은 정신과 자아를 뛰어넘어 움직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압축된 에너지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경전을 읽어선 깨달음을 이해할 수 없다. 책을 통해서 얻는 이해는 전부 잘못된 이해일 수밖에 없다. 그대가 존재하려고 할 때 긴장이 뒤따른다. 사라짐은 곧 휴식이다. 외부적인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 자신의 사라짐 뿐이다.
마음이 투영할 수 없는 유일한 한 가지는 무이다. 왜냐하면 무를 투영하기 위해서는 마음 그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은 곧 사념의 不在를 뜻한다. 마음은 사념의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다. 신의 관념 역시 하나의 사념이다. 일단 그대가 사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마음을 창조한다면, 그대는 마음을 초월하는 것이며, 그대는 무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그곳에는 그대를 껴안아줄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장소에나 드러나 있다. 단지 우리의 눈이 감겨져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단순히 나이를 먹어 늙어갈 뿐 성장하지 않는다. 성장할 때 그대는 한 사람의 부처가 된다. 하지만 종교의 신자가 되진 말라. 그것은 새장에 갇히는 일이다. 어떤 조직에도 신앙체계에도 어떤 도덕체계에도 소속되지 말라. 오직 그대 자신의 자유에게만 소속되라. 그리고 책임을 다하라. 신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거짓이다. 그 관념은 사람들이 모든 책임을 신에게 돌리도록 만든다. 그리고 사람들은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메시아를, 구세주를 믿는다.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지만, 책임이 가버림과 동시에 그대의 자유도 사라진다. 자유를 모르는 사람은 삶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삶에는 의미가 없다고 한 말은 곧 그대가 그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는 뜻이다. 삶에는 목적이 없다고 한 말은 그대가 무목無目의 삶을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이 광대한 우주에서 안내자도 없이 혼자다. 온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다. 순간순간 깊이 살 뿐이다. 모든 경전은 그대의 안내자인양 가장하고 있다. 그대는 안내자가 필요없다. 오직 깨어 있음만이 필요하다. 사실 그 사람의 의식이 깨어나기 전에 그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세상의 종교들은 끝없이 불가능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을 요구하고 있다.
풍경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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