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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69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4. 5. 26. 01:16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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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철학 169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0kJJk776yXY
573.
모든 부처님의 법신과 중생의 몸이 평등하여 둘이 아님을 안다. 인연에 의해 생멸 변화하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오래 머무는 것은 하나도 없고 잠깐 사이에 변하여 무너지는 것들이고 마음 위로 지나가는 모든 것들도 순간순간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임을 관찰(위빠사나)해야 한다. 그것들 모두가 잠시도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그것들은 괴로움이고 실체가 없는 것(無我)임을 관찰해야 한다.
止(사마타)와 觀(위빠사나) 같이 수행해야 한다.-릴랙스, 깊은 호흡(복식), 그리고 몸의 원기를 기해단전, 허리, 다리족심, 발바닥에 가득 채워라(관하는 것), 상반신은 비울 것
눈의 힘을 기르려면 항상 눈을 감고 청력을 기르려면 늘 필요하지 않은 것은 듣기를 피하고, 심기를 기르려면 항상 침묵하여야 한다.
우리 마음 안에 극락정토가 있고 우리는 정토에 앉아있다.
원래 천지가 同根이므로 세상에 있는 물, 불은 몸속에 있는 물, 불과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약간의 노여움과 성을 내도 뺨이 벌겋게 되며, 신체를 뜨겁게 하면 자칫 감정의 불꽃을 위로 치솟게 하기 쉽다.
길흉은 새끼를 꼬듯 꼴 수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의 몸 위에서 나쁜 일만 계속 전개되지는 않는다.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에 가득 차 있는 영적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즉 우주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병을 치료하는 힘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
그대의 마음이 그대의 미래를 만든다. 관념이 마음의 종자와 인자가 되어, 심층의식의 창조적 에너지와 만나 그대의 모든 것을 만든다. 자기자신이 스스로를 창조해 나간다는 뜻이다. 그대는 그대의 내부에도 있다. 즉 인간은 자기의 心力을 관념에 따라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마음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마음이 있기 때문에 고통이 있다. 고통은 마음속에 있다. 그 마음을 버려라. 무심하게 되어 대상으로부터 마음을 떠나게 하라. 병, 그 자체와 병으로 괴로워 하는 생각을 잘라 없애라.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장님과 같이 되라. 있는 그대로의 마음으로 되라.
인간존재와 다른, 인간과 동떨어진, 인간을 넘어선 존재로 신을 가정했기 때문에 역사는 신과 그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협정, 계약 혹은 서약에서 생긴 유희로 간주되었다. 즉 서구정신에서 볼 때 역사는 신과 인간 사이의 협정의 전개이며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신을 결합 시키려는 움직임이다. 절대는 모든 사물 및 사건과 동떨어진 무엇이 아니다. 절대는 타자가 아니다. 유한한 것과 동떨어진 거대한 무엇이 아니라 만물의 실재, 본질 혹은 조건 바탕이다. 그러므로 자기자신이 전체임을 발견하라. 이것은 마치 파도가 스스로를 알게되어 바다 전체와 하나임을, 모든 파도가 물로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파도와도 하나임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존재의 기본 본성은 궁극적인 전체다. 진정한 자아나 불성은 영원하거나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초시공간적이고 초월적이다. 근원과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 자신이 우주임을 보여준다. 자신의 가장 깊은 본성이 모든 것과 하나임(자기와 타인이 하나이며 존재와 비존재가 하나다.)을 재발견할 때 시간, 불안, 근심,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다. 전체는 에고적 개체성의 정반대가 아니라 단지 그 바탕일 뿐이며, 그 바탕의 발견은 에고의 모습을 지워버리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스스로를 자연, 우주, 신성의 남은 부분과 다시 연결한다. 이는 영원한 상태가 아니라 초시간적인 상태다. 이런 깨달음이 오면 시간적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삶을 얻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선행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대 현재의 의식에 떠오르는 대상들에 주의를 기울여라. 5분전에, 5시간전에, 5년전, 5세기전, 5천년전 모든 대상들은 바뀌었지만 바뀌지않은 유일한 것이 있다. 바로 주시자인 ‘나’이다. ‘나’는 영원히 현존하는 나이다. 그 나가 현존하고 있으며 빅뱅 이전에도 있었다. 빛나고 열려있고 비어있고 깨끗하고 광대하고 투명한 ‘나’가 늘 현존하고 있다. 대상은 모두 바뀌었지만 형상이 없는 나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이 명백하게 현존하는 나가 5시간 전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있다.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현존하는 ‘나’라는 느낌이 그것이다. 언제나 현존하는 것은 ‘나’이다. 모든 사람이 이 동일한 ‘나’를 느낀다. 이 나는 몸이 아니다. 생각도 대상도 환경도 아니다. 이 나는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나’는 영원히 현존하는 ‘보는 자’이다. 일어나는 모든 것을 주시하는 비어있는 목격자이다. 늘 지켜보고 있는 이 ‘나’만이 유일하게 늘 현존한다. 이 나는 우주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다. 이 ‘나’가 스스로 창조한 대상들 속에 자신을 숨기고 그것을 찾는 게임을 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시간을 넘어선 순수한 현존, 영원을 거니는 것이 곧 그것이다. 스스로 있는 나가 곧 1인칭 영이며, 궁극적인 존재, 장엄한 존재, 모든 것을 창조하고 있는 온 우주의 빛나는 참자아이다. 모든 사람이 누구나 그 ‘나’를 느낀다. 그 나가 나와 너와 그들 안에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 우주의 수많은 존재들의 ‘나’를 모두 합해도 그 수는 1일 뿐이다. 항상 지금 그대가 느끼고 있는 바로 그 나임에 머물러라. 그것은 그대 안에서 그리고 그대로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태어나지 않은 영이다. 상황에 따라 그대의 모습을 다양하게 연출하라. 그러나 늘 모든 것의 근거에 머물도록 하라. 완전히 명백한 ‘나임’ 상태에 머물면서 그 ‘나’가 창조한 세상에서 그대의 몫을 살아라. 이제 새로운 아침이고, 새 날이고, 새 사람이다. 새로운 인간은 통합적이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중생은 본래 부처다. 비유하자면 물과 얼음 같은 것이다. 범부와 도인은 모습과 형체는 같아도 마음의 경지는 다르다. 우리들을 떠나서는 따로 진여의 세계란 없다. 비유하자면 물가에서 목마르다고 부르짓는 것과 같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아 다녀도 봄을 보지 못했네
돌아오는 길에 매화나무 아래를 자나다가 바라보니
봄은 이미 가지위에 충분히 와 있었네
몸(자기중심적)-마음(민족주의자)-영(세계주의자)
바깥세상에도 내면세계에서도 집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대는 집을 지을 때마다 그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선택은 마음의 기둥이다. 선택하면 그대는 덫에 걸린다. 왜냐하면 그대가 선택할 때에는 언제나 무엇인가에 대립되는 다른 무엇인가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무엇인가를 선택한다면 그대는 어김없이 무엇인가와 대립하게 된다. 그대가 선택할 때 그대는 분열한다. 마음은 건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전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언제나 분열한다. 분열이 마음의 토대다. 모든 마음은 신성을 더럽히는 것이다. 신성한 마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성한 사람은 마음없이 산다. 왜냐하면 그는 분열없이 살기 때문이다. 무선택이 되어라. 차별하지 말라. 그대가 차별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선택이 들어온다. 그대는 이미 산산조각 분열되었다. 그대는 병들게 되었다. 그대는 전체가 아니다. 심판하지 말라. 심판은 전체가 하도록 내버려두라. 신과 악마는 둘이 아니다. 같은 에너지의 양면이다. 선물이란 그대의 에너지를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에게 더욱 더 많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대가 갈구할 때마다 긴장한다. 그대가 갈구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거기에 긴장이 없다. 아무런 마음도 지니지 말고 無心을 지향하라. 선택하지 말고 침묵하라. 왜냐하면 그대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깊은 욕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속에 감추어진 것은 무엇이나 그대가 투영(욕망의 씨앗, 생각, 사고, 집착)할 것이다. 마음을 극복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마음을 깨우치기만 하면 된다. 즉 마음의 실체를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즉 진리를 통감할 때 마음의 병이 떨어져 나간다. 행동은 에고에게 먹이를 준다. 그대가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을 때 에고에게 먹이를 줄 수 없다. 그리고 에고가 거기 없을 때 광명이 임한다. 고의적으로 의식적으로 하는 행위는 장애가 된다. 행위를 조작하지 말고 저절로 일어나게 하라. 왜냐하면 그대가 행위를 조작할 때 그대 자신이 분열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조종하는 자와 조종 당하는 자 이 둘로 분열한다. 한번 그대가 둘로 분열하면 즉시로 천국과 지옥이 창조된다. 그때 거기에 그대와 진리 사이에 거리가 막막하게 벌어진다. 모든 사람들은 지배하려고 애쓰고 있다. 바로 이는 에고의 본성이다. 에고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거기엔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그 속에서 빠져 나와라. 다른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없다. 변화는 그들의 문제이다. 그대는 외부와 내면, 이 둘 다 필요한 것이다. 이 세상이 신을 필요하는 것 만큼이나, 신 또한 이 세상을 필요로 한다. 이 세상은 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신 또한 이 세상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원둘레(외면)는 그 중심(내면)의 확장에 불과하고 중심은 원둘레의 정수로써 압축되고 집약된 것에 불과하다. 無爲가 되려고 애쓰지 말라. 왜냐하면 노력은 행위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행동하라. 양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中道에 머물러라. 보고 만지고 느끼는 것은 직접적이다. 생각하는 것은 간접적이다. 그래서 진실을 생각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산속에서 고행하는 자들은 행위를 포기한다. 그러나 행위를 통하여 진실과 접촉할 수 있다. 보고, 춤추고, 운동하고 그대가 무엇을 하더라도 그대는 진실과의 접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산속 사람들의 모든 에너지는 행위로 움직이지 않고 사고로 움직인다. 그들은 언어속에 사는 것이지 실재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사랑이 사라지고 오직 ‘사랑’이라는 언어만이 떠돌 뿐이다. 거기에 신이 사라진다. 왜냐하면 신은 ‘신’이라는 낱말 속이 아닌 시장바닥에 들판에 이 세상속에 있기 때문이다.
풍경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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