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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75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4. 7. 6.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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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75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vHhZ1ZFFcYQ

     

     

    579.

    무에서 유는 생기지 않는다. 새로운 질서, 또는 패턴은 정보 없이는 만들어 낼 수 없다. 메시지가 아무에게도 읽혀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은 메시지로서의(숲 속의 나무가 쓰러질 때의 소리) 기능을 잃어 버린 것이다. 의미를 이루기 위해서는(좀 더 넓게 패턴으로서 인식되기 위해서는) 모든 규칙성이 그것을 보완하는 별도의 규칙성 혹은 기능과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

    양은 패턴을 결정하지 않는다.(수가 정한다.) 간혹 양에 의해 패턴이 나타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패턴은 양이 작용하기 이전부터 그 시스템 속에 잠재하고 있다.

    생물학에서 단조의 가치(상승 또는 하강만 계속하는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물질이나 경험에는 최적량이 존재한다. 이 양을 초과하면 독성이 발생하고, 그 양이 부족하면 결핍감을 느끼게 된다.

    변혁은 탐닉의 과정에 의해 일정한 비율로 그 변화를 계속해야만 하는 상황에 빠진다.

    마음이 평안하다면 무엇 때문에 애써서 교훈()을 지켜야 하는가?

    경은 부처님이 말씀하셔서 이루어진 것이니 만약 이것을 외고 있음을 부처님이 듣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것을 들어야 하는가. 부처가 그대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대가 그의 이름을 외워야 한단 말인가? 예배는 그 사람의 성의일 뿐 도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붓다의 마음 佛心이란 너의 마음이 그것이다. 네가 그 본질의 동일함을 깨우쳤을 때 변화하지 않는 그것을 그렇게 부를 수 있으리라. 그것의 본성을 깨우쳤을 때, 그것을 法身이라 부른다. 그것은 어느것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을 해탈이라 부른다. 그것은 편하고 자유롭게하며 결코 다른 것에 의해서 혼란받지 않고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참된 도라 부른다. 그것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소멸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닐바나 nirvana라고 부른다. 如來란 그가 아무 곳에서도 오지 않고 아무 곳으로도 가지 않음을 아는 자이다. 붓다란 진리를 딛고 일어난 사람. 따라서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는 자는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달마(Dharma )란 그것은 결코 생성되지도 소멸 시킬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우주의 운행법칙 즉 달마라 부른다.

    원의 주변에서 볼 때에 붓다는 천년 전에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달마대사가 깨달음에 이른 그 자리에서부터는 붓다와 함께 그 중심에 있는 것이다.

    덕이란 깨달음의 산물이다.

    신성과 신성하지 않은 것은 마음의 태도 여하에 달려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편견일 뿐이다. 사물은 단순히 있는 그대로 일 뿐이다.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다. 믿음은 의심을 덮어 버릴 수는 있지만, 그것을 무너뜨리지는 못한다. 믿음과 의심은 머리에서 일어나지만 신념은 가슴으로부터 온다. 신념은 의심의 반대가 아니라 신념은 의심의 부재이다. 믿음은 의심의 반대이다. 믿음은 의심을 억압한다. 그러나 신념은 의심을 용해시켜 버린다. 믿음은 빛을 믿고 있는 장님과 같다. 신념은 눈을 뜨고 빛을 본 사람과 같다. 實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그 근본을 이해해야 한다.

    붓다의 마음 즉 순수의식(불심, 존재) 無心이다. 그것은 단순히 반사할 뿐이지 계획하지 않는다. 그것에는 어떤 이상이나 내용이 없다. 생각이나 욕망도 없다. 어떤 상상력이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영원한 현재를 나타낸다. 그대가 전체적으로 현재 속에 존재할 때 마음이 사라진다. 그것은 모든 경계선을 잃게 된다. 오묘한 텅 비어있음()이 그대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그 텅 비어있음은 언어 속에서의 비어 있음이 아니라 그것은 일종의 충만이다.

    세상은 시장이다. 그대가 무엇을 요구하든지 누구인가 공급할 것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교활한 것처럼 다른 사람도 역시 교활하다. 그런데 그대보다 더욱 교활한 사람들이 있다. 덜 교활한 자는 추종자가 되고 더 교활한 자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덜 교활한 것이 질문이며, 더 교활한 것이 대답이 되는 것이다. 그대의 잘못된 질문으로 인하여 세상에는 그렇게 많은 선생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해답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대답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알맞은 모양과 칫수를 가지고 등장하게 된다. 그대는 오직 올바른(근본적인) 질문을 함으로써 그들을 피할 수 있다. 그것은 빌려온 지식으로는 대답해줄 수 없다. 그것은 오직 근거있는 경험의 진리 안에서만이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불성은 누구인가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무엇이 아니다. 불성은 그대의 잠재력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대 안에서 일어날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와의 어떤 이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가장 본질적인 핵심인 것이다. 그대가 붓다이다. 붓다가 잠들어 있거나 불성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역시 붓다이다. 그대를 위한 궁극적인 질문만 하라.

    그대의 마음은 매순간 변화한다. 그대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이 변화하는 흐름을 지켜볼 수 있다면, 그때에는 전혀 다른 형태의 마음이 그대에게 솟아 오를 것이다. 이 지켜보는 것이 바로 동일함(selfsame)이다. 슬픔, 절망, 기쁨 등의 내용이 끊임없이 바뀌지만 그러나 그 지켜보는 자는 지켜보는 것과 동일하다. 그것은 언제나 똑같다. 결코 변화하지 않는다. 거울은 그대로 남아있다. 변화하는 것은 그대가 아니라 마음인 것이다. 그대 안에서 변화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붓다의 마음이고 마음이 없는 마음이고, 스매디, 사토리, 그리스도, 달마카야, 궁극의 법칙의 체현, 달마의 현현이라 부를 수 있다. 그것은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고 동일화 하지도 않는다. 그대 안의 지켜보는 자는 언제나 현상을 초월한다. 그것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 그것을 해탈, 즉 해방이라 부른다. 그대로부터의 해방, 모든 동일시로부터의 해방이다. 이제 그대는 이것은 나다라고 말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각을 뒤로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 할 수 없다. 오직 침묵으로 발음하여야 한다. 그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에고(탐욕, 욕망, 분노, 질투, 소유욕...)가 사라진다. 마치 태양이 떠오르고 아침의 안개가 사라지듯, 에고는 그대가 깨어났을 때 사라진다. 붓다의 마음이란 깨어났을 때의 마음 그것이다. 어떤 위대한 사원에서도 붓다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붓다는 그대 안에 있다. 붓다는 언제나 거기에 있 었다. 그것은 그대의 영원성이다. 육체는 오직 붓다가 살고 있는 집일 뿐이다.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은 놓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슴으로 느끼러 오는 사람은 즉시로 변형된다. 학생들은 보러 오지만 제자들은 느끼러 온다. 붓다는 언제나 여기에 있다. 그대도 언제나 여기에 있다. 그대는 어디서 오지도 않았고 다른 어디로 가지도 않는다. 이 전우주가 그대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그 한 부분인 것이다. 그대의 몸을 올바르게 지켜보아라. 그러면 그대는 그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몸은 모든 부분에서 숨을 쉰다. 그대는 끊임없이 존재와의 왕래를 하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존재와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이다. 붓다란 고타마 싯타르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단순히 깨달음이다. 그는 단지 붓다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성취되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대가 이미 붓다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림자다. 그림자를 쫓아갈 필요도 없고 도망칠 필요도 없다.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이다. 다만 그대가 누구인지 깨우쳐라.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깨닫는 사람은 깨달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가 붓다이다. 이 우주가 그대가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궁극의 불성 조차도 이미 짜맞추어져 있다. 궁극의 법칙(달마)과 조화를 이루고 사는 것이 행복이고 지옥은 그대가 그 우주의 법칙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다. 천국은 그것을 향하여 치닫는 것이다. 그대가 그것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니르바나이다. 그것은 지복과 진리와 인식의 궁극적인 정점인 것이다. 즉 실존, 의식, 축복이다.

    명상이란 존재함을 말하는 것이지 무엇에 관한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비어있음()이다. 순수한 무물상,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는 거울, 거울은 거울로써의 그 자신의 본성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대가 그러한 순수함과 무지에 이르게 될 때, 명상 속에 잠겨있는 것이다. 그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그대는 오직 명상 속에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doing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존재 being에 관한 문제이다. 그것은 어떤 행위가 아니라 경지이다. 집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명상에는 아무것도 그대를 혼란 시킬 것이 없다. 만약 그대의 명상이 어지럽다면 그것은 그저 그대가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명상이란 매우 광활하여 무엇이나 포함할 수 있다. 무엇이나 흡수할 수 있으면서도 비어있는 그대로이다. 진리는 그대 자신의 것이어야만이 자유롭다. 사람은 현상의 세계에서 사물을 지켜본다. 자신의 생각을 플러스해서. 그럼에도 언제나 텅빈 속에 머무른다. 그것이 텅빈 명상이다.

    이 세상은 우리들의 투영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일 따름이다.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장미는 그져 장미 그 자신일 뿐이다. 그대는 그대의 관념을 투영하고 있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객관적인 아름다움이란 없다. 실존이란 아무런 형용사 없이 존재한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떨쳐버려라. 선택하기를 멈추라. 투영하기를 멈추라. 그러면 세상이 사라질 것이다. 달마 속에 머물러 있든지 머물지 않고 있는지에 대하여 잊어 버려라. 그것은 그대 마음을 불러 들인다. 범주 category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살라. 도를 깨우치기 전에는 나는 그것을 해야만(의무, 이행, 노력, 억지, 명령) 했었지만, 지금은 모두가 자연스럽게(아름다움, 기쁨, 사랑) 일어나고 있다.

     

    어느 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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