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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62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4. 4. 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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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62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hVXq9g7Srss

     

     
    566.

    존재계는 변증법적이다. 서로 상반되는 것들은 단순히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한다. 죄인이 없어지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성자라는 관념을 버려라. 그대가 성자이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 아니라 전체이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다. 하나는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은 하나이다.

    우월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열등감이다. 열등한 사람들만이 정치가가 된다. 부자가 되려는 욕망을 버리면 어느날엔가 가난함이 사라진다. 지식을 버린다면 무지 또한 사라진다. 이때 그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지혜는 지식과 무지가 둘 다 부재하는 상태다. 두려움은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즉 두려움은 소유욕의 부산물이다. 기본적으로 욕망은 두려움을 낳는다.

    에고라는 관념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만들어 낸다. 에고가 없으면 죽음도 없다. 그대는 전적인 침묵이다. 그대는 不死의 존재이며 영원한 존재다. 그대는 라는 관념에 오염되지 않은 드넓은 하늘이다. 경계선도 없이 무한한 하늘이다. 이것을 알면 두려움은 없다.

    는 충만하다. 가득차서 흘러 넘친다. 이것은 단순히 부재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현존 現存이다.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 만나 더 이상 대립되지 않을 때 그것들이 서로의 안으로 들어가 용해될 때, 거기에 오르가즘이 있다. 오르가즘은 부정과 긍정의(남녀) 만남이다. 이것은 부정과 긍정 둘 다를 초월하는 것이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동시에 양쪽 모두이다. 부정과 긍정의 융합 이것이 (, 니르바나, 전체 the whole, 삼매, 신과의 합일 Hasidism, 완벽한 휴식 relaxation)의 정의이다.

    모든 지식은 투영 현상을 낳는다. 지식은 편견이며 선입견이다. 하나의 단정이다. 직접 뛰어들어 체험해 보기도 전에 이미 결론을 내려버린 것이다. 지식은 이 삶의 존재계의 광대함을 담을 수 없다. 일단 지식화된 존재계는 더 이상 존재계가 아니다. 이것은 지도를 가지고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달의 사진이 달은 아니고 신이라는 단어가 신은 아니다. 어떠한 단어도 삶의 신비를 담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식은 말의 성찬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지식은 거대한 환상이다. 지식은 존재의 신비를 담을 수 없다. 신비는 본질적으로 알려질 수 없는 것, 애시당초 알려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알려질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지식화 시킬수 있겠는가? 지식은 결코 독창적이지 않다. 진리를 알기 위해선 독창적인 통찰력이 필요하다. knowledge지식이 없을 때 앎 knowing이 있다. 모든 지식은 지도이다. 지도를 숭배하지 말라. 진리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그대가 지식으로 가득차서 계속 진리를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을 버리지 말고 지식을 버려라.

    파도로서의 나는 사라지겠지만 바다로서의 나는 살아 있을 것이다. 바다는 영원한 실체이다. 그러나 파도는 임의적인 현상이다. 에고는 언제나 반응하고 는 언제나 감응한다. 무와 대면하기 위해서는 그대 또한 무가 되어야 한다. 선입견을 갖고 외부 세상을 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maya) 외부 세계를 제대로 못 볼 때 마야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고 내부 세계를 제대로 못 볼 때 에고를 만들어 낸다. 각각의 는 독특한 방식으로 작용하여 에고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자아가 생기는 이유는 각각의 무가 저마다 독특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무가 자기만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개화되기 때문에 자아가 창조되는 것이다. 이 독특성으로 인해 에고가 창조될 가능성이 생긴다.

    그대와 나는 둘이 아니다. 우리는 똑같은 에너지의 두 측면, 즉 동전의 양면이다. 불을 밝혔을 때, 어둠이 방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니다. 어둠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둠은 그저 빛의 부재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지도 없고 무지의 소멸도 없다. 지식도 없고 지식이 없다는 것도 없다. 다만 순수함이 있을 뿐이다. 지식과 무지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곧 순수함(순결함)을 뜻한다. 쇠약과 죽음의 소멸도 없다. 죽음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죽음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지나치게 정상적인 삶을 살지 마라. 그대 안에 어느 정도의 광기가 존재하게 하라. 언제나 어느 정도의 비합리성이 존재하게 하라. 그것이 삶에 향기를 주고 여유와 쾌활함을 갖게한다. 정상적인 사람은 철저하게 머리에 매달려 있다. 그는 그곳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그는 꼭대기 층에서만 살아간다. 모든 곳에 걸쳐서 살아라. 이 모든 곳이 그대의 집이다. 모든 영역에 걸쳐 살아라. 결코 다른 사람을 모방하지 말라. 복사본이 되지 말고 원본이 되라. 모든 가치있는 것들은 복사본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직 원본에서만 일어난다. 다른 사람에게 배우되 그대만의 길을 가라. 그대 자신이 되라.

    신은 그대를 완벽하게 만들었다. 만일 그대가 미완성인 부분인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완벽함의 일부이다. 그대는 완벽하게 불완전하다. 신 또한 완벽하게 불완전하다.

    그대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구원 받을 필요도 없다. 그대는 죄인이 아니므로 구세주가 필요없다.

    그대는 이미 깨달았다. 그대의 본성 자체가 깨달음이다.

    어떤 제도가 세상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라. 어떠한 사회도 그대를 구원할 수 없다. 죄책감과 관계된 모든 넌센스를 버려라. 그대의 모든 에너지를 춤과 축제에 이용하라. 이데올로기 안에는 진리가 없다. 미래의 이상향이나 완벽함을 구하지 말라. 모든 이상을 버리고 지금 여기에 살아라.

    명상은 집중이 아니다. 집중은 이원적인 의식상태이다. 그래서 피로함을 초래한다. 집중은 집중하는 자기와 대상이 있다. 거기엔 이원적 대립이 있다. 그러나 명상 안에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 안은 밖이고 밖은 안이다. 비이원적인 의식이다. 집중은 하나의 행위, 의지가 개입된 행위다. 즉 계획이 있고, 목적, 동기, 투영이 있고, 관념이 있다. 그러나 명상은 의지가 없는 상태, 무위의 상태 즉 휴식이다. 결론도 없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과거, 미래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앉아 있어라. 봄이 오면 풀은 저절로 푸르러진다. 방향을 정하거나 조작하지 않는 것. 삶에 어떤 규율도 강요하지 않는 것. 어떠한 인위성도 개입시키지 않고 자발적으로 즉흥적으로 일어나도록 놔 두는 것. 이것이 명상이다. 명상은 즉시성의 상태다. 그대는 명상을 행할 수 없다. 다만 명상 안에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집중은 인간의 차원이요. 명상은 신적인 차원이다.

    반야바라밀다=저 너머(초월)의 지혜=명상

    집중은 마음의 노력이지만 명상은 마음의 부재 상태다. 명상은 순수한 각성이다. 어떠한 동기도 없다. 모든 목적이 허구라는 것을 통찰하는 것이며, 욕망이 그대를 아무데로도 데려가지 못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붓다와 예수를 통해 믿음을 얻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지식이 아니다. 그대가 직접 깨우치고 보아야 한다. 명상 안에서 그대는 하나의 중심을 통해 작용하지 않는다. 그대는 를 통해 움직인다. 무에서 나오는 감응(반응이 아닌 순수한 감응) 이것이 명상의 전부다. 단정적인 결론을 통해 행동하지 말라. 그것은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며 그대라는 에고의 집합체다. 즉 과거를 의미한다. 세속적인 것은 모두 시간이 요구된다. 그러나 명상은 지금 이 순간에 얻을 수 있다. 이란 명상의 열매이다. 이런 것은 달성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본질이며 실체다. 그 본질은 언제나 그대 안에 존재한다. 외부에서 찾지 말라. 외부는 항상 불안정(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바로 이다. 그러니 그대가 어떻게 공을 경험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오직 그대가 아닌 것만을 경험할 수 있다. 만일 그대가 공을 경험한다면 이것은 공을 경험하는 가 거기에 있다는 뜻이다. 경험이란 이원성(주체와 객체)을 뜻한다. 그러나 공의 차원에는 오직 공이 있을 뿐이다.

    인간이 신을 믿거나 불멸성을 믿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사념의 장막;1.미완결된 행위 2.탐욕, 증오, 질투 3.믿음, 견해, 이념, 지식

    명상은 어떤 대상에 숙고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 안에 존재하는 상태를 뜻한다. 진리는 그대의 신앙과 무관하다. 그대가 믿든 믿지 않든 진리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 믿음은 그대를 편견의 장막으로 포위할 것이다.

    지성;깨어있음, 인식하는 것, 이해하는 것, 아는 것, 빛이 되는 것,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관통)

    지성적인 사람은 사실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두려움이 있다면 그는 그 두려움 안으로 들어간다. 통과해서 들어가는 길이 곧 출구이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라. 도망치면 그 부분은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 그 부분을 관찰하는 것을 점점 더 무서워하게 될 것이다. 그 두려움이 계속해서 축적되어 그대 안에 더 깊이 뿌리 내리고 더 무성하게 가지를 칠 것이다. 두려움 뒤에는 사랑이, 분노의 뒤에는 자비가, 섹스 뒤에는 사마디(三昧, satori 사토리)가 숨어있다. 부정적인 것은 안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긍정적인 것이 일어난다.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을 알 때, 3의 것, 궁극적인 것이 일어난다. 이때 초월이 일어난다. 이것이 지성의 의미다. 일반적으로 그대는 어둠의 대륙이다. 아직 한번도 탐험되지 않은 어둠의 땅이다. 그러나 거기엔 진짜 빛이 그대 안에 존재한다. 붓다의 길은 지성의 길이다. 즉 명상의 길이다. 결코 감성의 길이 아니다. 그대는 지성 안에서 계속 성장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지성이 제 할 일을 다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 지성에 작별을 고하라. 지성은 훌륭한 교통수단이다. 지성은 그대를 강 건너 편으로 데려다 준 배였다. 이제 그대는 반대편 기슭에 도달했다. 이젠 배를 버려야 할 때이다. 배를 머리 위에 이고 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붓다의 길은 지성을 통해 가면서도 지성을 초월한다.

    앎은 오직 반대 극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물질적 우주가 창조된 이유다. 신은 전능하지는 않다. 동물은 과거지향적이고 시간 개념이 없다. 인간은 미래 지향적이다. 성자들의 휴식은 시간 자체를 버렸기 때문에 온 것이다. 그들은 시간을 만들어내는 마음을 버렸고 불안을 초래하는 에고를 버렸다.

     

     

     

    풍경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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