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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72 (교재 공개)패러다임/철학 2024. 6. 14. 00:57반응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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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철학 172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D1t3XbuPbQY
576.
홀로있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시장이나 군중 속에서도 산 속에서도 산을 주시한다. 눈을 뜨고 그대는 존재를 주시한다. 눈을 감으면 그대는 자신을 주시한다. 그대는 오직 주시자일 뿐이다. 주시자가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주시를 유일한 수행으로 삼으라. 이 수행을 통해 자신이 홀로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외로움과는 차이가 다르다.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내딛는 첫 발자국은 홀로 존재하는 것 속으로 향해야 한다. 홀로 있음은 그대의 사원이다. 그 곳에 신이 살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사원이다. 자신의 의미를 다른 사람에게서 찾지 말고 자기 내면에서 찾으라. 혼자이면서 동시에 전부이다. 신의 사원은 그대의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들은 모두 그곳으로 홀로 가야만 한다. 스스로 영원한 존재이며 전체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는 한 그대는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은 그대가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존재의 영원성을 깨닫게 되면, 죽음은 존재의 거대한 속임수라는 것을 안다. 죽음은 결코 일어난 적이 없으며, 결코 일어나지 않으며,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그 모습이다. 차원이 변화할 뿐, 언제나 남아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연속적이다. 우리는 아주 낯선 곳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미지의 근원으로부터 나와 뜻밖에도 여기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이곳을 떠나 근원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것은 아주 짧은 여행이다. 할 수 있는 한 즐겁게 보내라.
명상은 집중이 아니다. 집중은 긴장을 풀지 않고 마음을 좁히는 훈련이다. 그대의 의식에 가하는 폭력이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대하는 방식 그대로 다른 사람을 대한다. 만일 자신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도 사랑한다. 내면의 상태는 외부로 드러난다. 또 명상은 사색도 아니다. 명상은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에 대해 사색한다고 해도 생각은 여전히 생각이다. 대상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하지만 대상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정신활동은 모두 생각이다. 대상이 다를 뿐 생각은 생각이다. 사색은 생각일 뿐이다. 명상은 그대 존재와 더불어 즐기는 것이다. 명상은 존재의 즐거움이다. 명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그저 긴장을 풀고 있는 것이다. 행위가 이루어지는 순간 그대는 긴장을 느낀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사색할 수 없다. 미지의 세상에 대해서도 사색할 수 없다. 그러니 사색의 대상은 이미 알고 있는 것 뿐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되씹어서 세련되게 만들고, 장식하여, 조금씩 변화 시킨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미지의 세상에 들어설 수 없다. 신은 미지의 세상에 속한다. 명상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행위도 생각도 감정도 없다. 그대의 마음은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원인이 없는 것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원인없이 존재하는 것을 통제할 수 없다. 원인이 없는 것을 마주하면 마음은 무력해진다. 그래서 마음은 이런저런 이유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대가 행복을 느낄 때 그 행복에는 이유가 없다. 불행에만 이유가 있다. 그대를 만든 재료가 행복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그대 존재의 핵심이다. 그대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에 행복이 있다. 기쁨이 있다. 나무, 새, 구름, 별을 보라. 존재는 모두 즐거워 한다. 모두가 그저 행복하다. 어떤 이유도 없다. 모든 존재는 즐거움이라는 재료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즐거움에는 이유나 원인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존재하며 스스로를 즐기면 된다. 그것이 명상이다. 명상이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유가 없는 행복은 한 개인의 내부에만 담아 놓을 수 없다. 그 행복은 주위로 퍼져 나간다. 그래서 나누어 가지게 된다. 그대의 손안에만 있기에는 행복은 너무나 거대하다. 그래서 저절로 넘쳐흐르고 주위로 퍼져 나간다. 그것이 자비이다. 명상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며 자비는 그 존재와 더불어 흘러 넘치는 것이다. 자비심을 지녀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명상에 들어서면 그대의 존재가 자비로 전환된다. 명상은 통제도 아니며 억압도 아니다. 홀로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방해받을 필요가 없다. 선택하려고 애쓰지 말라. 명상을 통해 거대한 침묵을 느껴야 하고 사랑을 통해 삶을 노래와 춤 그리고 축제로 만들어야 한다. 홀로있음(명상)의 산은 관계(사랑)의 골짜기 안에서만 솟아 오를 수 있다. 문제는 간단하다. 그대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혼자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홀로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과 관계 맺을 수 있다.
사랑은 두 개의 육신에 존재하는 하나의 영혼이다. 인간 두뇌의 주된 생산물은 마음 속에서 공상이나 심상이 되는 구조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과정은 진화에 있어서의 돌연변이와 거의 같다. 유사성이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학습 과정에 전 인류에 공통된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체로서의 우리들의 존재는 없다. 우리들의 몸은 우리들 자신의 한부분, 한 부분들이 차례차례로 쌓아 올려져서 된 것이 아니다. 세포 속의 미세한 생물들이 나를 위해 일하고 생각하고 숨쉬고 있는 것이다. 그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도, 실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세포)이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독립적이고 독보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들의 게놈은 자연계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갖가지 사건들을 빠짐없이 수록하고 있어서, 모든 행동에 대한 지침을 부여하는 카탈로그와 같은 것이다. 이 지구상에는 잡다한 종류의 생물들이 살고 있으나, 놀라운 것은 그들이 모두 닮았다는 것이다. 즉 단 한 개의 세포(원시세포)로부터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이 모체로부터 생긴 세포의 후예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의 생물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직까지도 우리들의 유전자의 암호는 다른 생물들과 공통인 것이고, 가족의 얼굴 모습이 닮은 것처럼 초목의 산소와 고래의 효소는 닮은 것이다. 이 지구는 하나의 세포를 꼭 닮았다. 생물 상호 간의 관계는 대개 기본적으로 협조적이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생관계에 있다. 다른 종류의 생물을 병들게 하는 경우는 양자가 오랜 친교, 길고 친밀한 공동생활을 보내고 난 뒤가 아니면 생기지 않는다. 거의 모든 미생물은 단독으로 배양할 수 없다. 자기와 비자기를 구별하는 동일성의 한계는 이미 옛날부터 모호했었다는 결론이 된다. 나의 세포들은 서로 협력해서 어떻게하면 되는지 나면서부터 잘 알고 있다. 만약에 내가 그들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품는다면 그들은 화를 낼 것이다. 질병은 흔히 공생관계의 교섭이 합의되지 않을 때 일어나게 된다. 다시말해서 경계선에 관해서 생물학적 오해가 생겨서 어느 한쪽이 그 일선一線을 밟고 넘어선 상태인 것이다. 생명에 대한 위험이라는 점에서는 인간보다는 병에 감염된 병원균(미생물)이 더 위험하다. 우리들은 때때로 주기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지각한다. 임상적으로는 이 지각반응이 바로 병인 것이다. 즉 병에 걸리는 것은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우리가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침입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방어기구에 의해서 커다란 위험에 처해있다. 우리들은 폭파장치들이 있는 한복판에 살고 있다. 우리들에게는 지뢰가 부설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다른 생물에 의존해서 살고 있다. 우리들은 시스템의 일원인 것이다. 즉 지구는 느슨하게 결합된 하나의 구형의 유기체이고 각 활동 부분의 연관은 모두 공생에 의한 것이다. 우리들은 소유자도 운전자도 아니다. 고작 정보를 수용하기 위해서 분화된 움직이는 특수한 조직으로 밖에 볼 수가 없다. 인간은 아마도 전체의 존재를 위한 신경계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몸이란 수억의 세포들이 잠시 모여 한 살림을 차린 둥지이며 나의 생각 행동 생명 희노애락까지 그네들의 것이며, 그네들이 지은 것이다. 나는 그들의 껍데기이며, 그들의 작품이며 그들의 시공, 우주이다. 하나의 생명체는 너무나 거대하고 미묘한 세포들의 교향악단이다. 모든 존재는 그 속에 온 우주를 투영하고 있는 세포이며 동시에 온갖 세포를 하나로 엮어 살리는 우주이다.
올바로 사물을 보고 올바로 말하고 싶다면 눈으로 보고 입술과 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서 보고 입술과 혀를 통해서 말해야 한다. 사물을 내버려 두라. 사물을 변화 시키려고 노심초말라. 왜냐하면 사물이 지금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그대가 지금처럼 보기 때문이다. 사물에게 베일을 벗으라고 요구해선 안된다. 자신의 베일을 벗으라. 그리하면 사물이 베일을 벗을 것이다. 사물에게 봉인을 떼라고 요구해선 안된다. 자신의 봉인을 떼내라. 그리하면 모든 사물이 봉인을 떼어 낼 것이다. 자기의 베일을 벗고 자기의 봉인을 떼는 열쇠는 언어이다. 즉 창조의 언어. 만약 그대의 우주(‘나’가 창조한 것이다.)에 괴물이 있다면 그것은 그대 속의 ‘나’가 탄생 시킨 것이다.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소멸시킬 수도 있다. 창조물과 창조자는 동일하다. 창조자는 자지자신만을 창조한다. ‘나’는 수원지이다. 모든 사물이 그곳에서 흘러 나오고 모든 사물이 그곳으로 돌아간다. 수원지가 그러하면 흐름도 그러하다. 그대의 의식과 그대의 ‘나’는 똑같은 것이다. 그대의 ‘나’와 그대의 세계 또한 똑같다. 만약 ‘나’가 하나라면 그대의 세계도 하나다. 그때 그대는 모든 하늘의 주인, 모든 땅의 주민과 영원히 평화롭게 지내게 된다. 만약 ‘나’가 여럿이라면 그대의 세계도 여럿이다. 그때 그대는 그대의 자아와 신의 무궁한 우주에 머무는 모든 피조물과 끝없이 싸우게 된다. ‘나’는 그대 생명의 중심이다. 그대의 전세계를 형성하는 사물은 그 중심에서 뻗어 나왔다가 그 중심으로 다시 돌아간다. ‘나’가 안정되면 그대의 세계도 안정된 상태다. 만약 ‘나’가 동요하고 있다면 그대의 세계도 동요하고 있다. 그대의 세계는 안정된 상태이다. 그러나 불안정 속에서만 안정되어 있다. 그대의 세계는 확실하다. 그러나 불확실함 속에서만 확실하다. 그대의 세계는 불변이다. 그러나 변화 속에서만 불변이다. 그대의 세계는 단일하다. 그러나 다양함 속에서만 단일하다. 인간은 자신과 창조물이 일체임을 알라. 한 부분을 거부하는 것이 전체를 거부하는 것이며 전체를 거부하는 것이 자기자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목적과 의도에서 영원히 하나다.
풍경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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