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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55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4. 2. 3.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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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55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S2lxzDXc1xo

     

    - YouTube

     

    www.youtube.com

     

    559.

    사랑은 소유가 아니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지치고 짜증난다. 그러나 이해하고 혼자있게 해주면 즉 자유를 주면 사랑은 상대방이 그 자신 또한 그녀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랑은 두 사람을 두 개의 몸을 가진 하나의 영혼으로 만든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각자에게 개체성 individuality과 독특성을 부여한다. 사랑은 그대가 小自我를 버리도록 돕는 동시에 超自我 supreme를 얻도록 도와준다.

    명상은 그대 자신이 되어라. 지금까지 그대는 타인을 즐겁게 하려고 노력해왔다. 이젠 그대 자신을 즐겨라. 명상은 자기자신을 즐기는 것이다. 아무 이유없이 행복과 즐거움을 느껴라. 모든 이유는 외부에서 온다. 관계 안에서는 상대방을 통해 행복이 온다. 조용히 앉아서 그대 자신을 즐기는 것. 즐거움의 진동에 몸을 맡기고 내면의 세계로 날아 드는 것 이것이 명상의 전부다. 그리고 다시 에너지가 흐르고 활력을 찾을 때 다시 관계 속으로 들어가 나누어 주어라. 관계와 명상 이것을 하나의 음악으로 만들어라. 이 둘 사이에 하모니를 창조하라. 사랑과 명상의 기쁨을 누려라. 삶의 모든 것을 누려라. 신은 그대에게 소중한 기회를 주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 이 기회를 놓치는 것이 유일한 죄다.  sin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가 놓치다 missing라는 것을 아는가? 죄라는 단어는 놓침을 의미하는 어원에서 나왔다. 죄는 그대 행위와 아무 상관없다. 죄는 그대가 무엇을 놓치느냐 하는 문제와 상관있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명상을 놓치기 때문에 죄인이고, 승려들은 사랑을 놓치기 때문에 죄인이다. 양쪽 모두 죄인이다. 아무것도 놓치지 말라. 모든 것이 그대의 것이다. 그 권리를 주장하라. 양쪽 날개 모두를 가지는 것은 그대의 타고난 권리다. 한쪽 날개로 어떻게 날 수 있겠는가? 어둠(에고)과 빛()처럼 그대와 신이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 신은 그대가 부재할 때 비로소 현존할 수 있다. 신은 삶이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초월하라. 세상속에 전체적으로 존재하되, 결코 세상에 물들지 말라. 이 역설이 이루어졌을 때, 그대는 집에 당도한 것이다. 모든 사람을 통해 배우되 결코 모방하지는 말라. 그대 자신이 되어라.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그대 자신의 존재와 친숙해지는 것이다. 인간은 양쪽 모두 다이다. 인간은 밧줄이며, 사다리다. 하늘과 땅, 육체와 영혼, 속박과 자유, 윤회와 열반이 만나는 장소다. 똑같은 에너지가 번뇌가 되기도 하고 엑스터시가 되기도 한다. 그대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항상 그와 정반대되는 것을 창조하라.(슬플 때 춤을 추어보라, 분노와 자비, 성욕과 사랑) 그대가 한번이라도 느낀 모든 것은 그대 안의 어딘가에 항상 남아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래서 마찰을 일으키면 분노에서 자비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낮은 것은 높은 것이 부재할 때만 승자 행세를 할 수 있다. 높은 것이 존재할 때 낮은 것은 아무 힘도 갖지 못한다. 섹스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기계적인 성향이 잘못된 것이다. 그대의 성욕이 지성의 빛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 빛이 성욕을 변형시킬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성욕이 아닐 것이다. 섹스가 지성과 연결되면 전혀 새로운 에너지가 창조된다. 그 에너지가 탄트라(확장의 능력)라고 불린다. 섹스는 그대를 수축시키지만 탄트라는 그대를 확장 시킨다. 똑같은 에너지가 변형된 것이다. 탄트라는 더 이상 자기 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이지 않다. 탄트라는 존재계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섹스의 경우, 그대는 큰 대가를 치르고 아주 잠깐 동안의 오르가즘을 얻는다. 그러나 탄트라의 경우 그대는 하루 24시간 내내 오르가즘 속에서 살수 있다. 왜냐하면 그대의 에너지 자체가 오르가즘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한 개인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와 만난다. 나무, , 별을 보아도 오르가즘과 같은 어떤 것이 일어난다. 탄트라가 일어나면 섹스는 사라진다. 섹스가 씨앗이라면 탄트라는 나무다. 씨앗이 죽어 없어지게 하라. 그러면 나무가 태어날 것이다. 섹스의 차원에 머물러 로봇처럼 움직이면 그대는 노예가 된다. 그러나 그대 자신의 주인이 되면 그대는 똑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전혀 다른 눈을 갖게 된다. 예전과 똑같은 세상이 신성해진다. 윤회가 열반이다. 이 세상 자체가 깨달음이다. 즉 필요한 것은 그대 내면의 어리석음을 지혜로, 비각성을 각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깨어있지 못할 때 분노, 성욕, 탐욕, 자만심 등 어리석은 열정의 희생자가 된다. 그러나 예민하게 깨어서 그대 자신의 열정을 주시할 때, 자신의 내면에 일어나는 일들을 주시하고, 자동화된 행동 패턴을 그만둘 때, 주의깊은 의식으로 기계적인 반응들을 관찰하고 기계적인 습관에서 탈피할 때, 이 때 주인의식이 일어난다. 그대의 주인(의식이 깨어난 상태)이 들어오면 모든 열정이 즉각 제자리로 돌아가 정렬한다.

    그대는 어느 곳(종교)에서나 바다를 맛볼 수 있다. 바다는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맛이다.

    자신을 존중할 때 그대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대와 같은 내면의 본질, 진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존중은 신이 그대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을 찬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감사의 표현이다.

    정확하게 중간(중도, 중용, 침착, 침묵, 균형, 초월, 근면, 정결, 순수, 주의깊음)에 존재하는 것이 곧 모든 이원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죄인은 지나치게 악(자괴감)에 빠져있고, 성자는 너무 덕(에고, 교만함)에 사로잡혀 있다.

    하늘은 오염되지 않는다. 어떠한 구름도 하늘에 자취(얼룩)을 남기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그대 안에는 내면의 하늘, 의식의 하늘이 있다. 그 하늘은 정결하다. 그러나 무엇인가 선택한다면 정결함(순수함)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어떤것에 동일시되는 것은 곧 불순해지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죄악이다.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덕이다. 의식적인 것은 깨어있는 것이고 비추어 보는 것이다. 생각을 떠올릴 경우 그대는 과거(경험과 기억)를 끌어 들이는 것이다. 과거를 통해 행동하는 것은 상황에 대한 감응이 아니다. 그것은 반사적이고 기계적인 반응일 뿐 자발적인 행동이 아니다. 내면을 들여다 보라. 마음은 거지지만 영혼은 황제다. 필요한게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이미 주어졌음을 아는 것 이것이 자기자신에 대한 앎이다. 거기엔 보탤 것이 아무것도 없다. 보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이미 완벽하다.

    무엇인가 구하고자 한다면 죽음이 앗아갈 수 없는 진정한 보물을 구하라. 이것이 기준이다. 죽음이 앗아갈 수 있는 것은 가짜 보물이고, 죽음이 앗아갈 수 없는 것만이 진짜 보물이다.

    불이 켜져있는 (각성, 깨어있는 의식) 집은 도둑이 피해간다.

    전체가 부분을 통해 행위하는 것 이것이 덕이다. 이때 그대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행위자가 아니다. 신이 그대를 통해 행한 것이다. 분노나 탐욕은 그림자다. 일단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깨어있음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현존)하는 것이다. 즉 이 순간에 존재하라. 사념의 흐름속에 있지 않는것. 이것이 깨어 있음이다. 모든 죄악은 기계성으로부터 나온다. 지옥이란 그대가 현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낙원이란 현재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깨어있지 않으면 지옥이다.

    만일 그대의 눈에 어떤 여자가 아름답게 보인다면 그것은 단지 그대가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행복한 인간은 성직자와 아무 관계도 맺지 않는다. 결혼제도는 가장 심각한 영적 부조화를 낳는다. 성직자들은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그들의 사업 비결이다.

    두려움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그대가 두려워 하는 것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매우 어리석다. 왜냐하면 모방(흉내)하기 때문이다. 각성, 주의깊음, 깨어 있어야 한다. 소위 도덕성, 정직성, 종교적인 삶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버려라. 의식을 창조하라. 그 의식이 고유의 인격(고정된 것이 아닌 유동적인 현상)을 가져 온다. 스승을 흉내내지 말고 이해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자기만의 고유한 빛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대중은 항상 과거를 지향한다. 소인배(비지성, 권력)는 항상 大人(지성)을 두려워 한다.

    목적은 욕망을 의미한다. 에고는 묵적이라는 받침대가 없으면 서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대는 스스로 계속해서 목적을 만들어 낸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 그대는 자신을 투영하고 가장한다. 그러나 그대는 아무 목적도 없는 존재이다. 존재계가 아름다운 것은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악순환에 빠진다. 목적은 없다. 다만 신의 에너지가 넘쳐 흐를 뿐이다. 그는 사방으로 흘러 넘쳐 온갖 종류의 표현 양식(무생물, , 식물...)이 있을 뿐이다. 즉 표현양식이 다를 뿐 그는 똑같은 실체다. 삶은 사업이 아니다. 삶은 그저 즐거움이고 기쁨이다. 사업에는 목적이 있지만 기쁨에는 목적이 없다. 논리에는 목적이 있지만 사랑에는 목적이 없다.

    이슬 방울이 바다가 되기를 원한다면 단 한 가지 방법은 바다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슬방울은 죽어야 한다. 이슬방울이 죽는 순간 그것은 바다가 된다. 이것이 두려움을 낳는다. 그대는 부분으로 존재할 때만 살아 남을 수 있다. 전체가 되기를 원하는 순간 그대는 사라져야 한다. 그대의 전체성은 그대와 아무 상관이 없다. 전체성 안에서 우리는 모두 사라진다. 가장 기본적이고 근원적인 꿈은 에고라는 꿈 나는 존재한다라는 꿈이다.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신이 있을 뿐이다. 지복은 그대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붓다들에게만, 진리를 아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그러니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 시켜야 한다. 바로 그대가 사라져야 한다. 진정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대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자아는 단편으로만 존재할 수 있고 전체성이 있는 곳에 자아는 없다. 에고는 분명하다. ‘이것은 나다 명확성을 갖는다. 그러나 전체성은 신비롭다.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하다.

     

    풍경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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