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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44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11. 5.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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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44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avtBjbg0wMM

     

    548.

    관찰자는 기억이다. 분리된 자기, 내면의 관찰자는 전적으로 기억의 구성물(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면 모두 과거의 기억(과거에 보았거나 느꼈거나 좋아하거나...)을 탐색할 것이다. 당신이 자신에 관해 파악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붙잡고 있는 기억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과거가 현재와 일체가 되면 관찰자로서의 자신도 현재와 일체가 된다. 따라서 모든 기억을 현재 경험으로 본다는 것은 현재 순간의 경계를 붕괴하는 것이며, 현재 순간을 환상적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과거 대 미래라는 대립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앞 뒤 어디에도 시간이란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렇게 해서 무시간적 현재 이외에 달리 서 있을 곳이 없게 되어, 영원 이외에 달리 있을 곳이 없게 된다.

    하나님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진정한 자기이다.

    자신의 근본적인 자기가 곧 우주의 자기

    오직 부분만이 죽음을 맞는다. 전체는 결코 죽지 않는다.

    탄생이란 과거를 갖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죽음이란 미래를 갖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지금 이 현재 순간에는 어떤 과거도 그리고 어떤 미래도 동시에 모두 없다. 즉 탄생과 죽음은 이 순간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바로 이 순간에는 결코 과거를 발견할 수 없으며 미래를 볼 수 없다. 돌연히 존재하고 동시에 사라진다. 따라서 바로 이 현재는 대립의 일치, 탄생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의 통일이다. 모든 순간이 마지막 순간이고 모든 순간이 곧 부활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미래를 찾아 나서도록 해서 강렬한 시간 감각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시간이란 환상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환상을 제외하곤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 환상에 대한 인상일 뿐이다. 우리는 죽음이란 환상을 내쫓기 위해 시간이란 환상을 사용한다. 따라서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근원인 시간은 상상된 구원의 원천이 된다.

    상징 symbols, 개념 concept, 관념 ideas, 자아 ego-분리된 몸과 영혼, 유기체는 통일성을 포기, 전유기체와의 접촉 상실, 육체를 경시 욕망(영생)만 키운다.

    제일 먼저 환경, 그 다음으로 신체, 그런 다음 그림자가 저 밖에 존재하는 비자기로, 이질적인 적으로 보이게 된다. 모든 경계선은 전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밖에 있는 대상들 모두는 단지 자신의 투사에 불과하다. 그 모든 것들은 자기의 측면으로 재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접촉하는 것 모두가 그 핵심에 있어서는 자신의 진정한 자기의 본래 면목이라는 것을 명심하면서, 경계를 일소하여 우리의 그림자, , 세계와 다시 한번 접촉할 수 있도록 시도해 보자

    특정 경계를 구축하는 것은 특정한 투사를 만들어낸다. 저 밖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던 투사가 실은 자신의 반영이자 자기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자기와 비자기 사이의 그 특정 경계를 제거한 셈이 된다.

    끊임없이 의무감을 느끼는 것은 자신이 하고 싶어한다고 받아들이지 않은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하나의 신호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관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하기 때문이다. 능동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거부한다고 느끼는 사람은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자신의 경향성을 철저하게 모르고 있는 사람이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불쾌하더라도 증상(우울, 불안, 권태, 공포, 공격...)에 저항하거나 혐오하거나 회피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증상들 자체가 증상해소의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증상과 싸우는 것은 단지 그 증상 속에 내포된 그림자와 싸우는 것일 뿐이며, 이런 싸움이야말로 바로 문제를 일으킨 최초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치료는 증상들을 받아들이고 여유를 갖는 것이며 그 증상들과 친해지는 것이다. 즉 수용, 허용하라. 모든 증상이 단지 무의식적인 그림자 경향성의 신호(또는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는데 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투쟁이 실은 자신과 자신의 투사와의 투쟁이다. 자신의 증상들은 환경이 자신에 대해 행사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어하는 것의 과장된 대치이고,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을 혼란케 하는 원인은 다른 사람들이나 사건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스스로를 당황케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스스로가 자신의 증상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최초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안도감을 줄 것이다. 나는 내 머리이고 나는 내 신체를 소유하고 있다가 아니라 신체와 자아의 통합이야말로 어느 한쪽보다 더 심층적인 실재이다. 마음과 신체는 둘로 나뉘어져 있지 않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런 일(경직, 긴장)이 발생하면, 즉 생기 있는 호흡과 에너지의 자유로운 흐름을 막기 위해 그 주변 부위를 경직시키고 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특정 신체 부위는 특정 감정을 발산한다. 따라서 신체의 특정 부위에 어떤 블록이 있을 경우, 그에 해당하는 감정이 억제되어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러한 블록은 모두 근육에서 일어난다. 그런 블록은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자신이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블록은 전적으로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자신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블록을(근육, 경직) 제거하거나 완화시킬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능동적으로 블록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근육을 이완 시키기 보다는 역으로 생각하라. 즉 그 긴장을 고의적으로 증가(근육 긴장) 시켜 의식화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이다. 즐거움이 결핍되어 있다고 느끼며, 외부에서 채우려고 하는데 행복과 즐거움을 밖에서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환상을 강화 시킬 뿐이다. 이 환상은 그 자체가 즐거움을 방해하는 원천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자신의 기쁨을 방해하는 바로 그것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에너지란 영원한 기쁨이며 그것은 신체에서 온다. 이 기쁨은 내면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心身 情緖(정서)의 통합이야말로 고차적인 통합, 즉 보다 심층적인 전체성이라는(자기실현, 자율성, 삶의 의미) 기본 가정에 기초해 있다.

    자신의 괴로움을 관찰하거나 주시할 수 있다면, 자신에게는 괴로움이 없음을, 주시된 혼란에서 자유로운 상태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내면에서 고통을 느끼는 그것 자체는 고통을 갖고 있지 않으며, 두려움을 느끼는 그것은 두려움이 없으며, 긴장을 지각하는 그것에는 긴장이 없다. 이러한 상태를 주시하는 것은 그 상태를 초월한 것이다. 그것들을 앞에 놓고 정면에서 보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것들이 뒤에서 습격해 올 염려는 없다.

    無智란 보는 자와 보는 도구의 동일시이다. 생각, 느낌, 감각, 경험에 대한 집착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단지 스스로를 구속하는 또 다른 사슬에 지나지 않는다.

    괴로움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자신이 바로 괴로움이라는 환상만 강화 시킬 뿐이다. 따라서 괴로움에서 도피하려는 노력은 그 괴로움을 영속화 시키는 일에 불과하다.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괴로움 자체가 아니라 그 괴로움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다. 괴로움과 싸우는 대신 초연하라. 동등하게 주시하라. 나는 마음과 몸과 감정을 갖고 있지만 나는 마음과 몸과 감정들이 아니다. 환경 속의 모든 대상을 마치 자기자신을 다루는 것처럼 다루라. 실제로 이러한 자세에는 세계란 사실상 자신의 몸이며 또한 몸으로써 다루어야 한다는 직관이 반영되어 있다. 보편적인 자비란 이러한 초개인적 직관으로부터 샘솟는 것이다. 초개인적 수준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거나 인정해주거나 배려해주거나, 안심시켜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곧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진정한 자기 뿐이며, 그 하나의 자기가 다양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환생이란 자신의 자아가 전생 轉生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유일하게 전생하는 것은 오직 초월적 자기 뿐이다.

    당신은 자신이 아니었던 때를 결코 기억할 수 없다. 당신의 마음, , 느낌 이 모든 것들은 시간과 더불어 변했다. 그러나 무언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당신의 나임이라는 기본적인 내적 느낌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당신의 내면에는 기억이나 생각, 마음, , 경험, 환경, 느낌, 갈등, 감각, 기분이 아닌 무언가 깊은 내면의 나임이라는 감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내면의 나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모든 것들이 변했으며 또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시간의 흐름에 간섭받지 않는 초개인적 주시자이자 초개인적 자기이다. 그리고 무수한 초월적 나임이 실은 하나이다. 만일 당신이 다른 몸을 갖고 있더라도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나임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 모두 느끼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다른 관점, 다른 기억, 다른 느낌이나 감각을 갖고 있는 단일한 나임, 진정한 자기가 있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닐까? 또한 그것은 지금만이 아니라 과거나 미래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임이란 기억이 아니라 기억의 주시자이다. 전 우주에 오직 하나뿐인 그 나는 새로 태어나는 모든 존재에서 깨어나는 똑같은 나, 그것들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내면의 초월적인 나임을 외적이며 개인적인 기억, 마음 그리고 몸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풍경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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