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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71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4. 6. 6.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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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71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zQQyAZ_AA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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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5.

    그냥 바라보기만 하라. 그대가 사랑을 투영할 때 그가 사랑스럽게 보이며 그대가 증오를 투영할 때 그가 밉게 보인다. 그는 사랑스러운 것도 미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실재의 그를 본적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오직 마음없이 사물을 바라보라. 해석하지 말고 그저 보라.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 그대가 보는 것은 무엇이나 그대의 투영일 뿐이다. 따라서 거기에 마음만큼이나 많은 세상이 있다. 언어를 가져오지 말라. 추억 속에서 과거, 미래, 상상 속에서 그대는 꿈을 꾼다. 지금 여기에 있으라. 깨어 있으라. 오직 그때에만 거기에 꿈이 없다. 현재에는 꿈이 없다. 마음이 없다. 현재에는 그대가 존재한다. 그리고 진리가 거기에 있다. 모든 것이 하나의 본질 속에 속해 있음을 깨우쳐라. 나무들은 그 형상이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무 속의 무형은 하나이다. 바위는 나무와 함께 하나이다. 무심으로는 무형을 볼 수 있다. 그대가 형상이 없는 무형을 볼 때 전 세계가 마치 큰 바다와 같고 모든 형상들이 바로 파도와 같다. 사물들이 여럿으로 보이는 것은 그대의 내면이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깨달은 이도 그대를 변형시킬 수 없다. 그대 안에 있는 것을 찾으라. 그대의 내면이 명료할 때 모든 것이 투명하다. 진리는 그대 주위의 어디에나 있다. 오직 그대가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진리는 오직 전체이다. 양극단을 다 보아야 한다. 마음이 사랑을 알 때 마음은 증오를 보지 못한다. 삶 속에 죽음이 숨어 있음을 볼 수 있다면, 즉 양극성을 동시에 함께 볼 때 그대의 마음도 함께 사라진다. 그것은 마음이 결코 전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코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양극단을 볼 때 비논리, 모순이 발생한다. 마음은 논리적인 틀 안에서만 살 수 있다. 마음에게는 그 반대편이 부정된다. 따라서 만약 그대가 마음 속에 비논리적인 것이 들어오도록 허락한다면 마음이 완전히 부서져 나간다. 그리하여 마음이 사라지면 삶이 모순되지 않는다. 그때 삶은 하나의 신비가 된다. 숲이 거칠어 보이는 것은 그대가 숲을 정원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대가 삶을 깨우치면, 그토록 삶에는 항상 정반대의 것이 연루되어 있음을 이해할 것이다. 그대는 전 세계를 여행해도 그대의 내면은 결코 움직이지 않고 또한 움직일 수 없다. 모든 운동은 움직일 수 없는 중심에 의존한다. 그대는 온갖 종류의 희노애락의 상황에 연루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인가 그대의 내면은 그것들과 연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모든 삶의 관련성은 바로 비관련적인 요소로 인하여 가능하다. 하나의 극단은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양자를 동시에 바라보면 즉시 믿음이 사라진다. 그대는 새로운 지혜로, 지식으로 실재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실재에 대한 이 새로운 시야가 전체이다. 이 전체와 함께 그대는 텅 비어 있다. 그대는 침묵을 지켜야만 한다.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모순되고 부정하여야 하기에, 즉 모든 말이 또 다른 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마음없이 사물을 바라보면 전체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존재의 본성은 비이원적인 것, 둘이 아닌 것이다. 즉 하나가 아니다. 하나라고 할 때 그것 역시 이원성의 일부이다. 하나의 의미를 위해서는 둘이 필요하다. 정의를 내리려면 반대 편에 의존하여야만 한다. 만약 둘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그것이 하나라고 말하는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대가 진리를 깨우치면 그것이 하나도 둘도 아닌 공이다. 즉 둘이 사라질 때 하나도 사라진다. 오직 무만 남는다. 모든 것이 공이 될 때 이 무는 깨달음의 궁극의 봉우리이다. 그대가 요구하는 것에는 무엇이나 정반대가 주어질 것이다. 즉 도달이 좌절이 될 것이다. 욕망이 충족될 즈음 그 정반대가 그대의 수중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다. 즉 마음없이 보는 방법, 선택없이 보는 방법에 있다. 만약 그대가 모든 것이 비영속적인 세상에서 영원한 것을 기대한다면, 그대는 걱정거리를 만들어 낼 것이다. 아무 불평없이 불가피해서가 아니라 이해로서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진여가 된다. 네가 웃을 때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는다. 그러나 네가 울 때는 너 혼자 운다. 만약 그대가 침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총체가 아닌 하나의 구분이 존재하고 있다. 침묵을 느끼는 자는 아직 침묵이 아니다. 그대가 침묵이라면 그대는 이미 침묵조차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침묵은 바로 소란의 반대이기 때문이다. 소란이 없을 때 거기에 어떻게 침묵이 있을 수 있는가? 소란이 사라질 때 그 반대 또한 사라진다. 그때 그대는 내가 침묵이다.’라고 말 할 수 조차 없다. ‘나는 알고 있다.’하고 말하는 자는 모르는 자이다. ‘라고 하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소란자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단지 그 소란자로부터 나오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라고 하는 것이 가장 시끄러운 현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모든 종교의 교파들은 반쪽의 진리 위에 세워졌다. 왜냐하면 모든 사교나 종교의 종파는 반드시 언어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자를 볼 수가 없다. 우리는 오직 결과들만을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결과를 볼 수 있지만 원인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전자가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추론한다. 만약 전자가 없다면 거기에 어떻게 이러한 결과들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신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이 신의 창조물을 볼 수 있다. 신은 원인이며 이 우주는 결과이다. 우리는 신을 볼 수 없지만, 신의 창조물은 본다. 신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이 창조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언어란 시간이 존재할 때 가능하다. 언어는 시간과 같은 형태이다. 언어에 과거, 현재, 미래 시제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삶은 그 너머에 있다. 모든 언어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에 의존한다. 언어는 마음의 산물이며 시간 역시 마음의 산물이다. 그대가 언어를 떨쳐 버릴 때 시간도 사라진다. 그대가 생각을 버릴 때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그대는 시간을 초월하여 간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없을 때 영원이 있다. 마음과 언어와 시간을 떨쳐 버려라.

    성행위는 남녀 사이에 나누는 대화가 아니다. 그것은 남자가 여자를 통해, 여자가 남자를 통해 그 본질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그대는 전체와 하나가 된다. 남자는 여자를 통해 여자는 남자를 통해 채워진다. 만약 그대가 오르가즘의 순간에 의식적으로 깨어 있을 수 있다면 시간과 마음의 사라짐을 볼 것이다.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연은 이미 모든 것을 만들어 놓았다. 그대는 씨앗이다. 즉 신의 씨앗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본성을 허락한다면 모든 청사진은 그대 안에 있다. 씨앗의 성장은 사적인 지식이 아니라 우주적인 의식에 달려있다. 씨앗은 자라서 우주가 되는 곳까지 이르러야 한다. 이를 위해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수행법도, 교리도, 종교도 필요가 없다. 즉 본성에 귀를 기울여라. 그대가 할 일은 단지 그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섹스는 신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다.

    행복하게 되기 위해 해야할 일은 없다. 행복을 생산할 수도 명령할 수도 강요할 수도 없다. 행복은 그저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은 섬이 아니다. 거대한 대륙의 일부분이다. 만약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지도록 도와야한다. 그것이 우리가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이다. 행복한 사람은 홀로있기를 원하고 행복한 사람만이 그 행복을 나눌 수 있다. 행복하지 않다면 어떻게 그것을 나눌 수 있겠는가. 무언가를 나누려면 먼저 그것을 가져야만 한다.

    천천히 마음에 방해받지 말고 실체와 접촉하는 예술을 배워라. 때때로 해가 기울 때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그저 거기 앉아서 해를 바라보라. 평가하지 말라.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말하지도 말고 그저 바라보라. 그대가 무언가를 말하는 순간 마음이 들어온다. 마음은 언어를 주장한다. 그대는 그 아름다움으로 그저 넘쳐흐를 수는 없는가? 언어를 끌어들일 이유가 무엇인가? 해는 그대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대의 모든 지식을 한쪽으로 치워두고 그저 바라보라. 그러면 갑자기 교감이 생길 것이다. 그대는 의식의 확장을 느낄 것이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주시하라. 그저 지켜보라. 걸을 때는 걷는 것을 지켜보고 먹을 때는 먹는 것을 지켜보라. 잠을 자면서도 주시하라. 몸은 자고 있지만 주시자는 여전히 깨어 있으면서 몸이 잠드는 것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것이 궁극적인 주시이다. 그 반대의 경우는 몸은 깨어 있는데 의식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몸은 휴식이 필요하다. 중력의 법칙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은 깨어있는 것이 그 본성이다. 인간은 땅과 하늘, 몸과 영혼의 만남이다.

    이기적인 사람이 자동적으로, 자발적으로 헌신적인 사람이 된다. 사랑은 가장 이기적인 것이다.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만이 사랑이다. 사람은 오직 자기가 아는 것만을 알아본다. 자신이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깊은 침착함과 고요가 내면에 자리 잡는다. 긴장을 풀고 모든 것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있다. 욕구가 아니라 나눔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 사랑은 넘쳐 흐르는 기쁨을 나누는 일이다. 그것은 저 너머로부터 온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장애물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정하는 과정이다. 우물을 파는 것과 같다. 그대는 끊임없이 땅 속의 많은 층을, 자갈과 바위 따위를 치워야 한다. 그러면 갑자기 물이 솟을 것이다. 물은 언제나 저 아래에서 흐르고 있었다. 사랑도 그러하다. 사랑은 그대 존재의 밑바닥을 흐르고 있다. 그것은 이미 흘러 넘치고 있으나 치워버려야 할 많은 바위와 자갈에 의해 막혀 있다. 사랑을 배워야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인간은 자유로울 뿐 아니라 자유 그 자체이다. 인간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다리이다. 신과 동물,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가지 실체를 이어주는 다리이다. 각성 속에서 자유 속에서 성장하라.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은 모두 자신의 선택이다. 자신을 창조하라.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을 져라.

     

    경주, 포항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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