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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74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4. 6. 27.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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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74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gf8o0jqVW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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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8.

    한 인간을 무시하는 것은 그의 내면에 있는 작은 신을 무시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신의 작은 신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좋은 교사가 되려면 좋은 제자여야 한다. 높고 당당한 나무만이 숲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관목이나 덩굴도 늘 필요하다. 천명의 위선자중 단 한명이라도 정직한 사람으로 감화 시킬수 있다면 그대의 성공은 실로 위대한 것이다. 어리석은 자에게 어리석음이 집이듯이, 현명한 자에겐 현명함이 집이다. 그대들은 자신의 길이 음울하며 동행자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의지를 갖고 계속 걸어라.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동행자를 발견하리라. 발자취가 극히 드문 곳은 험하고 고독하지만 길은 바르고 안전하다. 그대 자신도 예전엔 갓난아이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그가 더 이상 넘어지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일어나도록 도와주라. 불평은 불평하는 자에겐 재앙이다. 불평을 채찍질하는 것은 재앙을 연장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불평을 이해하면 그 불평은 충실한 하인이 된다. 하나의 희망이 실현될 때는 다른 많은 희망이 유산되고 만다. 어떠한 노동에 대해서도 보수를 구해선 안된다. 노동을 사랑하는 자에겐 노동 자체가 충분한 보수다. 창조의 언어와 완전한 균형이 성스러운 이해를 통해 도달할 때 그대들은 극복자가 되고 그대들의 손이 신의 손과 협력하여 일한다. 선과 악의 나무는 하나다. 그 열매도 하나다. 악의 맛을 알지 못하고서는 선의 맛도 알 수 없다. 그대들을 요람 속에서 달래주는 손이 바로 그대들의 무덤을 파는 손 그것이다.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남에게 해서는 안된다. 그대들 모두가 배를 축조하는 자이다. 그대들 모두가 선원이다. 자기 자신이라는 무한한 大海를 항해하면서, 그곳에서 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와 소리없는 조화를 찾아내는 일은 영원永遠이 그대들에게 부과한 의무이다.

    무생물계(플레로마)는 생각이나 정보가 없는 반면, 그밖의 많은 규칙성(관성, 원인과 결과, 연속과 불연속)을 포함하고 있음을-오히려 규칙성의 모체임을-이해해야 한다. 정신작용이 일어나려면 물질의 일정한 배열이 필요하다. 거기서 플레로마는 물리적 현상만이 아니라 정보에 영향을 받는 조직에 의해 그 성격이 규정된다.

    크레아투라(물질적이 아닌 어떤 유기적 의사소통의 성격을 가진 존재, 즉 언어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와 플레로마는 어떤 방법으로도 분리되어 있거나 분리할 수 없다. 모든 크레아투라는 플레로마 안과 플레로마를 통해서 존재한다.

    정신은 상호작용하는 부분 또는 부품들의 종합이다. 정신 부분간의 상호작용은 차이에 의해 일어난다. 정신작용에는 그에 따르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정신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조직적인 특성을 지닌다.

    생물이 출현하기 이전에 우주에는 메시지나 유가 없다.

    기계는 특정제품을 생산하도록 조절되어 있는 반면, 생물세포는 1차적으로 자기갱신에 연관이 있다. 상향(동화작용, 또는 합성대사적) 및 하향(이화작용, 또는 분해대사적) 과정들이 동시에 진행된다. 생물계에는 고정되고 경직된 것은 거의 없다. 아우토포이에시스(끊임없이 자기갱신을 하고 그 구조의 통합성이 유지되는 방향으로 이 과정을 규제하는 생물체계의 특성)적인, 즉 자기 갱신적인 구조는 많은 과정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다.

    적어도 생물계에 있어서는 진화란 기본적으로 학습과정이다. 우리들은 진화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들이 바로 진화다.

    미시 및 거시 우주는 통일되어 있거나 통일되고 있는 중이며, 동일한 국면의 양면을 이룬다. 평형이란 정체 및 죽음과 같은 말이다. 자기조직 과정들을 유지하는 고도의 비평형성은 다시 환경과 물질 및 에너지의 계속적인 교환, 바꾸어 말하면 대사代謝에 의해 유지된다. 그와같이 지구적인 차원에서는 안정되어 있으나 절대로 정지하지 않는 구조의 역학을 아우토포이에시스(자기생산 또는 자기갱신 autopoiesis)라 불러왔다.

    자기조직 체계의 영역에서는 정보 역시 스스로 조직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새로운 지식이 일어난다.

    정신이란 물질의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체계, 그리고 체계와 환경과의 관계를 성격짓는 역학 과정들의 자기조직의 성질을 가리킨다. 정신은 물질의 시공구조를 통합한다.

    스스로 창조하는 세계에서는 하느님의 관념이 바깥에 머물러 있지 않고, 모든 수준과 단계 그리고 모든 차원에서의 자기조직 역학의 전일성 안에 깊숙이 묻혀있다. 따라서 신은 창조자가 아니라 우주의 정신이다.

    시간은 나를 휩쓸어 가는 강

    그러나 나 역시 그 강이어라

    그것은 나를 파괴하는 호랑이

    그러나 나 또한 그 호랑이어라

    그것은 나를 삼켜버리는 불

    그러나 나도 그 불이어라

    미지근한 물은 스스로 뜨거운 물과 찬 물로 나누어지는 법이 없다. 요동을 통한 질서, 즉 비평형성은 자연발생적 구조화 현상을 기술해 주는 비가역 과정들의 비선형적 열역학의 기초가 되는 질서, 또는 조직의 근원이 될 수 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세계 안에 있다.

    물질과 정신은 분리할 수 없다. 어느 체계가 자기조직 과정에 그 실체의 경계를 넘어갈 때, 그것은 창조적이 된다. 자기조직의 패러다임 안에서는 진화가 모든 수준에서 일어나는 자기 초월의 결과다.

    인간의 의식에는 초개인적 차원들이 있다.

    자연이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둔 것을 예술이 완성한다. 어떤 의미도 전달하지 않아야 한다. 의미는 오로지 예술작품과 독자 또는 명상가의 상호작용에서 우러나올 뿐이다. 따라서 사물이 스스로 말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면 안된다. 예술가는 기껏해야 촉매의 역할을 하는데 그친다.

    조각의 생명은 그 돌의 형태가 아니라 작품과 그 작품을 묵상하는 인간 사이에 펼쳐지는 과정들에 있다.

    창조성이란 어떤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다. 예술은 우주의식에의 동참이다. 즉 우리들의 잠재력에 동참한다는 의미이다.

    인류는 신의 구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제한다. 만일 우주에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주 밖의 절대자가 아니라 우주 안에서 작용하는 진화의 원리이다.

    정신은 이다. 그것은 이 아닌 것이다. 정신이란 창조하는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라고 하는 것은 물이 아닌 것이다. 무엇인가의 예인 이상 그것은 역시 정신이 만들어 낸 것이다.

    성장도 분화도 정보전달이라는 통제 아래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동식물의 형태는 메시지의 변형에 불과하다. 언어도 그 자체가 정보전달의 한 형태이다. 생물체의 구조는 모두 메시지를 만드는 물질적 재료의 변형이다.

    과학은 탐색할 뿐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

    지도는 땅 그 자체가 아니며 사물의 이름은 그 사물 자체가 아니다. 물 자체와 보고(사고, 지각) 사이에 일종의 변형화, 말하자면 기호화 coding가 일어난다. 2개의 반구(, 우뇌)가 각각 서로 다르게 작용하는 이상 인간의 행동에 이치에 벗어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객관적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경험은 주관적이다. 지각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뇌가 만들어 낸 이미지이다. 발을 밟혔을 때 내가 경험하는 것은 내 발이 밟힌 사실이 아니라 밟히고 나서 얼마 후에 뇌에 전달된 신경보고와 함께 재구성된, 그에게 발을 밟힌 것에 대한 나의 이미지인 것이다. 외계의 경험은 항상 어떤 특정의 감각기관과 신경통로에 의해 전달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물에 대한 나의 경험은 주관적인 것으로서 객관적일 수 없으며 곧 사물은 나의 창조물이다. 통증 조차도 확실히 창조된 이미지이다. 우리들이 지각의 과정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식되는 것은 지각의 산물일 뿐이다. 내가 의식해서 보고 있는 이미지(이미지 형성과정)는 무의식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무의식적이다.) 자신들이 보고 있는 이미지는 뇌나 정신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다.

    우리가 눈을 통해서 외계를 바라 볼 때 우리들은 5개의 주요한 단서를 사용하여 우리가 만들어 내는 상에 원근감을 만들어 낸다.

    1.크기;망막에 비친 물리적인 상의 크기이다. 물론 그 상을 볼 수는 없으므로 크기라고 하기보다 시각, 즉 물체의 양끝과 안구의 중심이 만드는 각도라는 편이 더 정확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각도도 보이지 않는다. 시신경에 전달되는 것은 시각의 변화로 필시 이 변화의 정도가 눈에서 물체까지의 거리를 만드는 단서가 될 것이다.

    2.밝기의 대조

    3.크기와 밝기의 대조

    4.양쪽 눈에 의한 시차

    5.머리의 이동에 의한 시차

    인식론은 거의 대부분이 무의식적인 것이다. 우리의 지각과정을 무의식적인 것이라고 할 때 몇가지 흥미로운 부작용이 생긴다. 예를들면 꿈, 환각, 직관적인 상상 등과 같이 이미지 형성이 감각기관으로부터의 물리적인 입력에 의해서 규제없이 진행되는 경우 그 상이 표상하고 있는 외적 실재성을 의심하기가 어려워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나 반대로 이미지 형성과정에 대해 그다지 알지 못하는 편이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무지한 덕분에 감각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자유롭게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감각기관이 전달한 것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풍경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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