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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43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10. 30.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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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43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7zF2DDj8xsk

     

    547.

    경험자와 경험된 세계 사이의 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발견해 낼 수 없는 것이다. 실은 보는 자, 보는 행위, 보여지는 것은 모두 한 과정의 세 가지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소리를 듣는 자를 들을 수 없는 이유는 듣는 자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듣는 자라고 부르도록 배워온 것은 실제로 다만 듣는 경험 자체일 뿐, 누구도 듣기를 듣지는 않는다. 현실에는 소리의 흐름만이 존재하며, 그 흐름은 주체와 객체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거기에는 그 어떤 경계도 없다. 듣는다고 하는 흐름 자체 이외의 분리된 자기나 듣는 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주관적인 듣는 자를 들으려고 애쓰더라도, 듣게 되는 것은 객관적인 소리들 뿐이다. 이 말은 당신이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그 소리들이라는 의미이다. 듣는 자란 한발 물러서서 듣기를 듣고 있는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그것이 곧 들린 소리 모두이다. 보는 과정도 보고 있는 보는 자를 볼 수 없다. 이것은 보는 자가 없다는 뜻이며 실제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보여진 사물들 뿐이다. 즉 보는 자인 내가 광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인 내가 지금 나타나 있는 모든 광경과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소위 보는 자란 보여진 모든 것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한 그루의 나무를 볼 때 나무라는 하나의 경험과 나무를 본다라는 또 다른 경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엔 단지 나무를 본다는 단일한 경험만이 있을 뿐이다. 냄새 맡기를 냄새 맡거나, 맛 보기를 맛보지 않는 것과 똑같이 나는 보기를 보는 것이 아니다. 경험자를 찾으려 할 경우, 단지 또 다른 경험만을 발견한다. 이와같이 현재 나는 혼란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당신은 동시에 나는 혼란스럽다라고 생각하는 사고자를 인식하지는 않는다. 거기엔 단지 나는 혼란스럽다라는 현재의 생각만이 있을 뿐이다. 결코 현재 생각과 분리된 사고자를 발견할 수 없다. 이는 그 둘이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를 파괴하려고 애쓰지 말고 단지 그것을 찾아보라. 그러면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없음일 뿐이다. 내가 곧 나의 경험이라면, 내가 곧 그렇게 경험된 세계이다. 내가 천둥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천둥소리이다. 나라는 내적 감각과 세계라 부르는 외적감각은 하나이자 동일한 감각이다. 내적 주체와 외적 객체는 하나의 느낌에 대한 두 개의 이름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이미 우주이며, 이미 현재 경험의 전체성이다. 즉 언제나 합일의식이다.

    분리된 자기란 환상이다. 분리된 자기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없애려고 애쓸 필요조차 없다. 결코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있는 것은 고통 뿐, 고통받는 자는 없다. 행위는 있지만, 행위자는 없다. 열반은 있지만, 열반을 구하는 자는 없다. 길은 있지만, 그 길을 가는 자는 없다. 자신의 외부에서 고통을 부과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받는 분리된 자기란 없다는 것을 그대가 깨달을 때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대가 그것이다. 그대의 진정한 자기는 궁극의 에너지와 동일한 것이다. 우주 속의 모든 것들은 그 궁극의 에너지의 현시이다.=-인산알-카밀, 아담 카드몬, 루아흐아도나이, 누스, 정령, 푸르샤, 여래장, 보편자, 성체, 브라흐만-아트만, 즉자성, 법계, , 진여, 최상의 신...

    천국은 네 안에 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에 지배되지 않으며, 주체와 객체를 넘어서 가며, 개인 안에 살지만 그 개인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다. 보는 자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절대 지각자를 보는 것 역시 절대로 불가능하다. 내가 그것을 느낄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느껴진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경험된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보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 진실이다. 왜냐하면 내가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이 곧 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기를 찾아내기 위해 내면으로 들어갈 경우, 발견되는 것은 오직 세계 뿐이다. 내면의 진정한 자기란 실제로는 외부의 현실세계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세계가 곧 나의 몸이며, 보고 있는 내가 곧 보여지는 것이다. 이 말은 합일의식 속에서 무경계의 진정한 영토를 본다는 것이 아니라, 합일의식이 곧 진정한 무경계 영토라는 것이다. 실재는 무경계 각성이며,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진정한 자기이다. 영원히 그리고 언제나 오직 하나이며 동일한 지금만이 존재한다. 현재만이 끝없이 영원한 유일한 것이다.

    시간만큼 장애도 없다. 영원은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에 대한 각성이 아니다. 그 자체가 전적으로 시간밖에 존재하는 각성이다. 즉 무시간적 순간이다. 합일의식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곧 무시간적 순간 속에서 무시간적 순간으로 산다는 것과 같다. 현재 순간이 곧 무시간의 순간이며 무시간의 순간이 곧 영원한 순간이다.(不生不死의 세계) 이 현재 순간에는 시작이 없으며 곧 不生이다.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는 끝이 없으며 끝이 없는 것은 不死이다. 현재는 시작과 끝을 갖고 있지 않은 유일한 것이다. 시간 없는 것이 바로 영원이다. 영원과 현재 경험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은 현재에 사는 사람의 소유물이다. 영원이란 지금 이 현재의 본질이자 무시간적 순간의 본질이다. 영원은 언제나 이미 지금이다. 내일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만이 유일한 실재이다. 거기 또 다른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제에 살면서 끊임없이 내일을 꿈꾼다. 그렇게해서 시간이란 고통스러운 사슬과 진정 있지도 않은 사물이란 유령으로 스스로를 속박한다. 기억과 기대라는 공상의 안개 속에서 에너지를 소모하며, 그렇게 해서 살아있는 현존의 근원적 실재를 박탈하고 허울좋은 현재 즉 단지 1-2초 정도 머무는 영원한 현존의 창백한 그림자, 빈약한 현재로 그것을 전락시킨다. 무시간적 현재 속에 살지 못하는 무능력과 영원의 기쁨 속에 잠기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에, 우리는 빈약한 현재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을 미래가 가져다주길 기대하면서, 그저 무기력한 대용품으로서 시간의 약속을 계속해 추구한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시간의 문제이며 과거의 죄책감과 미래의 불안과 두려움으로 결합되어 있다.

    창가에 핀 장미는 이전의 장미나 더 아름다운 장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들은 존재 그 자체이며 신과 더불어 오늘 존재한다. 그들에겐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 단순히 장미만이 존재할 뿐이다. 장미는 존재의 매순간마다 완전하다. 그러나 인간은 뒤로 미루거나 기억한다. 인간은 현재에 살지 않고 과거를 비탄하거나 미래를 보기 위해 까치발을 한 채 서있다. 인간은 시간 너머 현재 속의 자연과 함께 살 때까지 행복할 수도 강해질 수도 없으리라. 과거와 미래는 잊어버리거나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란 없다. 왜냐하면 과거와 미래란 단지 영원한 지금 위에 덧씌워진 상징적 경계라는 환상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영원이란 끊임없이 지속되는 시간이 아니다. 무시간의 현재이다. 그러나 이 무시간의 현재에 접촉하려고 노력하지 마라. 그러한 노력에는 시간이 필요해지고 주의를 기울일 미래가 필요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지금 이 순간 뿐이다. 다시말해,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게 할 경우, 우리는 뿌리 뽑고자 하는 바로 그것을 강화하는 꼴이 된다. 즉 그것을 파과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시간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시간으로 부수려고 애쓰지만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즉 환상을 깨부수려고 하지 말고 환상을 주의깊게 찾아보라. 만일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간을 부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선 시간을 찾아낼 수 있는가 찾아보라. 우리는 경험된 세계로부터 떨어져 있는 분리된 자기란 없다. 우선 우리는 과연 시간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과거나 미래를 직접 감각해 본적이 있는가? 모든 소리들은 현재의 소리들 뿐이다. 과거의 소리도 미래의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당신이 듣는 유일한 소리는 바로 현재이다. 당신은 과거나 미래를 듣는 것이 아니며 들을 수도 없다.

    모든 소리가 현재의 소리인 것과 똑같이 모든 맛은 오직 현재의 맛이며, 모든 냄새도 현재의 냄새이고, 모든 광경 역시 현재의 광경이다. 과거나 미래의 어떤 것도 만지거나 보거나 느낄 수 없다. 다시말해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각성 속에는 어떤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1초도 안될 만큼 아주 짧더라도 결코 끝나지 않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직접적인 각성은 모두 무시간적인 각성이다. 과거는 기억으로 보증된다. 그러나 과거를 생각할 때 실제로 알고 있는 것 모두는 특정 기억일 뿐이며, 그 기억 자체도 현재 경험이다. 즉 과거에 대한 현재의 흔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속의 현재의 한 부분으로서의 과거를 아는 것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예견이나 기대일 뿐인 미래도 현재 경험의 일부이다. 즉 현재의 사실이다. 모든 시간이 존재하는 순간은 지금만이 있을 뿐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경험하는 것은 영원한 현재이다. 기억으로서의 과거나 예견으로서의 미래는 언제나 현재 경험이다. 이 현재는 단지 실재의 한 조각이 아니다. 반대로 이 지금 안에 세상의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과 함께 우주가 존재한다. 결코 그 시작과 끝을 경험할 수 없다.

    신비가들은 모든 시간을 감싸 안으면 안았지 결코 시간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그들은 전혀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간이 그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지금이 곧 하나의 의식이다. 즉 영원한 지금이 곧 합일의식이다. 그것은 진정한 자기에는 경계가 없다는 인식일 뿐만 아니라 거울이 대상을 포옹하는 것처럼 모든 우주를 포옹한다.

     

    풍경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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