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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76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4. 7. 11.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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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76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7M4tqNJFTJQ

     

     

    580'

    그대의 삶을 살라. 타인의 관념에 따라 살지 말라.

    명상 속에서는 생물학적 차이점이나 심리학적인 차이점들이 사라진다. 두눈은 그대 두뇌의 한 부분이다. 그대 두뇌 에너지의 80%가 눈을 통하여 작동한다. 만약 그대의 눈이 긴장된다면 그대의 두뇌도 긴장될 것이다. 그래서 눈을 반쯤 뜨고 명상하라.

    존재란 단순히 모든 범주를 초월하여 가는 것을 뜻한다.

    열반에는 결코 도달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그대의 본성이다. 그것은 그저 발견되는 것이다. 그보다는 기억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것은 얻지 못한다. 완전함을 연습하는 자는 불완전한 채 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분리된 채 남아있게 될 것이다. 그대는 이미 완전하다. 그대는 변장하고 있는 신이다. 그대는 잠든 붓다다. 깨어나라. 그러면 아무것도 연습할 필요가 없다. 잠과 깨어남 사이에는 단계란 없다. 그것은 도약이다. 돌연한 비상이다. 부분적으로 깨달음에 이를수도 없다. 그것은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오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붓다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아직 깨닫거나 붓다가 아직은 아니다. 붓다는 어떤 증거도 필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그것을 아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입증해 보일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그가 성취한 것이 위대한 그 무엇이 아님을 안다. 그것은 단순한 현상이다. 그는 들여다 본 것 뿐이다. 그는 언제, 어느 때라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붓다의 내부를 찾아낸 것 뿐이다. 그는 수천가지를(에고, 가슴, 마음, 무지, 인간, 육체) 잃어 버렸지만 단 한가지도 얻은 것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얻은 것은 언제나 나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의 본성이었다. 그것은 전혀 성취가 아니다. 성취의 견지에서 생각하는 것은 꿈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진리에의 길은 역설로 꽉 차 있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마음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연은 모순을 통하여 존재한다. 존재의 이 불합리한 다른 이름이 신비이다. 그것은 살아보고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대는 그것이 무엇인지 답을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가 그것을 풀려고 노력하는 순간, 그대에게는 언어가 초래되기 때문이다. 언어가 바로 논리(마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부적당한 것이다. 진리는 오직 침묵을 통하여만 표현될 수 있다. 그 침묵이 신비인 것이다. 마음은 옳은 질문을 할 수 없고 옳은 질문을 듣기 위한 능력도 없다. 사실은 옳은 질문이 그 해답인 것이다. 마음의 세계에선 이중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옳은 질문을 물을 수 있다면 더 이상 질문할 필요가 없다. 옳은 질문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그 답을 알기에 충분하다. 옳은 질문은 무심에 의해서만 질문되어 질 수 있다. 그러나 무심은 결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이 마주치는 첫 번째 역설이다. 질문이 일어나지 않는 질문이 바로 그 해답인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분류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존재는 아름다운 혼란이다. 모든 해답이 가짜라는 것은 그것이 단지 추측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슴의 밑바닥까지 가 보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대답한다면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질문도 빌려온 것이다. 다른 사람의 경험이나 말을 토대로 하지 말고 자신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어야 한다.

    붓다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 오직 영원 속에만 존재한다. 시간 속에 있는 것은 잠들어 있는 것이다. 시간은 우리의 잠이고 마음이고, 꿈이고 생각이다. 그대가 마음을 통하여 알아차리는 그 순간이 바로 현재인 것이다. 현재에 살면 과거와 미래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고 마음이나 시간이 나타나지 않는다. 과거는 죽어있는 현상이다. 미래는 계획하고 상상하고 꿈꾸고 욕망을 품을 수 있다. 시간은 과거와 미래의 시제만 있다. 현재는 시간의 일부가 아니다. 영원의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현재에 있을 때, 그대는 영원한 것이다. 보통 생물학적인 인간들은 성적인 오르가즘을 통해서만 시간이 완전하게 멈추는 순간을 알게된다. 이는 가장 낮은 경험이다. 이는 긴 여로의 첫 발자국이다. 시간은 오직 그대가 절대적으로 마음이 없을 때 멈춘다. 그것은 자연에서 혹은 예술()에서 일어 나기도 한다. 그대가 시간이 멈추는 순간을 경험하였다면 바로 그것이 명상의 본질이다. 그대가 들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직 그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이 의미있는 것이다.

    붓다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대가 붓다가 되어야 한다. 지혜는 변형에서 오는 것이지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살라. 그러나 의식적이 되어라. 의식적으로 되는 것만이 곧 산야신이 되는 것이다. 그대는 다른 아무것도 행할 필요가 없다.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붓다의 길은 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환영은 라는 에고이다. 그대는 태어날 때 이름없이 태어났다. 이름은 실리적이고 편리하지만, 실제가 아니다. 그대는 이름이 아니다. 현자들은 그대의 기대를 그냥 박살 내기위해 수많은 방법을 고안해 내려고 한다. 그들은 결코 그대의 기대를 채워주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참된 마스터의 표시이다. 만약 누구인가 그대의 기대를 채워준다면 틀림없이 그는 사기꾼이다. 도에서 가장 굳게 세워진 것은 가장 무기력하게 나타난다.

    아는 것 없이 그것을 알 때 그는 그것을 완전히 아는 것이다. 만약 누구라도 얻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전부를 얻은 것이 아니다. 그가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것을 얻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얻는다. 만약 그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올바름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가 옳고 그름을 초월할 때 그의 덕은 완성된다. 그러한 지혜는 지고한 지혜의 수 많은 문을 여는 열쇠이다. 모든 붓다들은 텅 비어있음을 설법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탐구자가 텅 비이있음의 관념에 매달린다면 그는 모든 붓다를 배반하는 격이다. 삶과 죽음, 옳고 그름은 관념일 뿐이다. 실재는 안도 밖도 중간도 아니다. 무지한 자만이 망상을 만들어 내어 그 차별로부터 고통을 받는다.

    마음은 오직 질문만 일으키지 해답을 찾을 수는 없다.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을 초월해야만 한다. 질문들은 그대가 마음을 초월하였을 때 풀리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초월하는 것은 그대가 질문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대가 해답을 찾은 것이 아니다. 질문이 용해되어 그대가 질문이 없는 자각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사마디) 바로 그것이 해답이다. 어떤 특별한 해답이 없는 바로 그것이 해답이다. 그대가 아무것도 물을 것이 없을 때 그대는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무엇인가 물을 것이 있을 때 그대는 모르는 것이다. 그대는 지식에, 질문에 점령 당하여 그대가 묻는 것은 그대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탐욕과 마음은 두 가지의 것이 아니다. 탐욕은 마음(, 권력, 관념, 지식...)의 본성이다. 마음은 탐욕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욱 더 많이 축적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텅 비어 있음을() 두려워 한다. 텅 비어 있는 세상은 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첫 번째 경험이 텅 비어있음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두 번째 경험이 신의 충만함이다.

    그대 자신이 빛이 되라.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라. 다른 이를 따르지 말라. 왜냐하면 그대 존재의 궁극적인 핵심은 그대가 발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붓다는 오직 그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그대가 가야 한다. 그대를 대신해서는 아무도 갈 수 없다.

    거울이나 순수한 의식은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모든 요구는 에고로부터 온다. 아는 것 없이 그것을 알 때, 그는 그것을 완전히 아는 것이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다면 모든 것을 놓아 버려라. 만약 그대가 부활하고자 한다면 완전히 죽어야 한다.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대가 아직도 올바르고 특별한 어떤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대는 다른 사람들이 그르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고결한 사람은 미덕에 대하여, 옳고 그름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즉 의식하지 못하고 자연스럽다. 그는 어떠한 도덕도 따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도덕도 부도덕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무선택의 깨어있음 속에서 산다. 그러나 그대가 옳다고 생각하여 선택하는 것은 무엇이나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대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선택자는 언제나 마음과 접촉하여 오염된다. 선택자는 에고이다. 만약 그대가 옳은 일을 하더라도 그르치게 된다. 만약 에고가 감로를 만지면 그것은 독약으로 변해버린다. 무엇을 하더라도 붓다가 행하는 것은 옳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집착으로 하여 사물과 관념(, 죽음, 사랑, 증오, 선과 악, 도덕과 부도덕, ...)을 인식한다. 삶도 죽음도 없다. 모든 것이 영원하다. 그대가 생각하는 탄생은 단지 영원한 삶의 에피소드일 뿐이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은 자연의 일부이다. 그대는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바다에서 일어나고 내려앉는 파도와 같다. 아무것도 오지 않고, 아무것도 가지 않는다. 파도는 바다이다. 따라서 파도가 일어나고 내려앉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물은 물 그대로이다. 관념에 달라붙지 말라!

    만약 누가 덧없는 시간이 곧 마음이라는 것을 깨우친다면, 그는 빨리 성취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누가 그의 마음에 어떤 목표를 두거나 가야할 목적지가 있다면 그는 더디게 성취할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그의 마음이 길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둔한 자는 마음의 저쪽에 길을 만든다. 그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뿐더러, 또한 마음 그 자체가 길인 것을 모른다. 왜냐하면 마음이 곧 의 체현 体現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누구든지 그 즉석에서 도달할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만의 규격에 맞춰 그 시기를 점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망상으로 하여 목적지를 만들어 버린다.

     

    풍경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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