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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51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4. 1. 7.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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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51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V-wN8wWunjs

     

    555.

    인간은 아주 작지만 하늘보다 더 거대한 존재다. 하늘에는 어딘가 끝이 있겠지만 인간의 탐구(정신)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원한 순례여행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마음이야말로 모든 세상을 만들어내는 원인(씨앗)이다.

    이 세상은 꿈이다.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대가 생각하는 세상은 꿈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대는 소를 잃은 적이 없다. 소는 바로 그대 자신이기 때문이다. 소는 그대의 에너지이며 삶 자체다. 소는 그대를 살아있게 만드는 역동적인 원리다. 결코 소를 잃은 적이 없다. 그러니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 우주 만물이 자기이다.

    추종(집착, 두려움, 탐구하지 않음, 판단 공포증, 유신론 무신론의 이데올로기)은 이해가 아니다. 이해할 때 그대는 불교도가 아니라 붓다가 된다. 이해할 때 그대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된다.

    구도의 길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며 홀로 있음이다.

    삶을 신뢰하라! 강둑의 죽은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거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싸우지 말라. 경전과 이념, 도그마에 매달리지 말라. 삶이 유일한 경전이다. 삶이 단 하나의 성경이다. 삶의 강물이 그대를 궁극의 바다로 데려가도록 허용하라.

    ?’라는 질문은 마음의 질병이다. 삶을 즐겨라. 질문을 떠올리기 보다는 그저 존재하라. 질문을 멈추는 순간 해답이 나타난다.

    존재에 대한 의문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경전을 뒤적일 필요도 없다.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아는 것은 진정한 앎이 아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사념은 중간에 끼어든 훼방꾼이다. 그 사이의 틈이 그대의 진정한 본성이다. 사념은 오고가는 것이지만 그대 안의 빈 공간은 항상 거기에 있다. 그 공간이 배경이고, 사념은 그 배경 위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창조성은 사랑과 관심에서 나온다. 창조성은 넘치는 열정과 생명력,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무관심은 삶에 대한 부정이며 도피이며 자살행위이다. 동요하지 않는 것이 삶의 핵심은 아니다. 무관심이 종교적인 길로 착각하지 말라. 삶에서 도망치지 말라. 무관심은 그저 식물인간 처럼 살아가면서 자신들이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 진정한 성취란 언제나 긍정적이며 창조적이다. 무관심한 태도로 어떻게 신과 만날 수 있겠는가? 신은 무관심하지 않다. 그는 작은 풀잎 하나에도 지극한 관심을 기울인다. 우주 전체는 사랑으로 충만하다. 우주와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면 그대는 사랑해야 한다. 무관심은 점진적인 자살이다. 깊은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라. 그 사랑 안에서 그대 자신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라. 그러면 그대는 순수하게 창조적인 에너지가 된다. 창조성이 곧 기도이며 명상이다. 창조성이 삶이다. 그러니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 자신을 무관심의 틀 속에 가두지 말라. 그것은 그대를 둔감해지고 무디게 만든다. 움직여라. 무슨 일을 하든 지극한 사랑으로 하라. 그러면 그 행위 자체가 창조적이고 신성해진다. 무슨 일이건 완전히 몰입하면 그대는 밖이 아니라 그 행위 안으로 들어간다. 그 행위가 하나의 위대한 성취가 된다. 가장 미미한 것도 진아와 떨어져 있지 않다.

    실제적인 여자보다 사진속의 여자(시뮬라크르)에 더 관심이 있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음식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실제 음식이 필요하다. 형상(거울;다른 사람의 생각)에 이끌리지 말고 실체(진아)에 관심을 가져라. 그대의 기억 속에 저장된 장미꽃은 실재가 아니다. 그대가 꿈꾸는 장미꽃 또한 실재가 아니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 그대 앞에 있는 장미만이 실체이다. 바로 지금 여기!

    마음은 내면의 대중이다. 대중은 그대 안에 통제본부를 건설해 놓고 그 곳에서 그대를 조종한다.

    집중은 의식을 협소하게 만든 상태로 소를 발견할 수 없다. 즉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아주 둔감해진다. 집중을 통해 도피할 수 있다. 그대는 수많은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어느 한 가지에 전념할 수 있다. 그러나 명상 속에서는 어느 것에도 초점을 맞추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 아무 대상에도 집중하지 않는다. 집중에는 대상이 있지만 명상에는 대상이 없다. 이 선택없는 각성을 통해 마음이 사라진다. 의식이 광활하게 열려있는 상태에서 마음은 생존하지 못한다. 마음은 오로지 선택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마음이 좁은 터널을 통해 흘러가는 상태라면 명상은 넓디넓은 하늘 아래 서있는 것과 같다. 모든 것에 대해 열려있는 상태이다.

    소는 우주 전체의 에너지이다. 그대는 이 에너지의 부분이다. 생동감있고 예민하게 깨어 있다면 이 전체를 느낄수 있다.

    수행이란 더 민감하게 되는 길을 뜻한다. 다른 종교는 무감각해지라고 가르치지만 더 강렬한 삶을 살아라. 결국 신은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사는 것이 신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세상을 버리지 말고 꿈을 버려라. 오직 그대가 실제로 갖지 않은 것을 포기하라. 그대의 꿈을 포기하라. 그러면 실체가 드러난다. 그것은 마음을 포기하는 것이고 마음의 산물인 생각과 상상을 포기하는 것이다.

    마음의 재료가 기억과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 마음은 과거이다.

    ()를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대는 독립적으로 존재 불가능하다. 그런데 어떻게 를 주장할 수 있는가? 나를 버려라 하고 말하는 것은 이 가 실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터무니없는 상상이며, 아무 근거도 없는 개념일 뿐이며, 꿈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나를 버려라가 아니라, 깨어 있으라! 의 부재를 자각하라. 또한 에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깨어남 자체가 꿈을 떨쳐낸다. 따로 꿈을 떨쳐내야 할 필요가 없다. 이해가 떠오르는 순간 에고가 사라진다. 이것은 동시적인 현상이다. 이해의 차원에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해가 떠오르면 그대는 사라진다. 그대는 마치 에고라는 것이 따로 있고, 그 에고는 그대가 버려야 할 무엇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스꽝스러운 착각일 뿐이다.

    내면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들은 그곳에서 마음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것은 횃불을 주면서 방에 들어 가 어둠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어둠은 빛의 부재 현상이다. 마찬가지로 에고는 자각의 부재현상이다. 각성의 빛이 찾아오면 돌연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항상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마음은 언제나 속죄양을 발견한다. 이것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마음의 장난이다.

    행복은 미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행복은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은 삶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이다.

    신앙은 진리가 아니다. 배고픈 사람이 요리 책을 믿는 것과 같다. 진실한 구도자(신뢰로 충만한 사람)는 어떤 신앙도 추구하지 않는다. 그저 신뢰할 뿐이다. 그는 이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안다. 그는 자기 자신 안에 왕국이 그리고 보물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삶은 매우 비논리적이자. 자각만 있으면 안된다. 수양도 필요하다. 자각만 하면 정상에 도달할 수 없고 수양만 하면 로봇만 된다. 그대의 세상은 그대가 창조한 것이다. 그대는 곧 그대의 세상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잘못되었다면 잘못된 세상이 창조될 수 밖에 없다. 그대 자신의 세계가 투영되는 것이다. 그러니 바깥 세상을 탓하지 말라. 그대가 어떤 세상에 속해있건 그대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모든게 그대의 책임이다. 바깥세상이란 그대의 마음이 확대된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행위는 문제가 안된다. 문제는 바로 그대가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이다. 진리는 그대가 무엇을 하느냐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대의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그대가 그릇됐다면 그대의 행위 모두가 그릇된다. 겉으로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이 그대의 모든 행위가 틀린 것이다. 즉 그대가 옳지 않다면 절대로 옳은 행위를 할 수 없고 그대가 옳다면 그릇된 행위를 할 수 없다. 겉으로 어떻게 보이든 문제가 안된다.

    동양의 방식은 존재 being에 기반하는데 반해 서양의 방식은 행위 doing에 기반한다.

    원인은 세상에 있지 않다. 그대 자신이 원인이다. 그러니 세상을 탓하지 말라.  이 세상은 환영(마야)이다라고 말하지 말라. 세상은 마야가 아니다. 환상이 아니라 그대 주변에 마야를 창조하는 것은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길에 아무도 지나가지 않으면 다이아몬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단 한 사람이라도 지나가면 그 돌이 그의 마음 속에 들어가 다이아몬드가 된다. 다이아몬드라는 가치는 인간의 마음이 부여한 것이다. 다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스크린으로 작용한다. 차이점은 인간의 마음에 의해 생겨난다. 분류는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찬양이나 비난도 마찬가지다. 일단 마음이 사라지면 모든 사물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된다. 어떤 가치관 판단도 일어나지 않는다.

    욕망이나 분노를 억압하지 말라. 이해하고 자각하고 관찰하라. 비난하지 말고 중립을 지키고, 선입견(나쁘다는)을 버려라. 돈을 더럽게 본다는 것은 그대 안에 강한 소유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돈은 유용한 수단이다. 돈을 사용하되 돈에 의해 이용당하지만 말라. 억압은 도움이 안된다.

    내면의 목소리는 음성이 아니다. 그것은 침묵이다. 무엇인가 보여주기는 하지만 말해주지는 않는다. 모든 음성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덕은 침묵의 부산물이지 훈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각성의 빛 뒤에는 그림자처럼 덕이 뒤따른다.

     

    어느 꽃집에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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