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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47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12. 4.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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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47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i2yxYdtIfwM

     

    551.

    우주가 진아로서 인식되면 실체지만 진아와 분리되어서 인식되면 실체가 아니다. 그래서 환상과 실체가 하나이다. 현상계는 환상이 아니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환상이라고 말해야 자신의 시각을 내면으로 돌릴 수 있다. 글씨가 쓰여있건 않건, 종이는 존재한다. 그러나 글씨를 실체로 보는 사람에게는 글씨는 종이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실체가 아니고 환상이라고 말해줘야 한다. 현명한 사람은 종이와 글씨, 즉 브라흐만과 우주를 하나로 본다.

    연기에 의해 불꽃이 가리워지듯 이름과 형태의 집합체, 곧 현상계에 의해서 빛나는 의식의 빛이 가리워진다. 마음이 밝아지면 현상계의 본질은 환상이 아니라 실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깸과 꿈 모두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인데 마음이 실체를 의심하도록 그냥 놔두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을 내면으로 돌리면 현상계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의식은 언제나 자아의식이다. 비자아 의식이란 실체일 수 없다. 실체는 실제-의식이다. 현상계는 스스로 존재하지도 존재를 의식하지도 못한다. 또한 현상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런 현상계가 실체일 수는 없다.

    나로 하여금 그 나가 다른 것들과 다르다고 믿게 만드는 것은 의식의 빛이 반사된 빛이다. 이것이 또 나로 하여금 대상을 만들어 내도록 한다. 이러한 반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사를 일으키는 반사면이 있어야 한다. 진아를 깨달으면 그대는 반사도 반사면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똑같은 하나로서 의식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상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영역과 지각할 수 있는 빛이 필요한데, 이 둘은 동시에 나타난다. 따라서 현상계와 현상계에 대한 지각은 진아로부터 방출되어 반사되는 마음의 빛에 의존한다. 현상계라는 화면도 무지라는(스크린처럼) 어둠 속에서 반사되는 진아의 빛에 의해서만 지각할 수 있다. 삼매에서 처럼 진아의 빛으로 완전히 밝아진 상태에서는 현상계를 전혀 볼 수가 없다.

    탄생과 죽음이 실재한다는 환상을 만들어 내고 계속 유지하는 것은 바로 마음이며, 이는 깨달음에 의해서 완전히 사라진다.

    업이 남아 있는 사람의 개체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유 의지는 개체성과 연관된 영역에서만 작용한다. 즉 개체성이 지속되는 동안만 존재한다. 개체성이 사라져야 고통이 사라진다. 좋고 나쁜 행위를 일으키는 것은 에고이기 때문에 그대는 즐거움과 고통이 그대의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것들은 에고에게 맡기고 그대 자신에게는 고통을 부과하지 말라. 먼저 그대 자신을 보고 그리고 나서 현상계 전체가 진아임을 보라. 그대가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 하고 있는 한은 현상계가 외면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대가 진아가 되면 현상계는 브라흐만으로 나타난다.

    결국 생각일 뿐이지만, 옳고 그름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말고 대신 생각을 없애라. 그대가 진정 옳음에 안주할 때, 그 옳음이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達磨-慧可-僧璨-道信-弘忍-慧能

    性相一如, 定慧不二, 法佛一如, 生佛一體, 道俗不二

    좌선이 아닌 見性, 自性이 즉시 卽是眞佛

    홍인:1.신수-점오(북종) 2.혜능-돈오(남종)

    혜능:1.남악회양 南嶽懷讓-馬祖 2.청원행사 靑原行思-石頭

    참된 도를 보고자 하면, 행이 바름이여, 이것이 도다.

    복을 구하기 위해 하는 것은 공덕이 될 수 없다. 공덕은 법신(自性) 중에 있는 것이지 복을 닦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성품을 보는 것이 공, 항상 본성을 보는 것이 공덕이 된다. 안으로 마음이 겸양하여 낮추면 이것이 공이요. 밖으로 예를 행하면 이것이 덕이다. 스스로 성품을 닦는 것이 공이요.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덕이다. 공덕이란 자성 안에서 볼 것이요. 보시나 공양 올리는데서 구할 바가 아니다.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 땅에 나기를 구하나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한다.

    범부들은 자기 몸 가운데에 정토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깨달은 사람은 있는 곳마다 다 한 가지로 안락하다.

    항상 평등하고 곧게 행동하라.

    깨치고자한다면 자기 성품을 향하여 지을 것이요. 몸 밖을 향하여 구하지 말라. 마음이 청정하면 자성이 곧 서방극락이다.

    정혜는 일체, 정은 혜의 체요, 혜는 정의 용

    정혜: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고 통일시켜 산란하지 않은 정신작용. 또는 그러한 상태를 (삼마제 三摩提 또는 選定)이라 하며 혜(프라쥬나)는 사물의 도리를 인식, 추리, 판단하는 정신작용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각을 끊어서 마음을 한 대상에 집중하고 여기에서 나는 바른 지혜로서 대상을 보는 것을 정혜 또는 止觀이라 한다. 또한 본연적이며 절대적인 자성(진여성)의 본체성의 상태를 정, 그 작용을 혜라 보고 그 나눌 수 없는 관계를 말한다.

    정은 단순히 집중이 아니다.

    라함은 두 가지 상 二相이 없는 것이니 모든 번거로운 망상이 없는 것이요. 이라함은 眞如本性을 생각함이니 진여는 곧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곧 진여의 작용이니라.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킴이요. 눈이나 코 귀 혀가 능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니 진여에 성품이 있으므로 생각이 일어날 수 있거니와 만약 진여가 없다면 눈이나 귀나 빛깔이나 소리가 당장에 없어지리라. 진여 자성이 생각을 일으킴으로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앎이 있더라도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아니하며 진성이 항상 자재하니라. 이 까닭에 능히 모든 법상을 밝게 분별하나 제일의에 있어서는 동함이 없다.

    밖으로 일체 선악 경계를 당하여도 心念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 되며 안으로 자성이 원래 동함이 없음을 보는 것이 이 된다.

    을 여의면 이 되고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이 된다.

    본성이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에 있는 것이니 모든 경계를 보아도 마음이 어지럽지 않으면 이것이 참된 이다.

    五分法身香;1.戒香 2.定香 3.慧香 4.解脫香 5.解脫知見香

    衆生;마음 가운데 중생이니 삿되고 미혹한 마음, 속이고 망령된 마음, 착하지 않은 마음, 질투심, 모질고 독한 마음 등 이러한 마음이 모두 다 중생이니 모름지기 자성으로 스스로 제도하라.

    삼보(三歸依戒);(깨달음, , 二足尊), (바름 , 離欲尊), (청정, , 衆中尊)

    다른 부처님께 귀의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다.

    스스로 자심삼보(자성삼보-귀의불양족존, 귀의법이욕존, 귀의승중중존)에 귀의하여 안으로 심성을 고르게 하고 밖으로 다른 사람을 공경하면 이것이 스스로 귀의하는 것이다.

    생각마다 자성(본성)을 보라.

    복만 닦고 도를 닦지 않으면 후세에 복을 받고 죄는 남는다.

    깨달음이란 자성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구족하는 것이다.

    장좌불와 등으로 부동선정을 닦는다면 이것은 무정물(木石 따위, 유정은 중생)을 흉내 내는 것. 유정은 동하는데 특색이 있으니 동 가운데 부동을 알라. 부동이라는 말에 집착하지 말라. 만약 참 부동을 찾으려면 움직임 그 위에 부동이 있음을 알라. 움직이지 않음이 부동이 아니다. 내 마음에 스스로 불이 있나니 이 自佛이 참부처이니라. 만약 자기에게 불심이 없다면 어디에서 참부처를 구할 것인가. 너희들의 자심이 바로 불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밖으로는 결코 한 물건도 세울 것이 없으니 만 가지 법은 모두 다 본심이 내는 것이니라.

    법신, 보신, 화신 삼신은 본래 한 몸이다.

    자성(진여=참부처)은 아니보고 부처 찾고자 마음을 일으킴은 모두가 치인 痴人이다.

    우리 내면의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도 산처럼 거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은 먼지 알갱이에 불과하다. 그 하찮은 장애물 하나가 우리로 하여금 삶의 모든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바다가 아무리 큰 소리로 부른다 해도 귀가 없는 사람은 듣지 못할 것이다.

    사원, 교회, 모스크 그들은 기껏해야 신을 믿을 뿐이지 직접 알지는 못한다. 그리고 믿음은 끝없는 말장난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것이다.

    모든 씨앗은 나무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모든 씨앗이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모든 종교는 숭배의식과 더불어 그 생명이 끝난다.

    수영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다만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불과하다. 수영을 아는 사람은 그것이 전혀 새로운 분야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신을 아는 사람은 그 경험이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우리가 새롭게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계장치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삶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대 안의 생명 에너지(센터, 쿤달리니, shakti, kunda, atman)가 깨어나면 지금의 그대가 죽고 전혀 다른 인간이 태어날 것이다. 전에는 존재한 적도 없는 인간이 태어날 것이다.

    우주는 에너지의 팽창이다. 그리고 생명은 그 에너지가 결정화 結晶化 된 것이다. 우주의 모든 것은 똑같은 에너지가 각양각색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주 전체가 곧 우리의 몸이다. 생명의 센터 또한 모든 곳에 있다.

    명상이란 우리 안에 정체되어 있는 에너지를 해방시켜 흐르게 하는 방법이다.

     

    국화 전시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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