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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63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4. 4. 12.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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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63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nNtj8oo3fUg

     

    567.

    명상=직관=통찰=중심이 없는 의식=무시간성=the omega point=열반=자이나교=알파 alpha=모크샤 moksha=하나님 아버지=할렐루야=은총=엑스터시=우주적 오르가즘=지금=현재(이것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둘 다 사라진 현재이다.)

    에고는 존재하지 않는 귀신이다. 그저 관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에게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결코 갖고 있지 못한 것을 빼앗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주기 위해 여기에 있다. 그대의 불행, 야망, 질투, 두려움, 탐욕, 증오, 집착 이 모두가 실재하지 않는 귀신들이다. 그대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는 상상속에 만들어 낸 것이다. 만트라는 그대의 환상을 없애기 위한 속임수이다. 그리고 이 모든 환상이 제거되면 그 뒤에 진리가 남는다. 즉 허상을 허상으로 이해하면 다시말해 모든 거짓이 드러나면 그때 진리는 저절로 나타난다. 그리고 진리는 해방을 가져다 준다. 진리는 liberation 구원이다.

    그대는 신이라는 관념에 집착한다. 이 관념은 허구이다. 모든 관념이 허구이다. 그대는 신에 대한 특정한 관념에 매달리는데, 이것이 그대를 막는 장애물이다.  안에 진리가 떠오른다. 아무 걸림돌도 없기 때문이다. 무는 더 이상 장애물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모든 거짓된 관념이 떨어져 나간 상태다. 무 안에서 그대는 텅빈 공이다. 활짝 열린 상태로 모든 것을 받아 들인다. 그대는 벌거벗은 알몸이 된다. 이것이 진리가 찾아오는 유일한 길이다. 무가 가장 위대한 만트라다.

    그대는 붓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붓다가 아니다. 이 경전(반야바라밀다심경)을 독송한다고 도움이 되진 않는다. 깊이 이해하고 모든 이름과 형상과 아이덴티티의 한계를 넘어서 계속가라.

    진짜가 아닌 그대와 진짜인 그대 사이의 간격은 명백한 허구이다. 그대는 언제나 진짜다. 다만 꿈꾸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신앙이나 이데올로기 경전과 지식 따위에 속지 말라. 그 모든 것을 버려라. 그러면 엑스터시가 일어난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양한 표현 양식으로 표출된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흉내내지 말고 그대만의 고유한 표현법이 그대를 사로잡는 것을 지켜보라. 진실로 그대만의 것이게 하라. 이런 일은 그대가 무일 때 일어난다. 무가 되라. 그러면 그대는 전체가 될 것이다. 이 게임에서는 오직 잃는 자만이 승자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잃어라. 그러면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이다. 집착하고 소유하면 모든 것을 잃게된다.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정의가 가능하지 않다. 정의는 오직 죽은 것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죽은 사람은 정의할 수 있으나 살아있는 사람은 정의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삶이란 아직 새로운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야스는 부도덕이 아니라 비도덕이다. 또한 더 고차원적인 도덕이다. 그것은 내면에서 오는 것이지 결코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명상은 그대 존재의 급진적인 혁명이다. 명상은 정부나 경제제도를 바꾸는 혁명이 아니라 그대의 의식을 바꾸는 혁명이다. 그리고 일단 의식이 깨어나고 각성되면 그대가 하는 모든 행위는 옳다. 신은 계속해서 세상을 새롭게 색칠하고 있다. 그런데 닫힌 마음의 소유자는 기존의 낡은 관념에 얽매여 있다.

    경험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언제나 미결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일은 결코 종결되는 법이 없다. 그러나 믿음은 언제나 완전하고 종결되어 있다. 그대의 모든 믿음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 마음이다. 그런데 개방성이란 무심을 의미한다. 개방성이란 마음을 옆으로 밀어 놓고 계속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통찰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뜻한다. 마음은 그대에게 낡은 시각을 준다. 마음은 자꾸만 기존의 관념들을 심어준다. 무심의 눈으로 볼 때 그대의 인식은 정확하다. 이때 진리를 본다. 무심의 순간에 진리가 빛처럼 그대 안에 스며든다. 이 진리의 빛을 즐기면 즐길수록 그대는 과감하게 마음을 버릴 수 있게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마음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때 그대는 어떤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볼 뿐이다.  은 순수하다. 이 순간에 그대는 붓다가 된다. 그대는 아무런 관념 없이 본다. 그저 볼 뿐이다.

    삶은 원자처럼 제 스스로 움직인다. 사전에 미리 결정하지 마라. 그대를 구성하는 유기체를 신뢰하고 진실하게 대하라. 그대의 육체는 고유의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 그 세포 속에는 수많은 세월 동안의 지혜가 들어있다. 육체의 소리에 귀 기울여라. 경전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다. 경전을 쓴 사람은 그대를 염두에 두고 쓰지 않았다. 몸이 먹지 말라면 먹지 말고, 먹으라면 먹으라. 그대는 육체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육체를 존중하고 신뢰해야 한다. 육체는 그대의 사원이다. 육체를 강요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육체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됨에 따라 서서히 존재계에 대한 신뢰까지 배우게 될 것이다. 그대의 몸은 존재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산야스;모든 체계에 대한 혁명이다. 비체계적인 삶의 방식, 비인격적(그는 순간속에 산다. 그러므로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의 존재 자체가 자유이다. 무인격성, 자기자신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 사념을 지향하지 않는다. 깨어있음이다. 경험에 대한 개방성이다. 실존적인 삶, 지금 여기에 존재, 즉흥성, 단순성, 자연스러움, 기성복처럼 이미 만들어진 삶을 살지 않는다. 자신의 유기체에 대한 신뢰이다. 자유에 대한 감각이다. 그 자신이 곧 자유 자체이다. 창조성, 세상에 무엇인가 공헌해야 한다. 그저 존재할 뿐, 공간만 차지할 뿐 식량만 축내면 죄악이다. 창조적일 때 그대는 신과 가까이에 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도이며 명상이다. 신은 창조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대 또한 창조자가 아니라면 그대는 신과 멀어질 것이다. 신은 오직 하나의 언어만을 안다. 바로 창조성이라는 언어이다. 그대가 예술에 몰입할 때 그대로부터 신성한 어떤 것이 스며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유머감각, 웃음, 쾌활함, 심각하지 않은 진지함이다. 웃음은 종교적인 특성이다. 명상성과 홀로있음이다. 외로움이 아니라 홀로 존재함이다. 즉 고독이 아니라 독존이다. 그대는 더 이상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홀로 있음으로써 행복할 수 있다. 내면의 지복으로 빠져들 수 있을 때 이것이 바로 명상의 모든 것이다. 사랑과 친밀함이다. 그대는 홀로 존재하는 법을 배운 후에야 비로소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만일 그대가 홀로 존재할 수 없다면 그대가 맺은 모든 관계는 거짓이다. 그것은 외로움을 달래려는 방편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전체와의 조화, 초월, , 무아, 무심, 이다. 삶은 목적지 없는 여행이다.  이다.

    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있는가? 검은 빛은 사물을 밝힐 수 있는가? 환상은 존재할 수 있는가? 사람은 거울을 보고 거울은 사람을 본다. 흰눈이 녹을 때 흰색은 어디로 가는가?

    원자는 원자들의 신은 믿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위에 실제로 존재하는 차원이 분자라는 사실을 상상할 능력은 없다. 또 이 분자는 손가락에 속해 있고 다시 이 손가락은 인간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상상할 능력은 더더욱 없다. 모든 것은 차원과 의식의 문제이다.

    그대는 붓다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붓다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대의 중심은 또한 우주의 중심이다. 우리들은 모두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주변에서 우리들은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체험이 설명되어지고 철학이 되고 신학이 되는 순간 그것은 생명을 잃는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을 고정된 틀 안에 잡아둘 수 있다. 종교는 그대가 온갖 위기에 처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조직화된 종교들은 그대가 진리를 찾지 못하게 막고 있다. 그들은 의식에 대한 어떤 창조적인 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지구와 그것의 아름다움을, 그것의 생산성을 풍부하게 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사람들에게 세상을 포기하라고 가르쳤다. 종교는 굳어져 가고 중앙집권 체계화 된다. 그러고 나면 계급제도가 생긴다.

    내일 새로운 새벽이 그대 주위에 전혀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 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새롭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대가 계속 낡은 눈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대의 세상은 매우 작아 보인다. 그대가 내면으로 더욱 깊이 들어 갈수록 그대는 세상이 계속 점점 더 커지고 더 커지게 됨에 놀랄 것이다. 그리고 존재의 경계선도 끝이 없다는 것을 아는 지점에 이른다. 이 무한한 존재계에 태어나는 것은 엄청난 축복과 커다란 환희와 영원한 느낌을 가져온다.

    사람은 늙으면 늙을수록 지식적이 된다. 명상의 역할은 그대에게 다시 그대의 어린시절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것이 선이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거기에 항상 있었지만 그대가 결코 보지 않았던 진리, 신성,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

    체험하라. 그러나 설명에 매달리지 말라. 언어는 진리를 포함할 능력이 없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다른 방법이 명상이다.

    존재는 나무와 새와 동물들을 돌본다. 왜 존재가 그대를 돌보지 않겠는가? 사실 그대는 존재의 가장 위대한 꽃이다. 이제 모든 것은 존재의 보살핌 안에 있다. 그대는 그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매일 매일의 삶에서 그대가 무엇을 하든 자신이 붓다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 작은 기억이 궁극적으로 존재의 변형을 가져다 줄 것이다.

    두려움에서 나온 것은 무엇이든 그대를 진리로 이끌 수 없다.

    그대가 어떤 성취를 얻겠다는 생각을 버리면 마음은 천천히 가라 앉는다. 만약 갈 곳이 어디에도 없다면, 왜 그것을 위해 준비하는가? 만약 성취하여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왜 불필요하게 그대 자신을 귀찮게 하는가? 애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는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애쓰지 마라. 그저 그것이 일어나게 하라. 그리고 바라 보아라.

     

    풍경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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