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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59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4. 3. 16.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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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59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MXnDlq_7WA0

     

    563.

    진리의 본성은 자유이다. 따라서 오직 자유로울 수 있는 자만이 진리를 얻게된다. 궁극의 해답은 왜? 등 말속에 있지 않다. 궁극의 해답은 실존적이어서 그대는 그것을 살아야하며 그것이 되어야 한다. 삶에는 어떠한 이유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신비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는 마음의 물음이다. 어머니의 자궁은 그대를 세상으로 보낸다. 스승의 자궁은 그대를 세상 너머로 보낸다. 스승은 어머니다. 마음은 말(과거)로 구성되어 있지만 가슴은 오직 침묵(깊은, 순수한, 깨지지 않는)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은 너무 심각하거나 의미있게 받아들이지 말라. 세상은 분노와 소음으로 가득찼을 뿐 의미있는 것은 없다. 즐기되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라.

    신은 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대와 똑같은 사람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신이 존재한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이다. 창조물은 창조자가 존재한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이다. 창조물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음미하고, 칭송하라. 그것이 신을 칭송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대는 신과 가장 가까운 창조물이다.

    브라흐만이 아트만이다. 아트만은 윤회하는 일이 없다. 나를 포함한 육체와 같은 지각 대상은 아트만이 아니다. 아트만은 순수정신이다. 순수정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아의식(에고)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트만에 관한 수식은 그 모두가 아트만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아는 자(아트만)는 모든 수식에서 벗어나 있다. 곧 그 어떠한 수식어도 적용되지 않는다. (아트만)는 지고의 브라흐만이자 일체 지자이며 일체 만물속에 그득 차있는 자이다. 즉 자기자신의 지성의 뭇 움직임을 지켜보는 자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지성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해탈해 있다. 나는 不二이기 때문이다. 허공이 만물에 두루 편재해 있지만 더러움에 물드는 일이 없는 것처럼 나도 몸속에 있으면서도 더러움에 물드는 일이 없다. 씨앗이 없으면 열매가 생기지 않듯이 윤회 생존의 씨앗인 혼미(무지)가 없기 때문에 다시 생기는 일이 없다. 나의 본성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허공이 일체 만물 가운데 있는 것처럼 나는 실로 그 허공 속에도 존재하고, 나는 불변하는 부동하며 청정하다. 불로이고 해탈해 있으며 늘 이원성이 없다. 눈도 귀도 촉각도 미각도 언어 기관도 없다. 정신(사고기관)도 갖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生氣가 없기 때문에 나는 행하지 않는다. 지성이 없기 때문에 인식 주체도 아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지식도 무지도 없다. 나는 오로지 순수정신만의 빛을 갖고 있으며 육신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마음의 혼란이 없고 따라서 나에게는 정신집중(삼매)도 없다. 마음의 혼란도 정신집중도 변화하는 정신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만물 가운데 나와는 별개의 그 어떠한 인식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업의 감독자이고 목격자이고 관찰자이며 영원하며, 속성이 없으며 이원성이 없다. 또한 영원하고 청정하고 무한하고 독존한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며 그 둘의 조합(곧 몸)도 아니다. 나는 보는 것(순수정신)인 나는 영원한 빛과 같아서 밤도 낮도 밤낮의 경계선인 여명(황혼)도 없다. (아트만)가 각자 자기 자신의 몸속에 있는 줄 알면 그 사람은 해탈하여 부동의 聖仙이 될 것이다. 아트만은 객체인 그 몸을 보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꿈 속에서 보고 있는 사람은 이전에도 그 대상의 형상을 띤 지성을 본적이 있음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보는 것(아트만)이 인식 주체라는 것은 지성이 그 대상의 형태를 띠고 나타날 때 보는 것이 그 지성에 편만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신이 아트만을 상기한다는 인식도 실은 무지라는 원인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트만은 행위 주체도 대상도 결과도 아니다. 안팎을 포함한다. 아트만을 라는 인식 주체로 알지 말라. 속성이 없기 때문에 부분을 갖지 않는다. 행동기관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어떠한 행위를 하겠는가? 정신이 없는데 무엇을 사고하겠는가? 또한 시공간 방향 원인을 갖지 않기 때문에 아트만에 관해서 명상하는 것은 결코 시간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몸과 지성(지식, 욕망, 노력, 변화...)이 다른 것에 의해서 인식되는 대상(이 세상에서는 인식의 대상이 된다.)이기 때문에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아트만은 부정 不淨을 야기시키는 뭇 행위를 초월하고 완전무구하고 일체 만물에 편만하고 속박 당하는 일이 없고 이원성이 없기 때문이다. 몸과 정신은 보는 것(순수정신)과는 별개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보는 것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몸이 없는 자(아트만)가 되는 것은 행위에 의해서 얻을 수 없다. 빛은 사물을 비추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비추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트만은 보는 자이므로 인식 대상이 되는 일은 없다. 무릇 어떤 것도 그 자신이 지닌 속성의 대상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불은 자기 자신을 태울수도 비출수도 없듯이 변화하는 것은 언어를 통해 파악된다. 즉 변화하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변화가 있으면 반드시 소멸하기 때문이다. 아트만은 불변성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에 상태의 변화가 없다. 즉 영원하다. 영원한 것만이 가치가 있다. 아트만은 본성상 이미 획득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에 의거해서 아트만을 획득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즉 브라흐만이다. 아트만 이외의 그 모두가 실재하지 않는다. 환영으로서의 세상은 영원한 실재의 관점에서 보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지만 현상적 관점에서 보면 또한 있는 것이기도 한다. 모든 것은 무지(마야)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해탈은 행위를 통해 성취될 수 있는 결과가 아니다. 이미 항상 성취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이나 지식은 자신의 대상 영역에 적용되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의 대상 영역이 아닌 것에는 적용되는 일이 없다. 그대는 순수 존재 그 자체이다. 해탈을 구하는 자는 제식이나 그 수단을 모두 버려야 한다. 고통, 탐욕, 혐오, 욕망, 슬픔(마음속에 있다. 대상인 몸의 속성이지 아트만의 속성은 아니다.) 등은 지각 대상이며 장소가 있고 통각 기능을 의지처로 삼는다. 그러므로 인식 주체는 항상 청정하며 공포가 없다. 나는 육체가 아니기 때문에 어떠한 소리나 맛, 감촉, 색깔, 형태도 나에게 손실이나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다.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어떠한 것도 갖고 있지 않으며 소멸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아트만이 아닌 것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은 대상을 의미한다. 대상은 이름의 의미이다. 이름은 어떠한 정의에 의해서도 더 이상 해부될 수 없다.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이다. 모든 철학은 언어비판이다. 철학의 목적은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말 할 수 없다.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무시간성으로 이해된다면 현재에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시야가 한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다.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삶은 현재의 삶과 똑같이 수수께끼 같다. 시공간 속에 있는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은 시공간 밖에 놓여 있다.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오직 초자연적인 어떤 것만이 초자연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다. 진리에 이미 머무르고 있는 자만이 진리를 말할 수 있다. 건축은 하나의 몸짓이다.

    육신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 속에 육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라. 영혼은 크고 육신은 작다.

    우리의 불안은 미래를 상상하는 우리의 능력에 기인한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것. 그것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줄이는 것이다.

    범주는 특정 주어(실체, 존재)에 붙여지는 일반적인 술어(성질, 분석하기 위한 도구 개념)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 또는 세상에 대해 물을 때, 이것에 붙일 수 있는 답은 열 개의 범주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10개의 범주들(정적인 상태);물음의 형태-실체 實體(있는 것, 무엇임),  (얼마만큼),  (어떠함), 관계 關係(어떤 것에 걸림), 장소 場所(어디에, 어느 곳), 시간 時間(언제, 어느 때), 하나의 대답-능동 能動(입힘, 가함), 수동 受動(입음, 당함), 소유 所有(가짐), 자세 姿勢(어떻게 있음)

    범주들은 술어라는 문법적인 뜻을 넘어 사물을 분류하는 근본 개념들이기도 하다. 즉 있는 모든 것(존재)을 분류하는 열 개의 큰 무리이다. 모든 사물을 분류하는 기준이다.

    후범주들(동적인 상태);대립(맞놓음), 반대자(반대되는 것), 먼저,

    같이, 변화, 가짐

    실체;으뜸(제일)실체-바탕

    버금(제이)실체-, 무리

    대립;관계에서의 긍정, 부정

    결여, 가진상태

    어떤 사물이 좋다고 말할 때, 플라톤은 이 사물의 좋음을 좋음()의 이데아를 통해, 다시말해 그 사물이 좋음의 이데아를 나누어 갖기 때문에 좋다고 설명하지만, 이를 거부하는 입장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음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좋다는 단지 갖가지 좋은 것()들에 다양한 범주의 형태로 구분된 채 들어있다고 본다.

     

    풍경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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