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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54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4. 1. 28.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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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54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EXGpkGZ6RBE

     

    - YouTube

     

    www.youtube.com

     

    558.

    =인도;담마 dhamma=그리스;로고스 logos=유태교;토라 torah

    기억은 마음의 흔적(새겨진 기록)이며 발자취이다.

    섹스는 현세적이고 무의식적이고 유형성이다. 이것이 사랑의 가장 낮은 형태다. 사랑의 가장 높은 궁극적 차원은 기도다. 사랑은 어떠한 형상에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하늘로 느낄 때, 이때 전혀 색다른 경험이 떠오를 것이다. 그대의 내면 중에서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어떤 부분이 그것을 느낀다. 그대의 초의식이 그것을 느낀다. 사랑은 표현이 불가능하고 정의할 수 없다. 가장 높은 차원의 사랑이 느껴질 때 그대는 눈물, 웃음 또는 춤을 통해(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수밖에 없다. 궁극적인 단계에서 사랑은 기도마저 초월한다. 이때 사랑은 순수한 침묵이 된다. 더 이상 눈물도 없고 춤도 노래도 없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오직 침묵만 남았다. 기도마저 넘어서면 그곳에 신이 있다. 기도는 사랑이라는 사다리의 마지막 칸이다. 그 칸마저 넘어서면 그곳에 열반이 있고 해탈이 있다. ‘는 결코 깨달을 수 없다. ‘는 장애물이다. 깨달았을 때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 존재하지 않아야만 내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세 가지 층;생각-느낌-존재

    세상의 대상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은 느낄 수는 있지만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깨달음에 관해서는 느낌조차 불가능하다. 깨달음은 느낌을 초월한다. 사랑이 생각을 초월하듯이, 깨달음은 느낌을 초월한다. 그대는 다만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깨달음을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깨달음은 그저 거기에 있다. 그냥 그렇게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일어났거나 일어날 일이 아니다. 깨달음은 그대의 본성 자체다. 그 본성의 주변에 그대가 긁어 모아둔 온갖 쓰레기를 버려라. 그것이 전부다.

    부분은 전체보다 못하지 않다. 부분 안에는 전체의 모든 특성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양적으로는 전체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양은 문제가 안된다. 중요한 것은 질이다. 질적으로 볼 때 그대는 지금 그대로 완벽하다. 그대들 모두가 신이다. 만일 그대가 필요하지 않다면 신이 왜 그대를 창조했겠는가? 그대가 이루어야 할 목적이 있는 것이다.

    모든 고통은 그대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이 동일시는 그대의 판단이다. 그대가 이 동일시에서 벗어나면 고통은 사라진다.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서 온갖 고통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꿈을 밤마다 꾼다. 휴식도 없이. 꿈이 멈추는 시간은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고 그대는 또 다시 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모든 고통이 그대 스스로 만들어 낸 꿈일 뿐이다.

    육체는 내가 아니다. 육체는 나와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다. 육체는 어두운 계곡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으며, 나는 언덕 위에서 주시하는 자다. 둘 사이엔 아득한 거리가 있다.

    신은 지복, 축복, 엑스터시, 은총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신은 고통스러울 수 없다. 신은 사치다난다. satchitananda 즉 진리고 의식이며 지복이다. 그대는 신의 부분이며, 부분은 전체와 동일하다. 부분이 고통 받으면 전체도 고통 받을 것이다. 그런데 고통받을 자가 누구인가? 고통받을 자가 없다. 그대는 꿈을 꾸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그릇된 해석으로 오해하고 있다.

    지성(자연, )은 어느 한 부분에 대립되는 다른 부분을 마련한다. 이것이 지성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즉 변증법(正反合)적 과정을 통해 작용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 없다면 탄생도 없을 것이다. 빛과 어둠, 사랑과 미움, 남자와 여자, 아름다움과 추함, 성공과 실패, 통증과 쾌락, 고통과 지복, 질병과 건강은 함께 공존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그들 모두가 자연의 일부다. 일단 이것을 이해하면 초월이 일어난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서로 대립되는 양극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양극은 상호 보완적이다. 양극은 이 세상을 더 풍요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대립되는 양극은 삶에 긴장을 주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기쁨이 있다.

    부분은 목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전체는 아무 목적이 없다. 우주는 아무 목적이 없다. 우주는 순수한 축제며 기쁨이다.(릴라 leela) 우주는 하나의 놀이다. 놀이에는 아무 목적이 없다. 목적을 갖게 되는 순간 그것은 놀이 play가 아니라 게임 game이 된다. 그것은 은총(, 종교)의 세계에서 중력(필연, 원인과 결과, 과학)의 세계로 추락했다. 붓다가 되지 못하는 한 그대는 기계다. 붓다는 신의 힘이 발휘되는 매개체일 뿐이다. 그는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전체를 대표하는 도구로서 기능할 뿐이다. 그는 전적으로 자유롭고 기쁨에 넘친다. 그는 시공을 초월하고 경계선을 모른다. 그는 무한하다. 깨어있는 의식을 갖고 행한다. 무의식적(물질)이라면 그것은 그릇된 일이며 숭고한 동기마저 천박한 것이 된다.

    충성, 의무, 규율, 복종 조국, 교회, 사원 이런 거창한 단어들을 항상 조심하라. 이런 단어들은 그대를 무의식 상태로 몰고가서(더 큰 조직체계에 귀속시켜) 로봇처럼 움직이게 한다. 복종이나 불복종이나 깨어있는 의식상태에서 행동하라.

    진지하라 그러나 심각하지는 말라. 심각함은 가장 假裝되고 억지로 꾸민 것이다. 그러나 진지함은 가슴에서 나온다. 진지함은 그대가 하는 모든 일에 강렬함을 갖고 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스틱 꽃(신앙)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 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원한다. 거짓은 진리보다 더 오래산다. 왜냐하면 거짓은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적응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거짓은 시간의 부분에 속한다. 그러나 진리는 시간에 속하지 않는다. 영원에 속한다. 진리는 시간 안으로 들어오지만 언제나 이방인으로 온다. 시간은 진리를 흡수하지 못한다. 모든 진리는 얼마 안가 조직화(종교) 될 것이다. 그리고 조직화되는 순간 진리는 죽어 버린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장미와 하나가 될 때 그 아름다움을 안다. 관찰자가 관찰의 대상 안으로 사라질 때, 관찰자가 관찰될 때 깊은 친밀감과 교류의 순간이 있다. 시인이 장미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미 안으로 들어갔을 때, 장미가 하나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영혼 속으로 꿰뚫고 들어갔을 때, 그 만남을 통해 이해가 일어난다. 사랑을 하기 전에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는 조건을 단적이 있는가

    ;1.과학적인 방식-관찰자로서 외부에서 지켜보는 것

    2.신비주의적 방식-그 안에 완전히 몰입하고 투신하는 것. 여기엔 용기와 배짱이 필요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용기는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기 위해 이미 아는 세계를 버리는 것이다.

    설득, 논쟁, 주장, 판단, 의심, 논리 모두를 버려라.

    죽은 스승을 찾지 말라

    지복은 행복도 불행도 아니다. 지복은 모든 이원성이 duality 사라진 상태다. 행복도 불행도 없을 때다. 그 침묵과 평온함이 지복이다. 그대의 가슴이 추함(순수)으로 물들어 있다면 그대는 어디를 가든 추함(순수함)을 볼 것이다. 그대는 어디를 가든 그대 자신의 메아리를 듣는다. 세상 어디에서도 죄인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진정한 성자다. 존재계에서 추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사람, 전체가 아름답게 보이는 사람, 이런 사람이 진정한 성자다. 이 존재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전적으로 아름답다. 존재계 전체가 완벽하게 아름다워지는 순간, 그대는 신을 안 것이다. 신은 형상도 없고 이름도 없다. 신은 그저 하나의 現在이다. 그러나 이 현존은 예수처럼 미적인 감수성, 그렇게 깨어있는 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느낄수 있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을 교회, 사원, 모스크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 모두가 헛수고다. 아름다움이 곧 신이다.

    오류가 승리할 때, 그는 물러나 때를 기다린다.

    명상과 사랑, 섹스와 침묵, 홀로있음과 관계맺음, 이름이 다를 뿐 하나다. 한쪽만 선택해서 고통을 받아왔다. 관계를 선택한 사람들은 속인 俗人, 홀로있음을 선택한 사람들은 승려라고 불린다. 그러나 양쪽 다 고통 받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반쪽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쪽이 된다는 것은 곧 불행해지는 것과 같다. 반면 전체가 되는 것은 건강하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곧 완벽해지는 것이다. 반쪽으로 남으면 나머지 반쪽이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켜 불행해진다. 나머지 반쪽은 결코 파괴될 수 없다. 그 부분 또한 그대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계곡이 없으면 산은 존재할 수 없다. 계곡은 산의 일부다. 그들은 상호 보완적이다. 사실 산과 계곡은 하나다. 홀로있음의 산은 관계의 계곡 안에서만 솟아 오른다. 그대는 관계를 즐길수 있을 때만 비로소 홀로있음을 즐길 수 있다. 관계가 홀로있음에 대한 필요성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조화로운 리듬이다.

    감로수도 괴어 있으면 독이 된다. 독물도 흐르기 시작하면 감로수가 된다. 독과 감로수는 똑같은 에너지의 두 가지 상태일 뿐이다. 흐르면 감로수가 되고 얼어 붙으면 독이 된다. 에너지(승려)가 흘러나갈 출구가 없으면 그 에너지는 변질되고 부패한다. 속인들의 삶은 침묵이 없는 음악과 같다. 그저 소음일 뿐이다. 훌륭한 음악은 소리와 침묵 사이의 종합이다. 이 종합이 위대할수록 음악은 그만큼 깊어진다. 그러면 그대 안에 무엇인가 전체적이고 통합적인 것이 일어난다. 그대는 중심과 뿌리를 갖게 된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만난다. 그들은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다. 몸과 영혼이 만나 하나로 녹아든다. 그 사이의 경계선이 사라진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순간, 신비적인 통합의 순간이다. 그러므로 종합을 이루어내야 하는 문제는 없다. 애시당초 그들을 나누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다만 그들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선택하지 말고 양쪽 모두를 살라! 선택없는 각성의 상태를 유지하라. 양극단을 모두 보아라. 삶의 모든 차원을 받아들여라. 온갖 관계속에서도 홀로되는 법을 알라. 무엇인가 잃어버릴까봐(무엇인가 매달릴 수 있는 것, 희망) 집착하지 말라. 홀로있음은 외로움으로 변질된다. 온갖 상상()을 하며 충만한 에너지를 감당 못한다.

     

    풍경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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