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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67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4. 5. 9. 22:33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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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철학 167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tg2hxhaUHYs
571.
하나님도 부처도 사람의 마음이 만든 것이고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극락은 서쪽에 있지 않고 현실 속에 있다. 중생의 마음을 떠나서 부처의 마음을 구할 수 없다.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것을 채우려 하는 것은 어리석다.
신비가가 ‘그가 알고 있는 것’, 혹은 그의 지식을 확인할만한 어떤 경험적 검사도 스스로 고안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의 신비적 통찰 상태가 진정한 인지적 상태가 아님을 보여준다.
1.육신의 눈-시공간, 감각적 대상, 외적, 신의 자취, 물질세계, 조대 gross, 경험적, 감각적, 몸
2.이성의 눈-철학, 논리, 마음, 수학, 내적, 신의 형상, 정신세계, subtle 정묘, 상징적, 지적영역(마음)
3.관조의 눈-초월, 진리, 해방, 우월, 전체성, 신성한 궁극자, 시원 causal, 영적, 초월영역(영성)
하위의식은 상위세계의 삶을 체험할 수도 느낄수도 포함될 수도 설명할 수도 유도할 수도 없다.
不二(비이원성)-실재는 하나가 아니고 다수도 아니고, 영원한 것이거나 역동적인 것도 아니며, 분리되거나 통일된 것도 아니며, 다원적인 것도 아니고 전일적인 것도 아니다. 어떤 개념적인 형태보다도 전적으로 그 위에 그에 앞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한정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역설적 진술을 포함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실재가 하나라는 것은 진실이지만 다수라는 말도 똑같이 진실이다. 그것은 초월적이지만 또한 내재적이며, 이 세계 이전의 것이지만 이 세계와 다른 것도 아니다. 즉 세계는 환상이다. 브라흐만이 유일한 실재이다. 브라흐만이 곧 세계이다. 절대가 세계속에 내재하지만 완전히 세계를 초월해 있다. 동굴에 나타난 그림자가 있고 실재의 절대 빛은 동굴 밖에 있다. 궁극적으로 이들은 둘이 아니다. 브라흐만이 부분들의 총화가 아니다. 즉 전체가 브라흐만 혹은 절대 다 같지 않다. 브라흐만은 전체세계로서 세계 속에 존재하지만 전체세계 그 자체가 곧 브라흐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론적으로 전체세계를 파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브라흐만, 본성 또는 도를 파괴할 수는 없다.
만일 붓다가 모든 곳에 편재하지 않는다면 붓다가 아니다. 그러나 오직 편재해 있기만한다면 당신은 지금 바로 깨달은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신이다.(신의 편재성) 그러나 어떤 것은 다른 것들보다 더 나은 신이다.(신의 위계) 진화는 위계적이다. 진화의 단계 수준은 점증하는 구조적 조직, 점증하는 복잡성과 통합과 통일성, 점증하는 각성과 의식을 나타낸다. 신은 각 단계-수준의 바로 그 질료이자 실질적인 정수이다. 신은 최상위 수준이 아니고 수준 자체와 다른 것이 아니라 모든 수준들의 실재이다. 상위는 하위를 포함하지만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이 위계를 만든다. 모든 것은 상호작용을 한다. 그러나 그 요소들은 똑같은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서로 동일한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하지는 않는다. 절대의 모든 것은 모든 지점에 똑같이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또한 어떤 지점은 다른 지점보다 절대에 더 가깝다. 위계는 현시된 우주를 다루는 것이다. 현시된 우주에는 완전한 진실로 이끌어 가는 점증하는 실재(혹은 감소하는 환상)의 수준이 있다. 그리고 그 수준들은 일차원적으로 동일하게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절대로서의 절대는 존재의 최상위 또는 궁극적 수준에서만(그런 영역에까지 진화한 영혼에게만) 자신의 전모를 드러낸다. 둘이 아니다. 하나도 아니다. 신은 여러 사물 중 하나의 것 또는 여러 사물들의 총화, 혹은 여러 것들의 역동적 상호작용이 아니다. 신은 각각의 사물이나 사상 또는 과정의 조건이자, 본질, 그러함 또는 실재이다. 신은 그것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런 것들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신은 세계와 더불어 동일하지만, 세계 그것과 동일하지는 않다.
역설이란 단지 비이원성을 마음 수준에서 보는 방식일 뿐이다.
문제가 되지 않는 집단
1.전이성적이지 않고 초이성적일 것
2.정당성의 근거는 전통 속에 닻을 내리고 있을 것
3.발달 국면에 특수한 권위를 갖고 있을 것
4.완벽한 스승에 의해 이끌리지 않을 것
5.세상을 구원하려고 나서지 않을 것
브라흐만은 두 번째 없는 하나다. 경계와 한계를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것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브라흐만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브라흐만)은 자신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의 범주를 나타내는 말로 나타낼 수 없다. 브라흐만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은 그것에 대립되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절대는 대립되는 것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절대는 비이원적, 불이, 대립없음이다. 둘 아님은 단지 하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일한 하나는 복수적 다수와 대립하고 있지만 불이는 둘 다를 포함하고 있다. 즉 대립없는 하나이다. 당신의 눈이 붉은 색의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당신의 눈 자체가 ‘붉음 없음’이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가 모든 공간을 품어 안을 수 있는 것 역시 존재 자체는 공간 없음 즉 무공간이기 때문이다. 즉 많은 것들 중 하나가 아니라 두 번째 없는 하나이다. 이와같은 방식으로 존재 자체는 무공간이기 때문에 무한의 전체성은 모든 공간 지점에 현존할 수 있으며, 그것은 공간과 다투지 않는데 그렇기에 공간을 전적으로 끌어안을만큼 자유롭다. 이것은 마치 아무런 형태나 모양이 없는 물이 모든 형태의 그릇에 담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무한은 모든 공간 지점에 자신의 온전성으로 현존하기 때문에 무한성 모두는 바로 이곳에 온전하게 현존하고 있다. 실제로 무한의 눈에는 저곳이라는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곳에 가면 그곳이 이곳이 되기 때문이다.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절대 그 자체가 무시간일 경우에만 모든 시점에 자신의 온전성을 갖고 현존할 수 있다. 무시간인 것은 영원한 것이다. 영원은 시간의 무한한 길이가 아니라 무시간성이기 때문이다. 영원성 모두는 이미 바로 지금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의 눈에게는 과거든 미래든 그때란 존재하지 않는다. 차원이나 외연이 없는 점, 날짜와 기간이 없는 순간 그것이 절대다. 절대는 획득될 수 없는 것이며, 자신의 온전성 속에서 모든 곳과 모든 때에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신을 모든 곳에서 보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 아무 곳에서도 신을 보지 못한다. 브라흐만은 전존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현존하는 자신의 본성의 일부이다. 수행으로 하나임을 얻을 수 있는 척하지 말라. 그대가 이런 획득 불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다면 참으로 전혀 아무것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명백히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는 이미 지혜로운 마음 그 자체일 것이다. 그것은 어떤 추구도 끝내 실패로 돌아갈 것이기에 그대로 하여금 불성 추구를 그만두도록 가르치기 위함이다. 그대가 곧 진아이다. 그대는 이미 그것이다. 따라서 절대, 본심, 진정한 자아는 획득될 수 없는 것이다. 절대와의 합일을 얻는다는 것은 두 개를 하나로 결합시킴을 의미하는데, 존재하는 것은 오직 두 번째 없는 하나이기 때문에 영혼과 신을 결합시키려는 시도는 단지 두 개가 분리되어 있다는 착각만을 영속시킬 뿐이다. 진아는 이미 현존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미 그것이다. 의식의 궁극적 상태(획득될 수 없기에)는 무시간이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없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 바꿔말하면 당신이 들어갈 수 있는 의식상태는 의식의 궁극적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노력에도 궁극적 상태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는 그것은 오직 의식의 궁극적 상태는 이미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점에서는 당신의 일상적인 의식상태와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평상심이 도다. 따라서 당신은 바로 시작 초기부터 언제나 그것 안에 있어 왔기 때문에 궁극적 상태(브라흐만)에 들어갈 수 없다. 진실로 우리가 절대를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처럼 절대에 대한 지식 역시 만들어 낼 수 없다. 그 둘은 이미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이 어떤 행위의 결과물이거나 보충물 또는 시간적 열매나 마음과 행위에 달려 있거나 변화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영원성이다. 그래서 의식의 궁극적 상태는 당신의 현재의 의식상태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만들어 내거나 효과를 미치거나 원인이 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의 궁극적 상태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의식상태와 다른 것이라고 상상할 경우, 우리는 어리석게도 기적적인 상위 의식의 상태로 선도해 줄 방법을 추구하게 된다. 그것은 비영원성이 되고 어떤 단계의 결과물이 된다.
열반과 윤회, 깨달음과 무지, 브라흐만과 환영은 어떤 차이도 없다. 사람들이 환영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환영보다 더 위험한 환영은 없다. 따라서 모든 추구는 궁극적으로 적절하지 않다. 깨달음은 몸이나 마음으로 구할 수 없는 것이니 일체 중생이 그대로 깨달음의 모양이다. 그대가 일체중생이 이미 깨달음과 하나임을 제대로 알면 깨달음을 얻어야 할 뭔가에 대한 생각을 멈출 것이다. 그대가 보리심을 얻었다는 말을 들었을지 모르지만, 이는 부처님을 몰아내는 사념일 뿐이다. 당신이 지금 부처를 추구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당신이 부처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깨달아야만 한다.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사물을 이원적으로 보는데 너무나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체이면서 물리적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풍경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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