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42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10. 24. 01:53
    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42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KN5-cYj-7Yo

     

    546.

    자기를 육체로 보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모든 고통은 나와 육체를 혼동하기 때문에 생긴다. 몸과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아는 자는 누구인가? 몸과 마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나는 육체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참 자아만이 영원한 존재이며 영원한 지복임을 알라. 이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깨닫기 전까지는 남을 도와야 한다. 그대는 내가 행위자라는 느낌을 갖지 말고 나는 신의 도구라는 마음으로 해야한다. 그 사람 내면에 있는 신을 섬긴다는 자세로 돕도록 하라. 이런 모든 섬김은 그대의 참 자아를 향한 것이다. 결코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을 돕는 것이다. 남에게 주는 것이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모두가 다 자신의 참 자아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든 다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그대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세상이 외적인 대상으로 보이고 세상의 고통이 나타나는 것이지 세상은 결코 외적인 것이 아니다. 실재를 탐구함으로써 비실재를 실재로 느끼는 그릇된 느낌을 극복하라. 세상이나 고통은 다 그대 안에 있다. 그대가 만약 내면으로 눈을 돌린다면 거기에는 고통이 없을 것이다. 먼저 그대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이 세상 전체가 참 자아(브라흐만, )임을 깨달아라. 세상은 깨어있는 상태에서 그대의 마음이 만들어낸 영상이다. 잠을 자는 동안에는 세상이 없다. 그러므로 세상은 실재가 아니라 관념일 뿐이다. 평화는 소란과 혼란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소란과 혼란은 에고, 곧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에 생긴다. 평화로워지기 위해서는 모든 생각에서 벗어나서, 에고가 일어나기 이전의 순수의식에 머물러야 한다. 자신의 평화에 머무는 사람에게는 온 세상에 평화밖에 없다. 옳고 그름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그런 생각을 없애도록 하라. 그대가 늘 옮음에 머물러 있다면, 그 옮음이 세상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수단과 방법이 순수해야 한다. 순수의식은 물질적인 공간에 갇혀 있지 않으며, 만물속에 무한하게 깃들어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유일한 자유는 깨달음을 추구하여 육체와의 동일시에서 벗어나는 자유밖에 없다.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의식이다. 모든 사람들이 불사의 존재다.

    정체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상대와의 경계선을 그었을 때이다. 그러나 경계선은 언제나 변경될 수 있다. 영원하지가 않은 것이다. 정체성의 경계가 전 우주(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로 확장될 때 경계선은 전부 없어진다.(=지고의 정체성, 무경계)

    자연은 절대로 사과하지 않는다.(옳음과 그름이란 대립을 알지 못하기 때문)

    경계를 긋는 것이 대립(갈등)을 만든다. 즉 무언가에 가치를 두면 둘수록 그것의 상실이 두려워진다. 경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은 모든 대립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한 쌍의 대립중 반쪽 전부를 모아 놓은 곳이다. 긍정이란 부정에 기초해서만 규정된다. 밤이 없이는 낮도 알아볼 수 없듯이 부정적인 것을 파괴하는 것은 긍정적인 것을 즐길 수 있는 가능성 모두를 동시에 파괴하는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전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단지 한 사건의 양극, 즉 양쪽 끝이 다르긴 하지만 그 둘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을 나타내주는 단일한 사건일 뿐이다. 이와같이 모든 대립은 암묵적인 동일성을 공유하고 있다. 즉 상호의존적이다. 서로 잘 짜여진 하나의 연속체로 본다. 주체와 객체(시공)도 단일과정에 접근해 가는 단지 두 개의 다른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긍정적인 실재는 대립의 통일(일치)이다. 긍정적인 요소들은 본질적으로 진동한다. 원인과 결과, 과거와 미래, 주체와 객체는 실제로는 단일한 파도의 마루와 골인 단일한 진동이다. 하나의 파도는 그 자체가 단일한 사건이지만 마루와 골, 최고점과 최저점이라는 대립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 둘의 통일 속에서만 발견된다. 모든 대립들은 그 근저에 있는 하나의 활동의 분리 불가능한 측면들이다. 따라서 우주의 개개 요소는 근원적 에너지 또는 활동의 진동하는 밀물과 썰물이다.

    우리는 대비되는 배경과의 관계 없이는 어떤 대상도, 사건도, 형태도 결코 인식할 수 없다. 즐거움과 고통은 각성이란 단일한 파도의 나눌 수 없는 골과 마루에 지나지 않으며, 긍정적인 마루를 강조하고 부정적인 골을 제거하려는 것은 각성이란 파도 자체를 제거하려는 노력과 같다. 대립하는 것을 분리하려고 애쓰면서, 고통없는 쾌락, 죽음없는 생명, 악없는 선과 같은 긍정적이라고 판단한 것에만 집착하게되면, 우리는 전혀 실재없는 형상을 쫓는 꼴이 된다. 따라서 우리의 목표는 너무나 고상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환상이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는 풀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성립되지 않는 난센스이다.

    궁극의 실재는 대립의 통일이다. 즉 궁극의 실재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다.

    선은 나누고 구분하는 만큼이나 똑같이 결합하고 통일시킨다. 반면에 경계는 순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세계에는 선은 있지만 그 어떤 실질적인 경계도 없다. 실재하는 선은 우리가 그 선의 양쪽 편이 분리되어 있고 무관하다고 상상할 경우, 즉 대립된 둘 사이의 외적 차이만 인정하고 내적 통일을 무시할 경우, 그 선은 환상적 경계가 되고만다. 안쪽은 바깥쪽과 공존한다는 점을 망각할 경우, 선은 그저 나누기만 할 뿐 통합시키지 않는다고 상상할 경우, 그 선은 경계가 되고 만다. 선을 긋는 것은 괜찮지만 그 선을 경계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고통과 쾌락을 구분하는 것은 별 문제 없지만, 고통으로부터 쾌락을 분리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대립은 그저 하나의 과정에 대한 두 개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서로 투쟁하는 두 개의 다른 과정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 있는지 생각할 수 없게 된다. 하나의 세계에서 두 개의 세계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물이라는 단어가 갈증을 풀어주지 못한다. 해방이란 부정적인 것에서의 해방이 아니라, 긍정과 부정이라는 한 쌍 전체로부터의 해방이다. 천국이란 부정적인 것이 하나도 없는 긍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대립 없음, 또는 비이원성을 실현한 상태이다.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찾아낸 사람

    실재는 대립의 쌍들로부터 자유롭다. 즉 실재는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롭다. 실재는 둘이 아니다. 즉 실재는 무경계이다.

    이 우주에는 그 어떤 경계도 없다. 경계는 실재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실재를 작도하고 편집한 방식의 산물, 즉 환상이다. 따라서 영토를 지도화하는 것은 괜찮은 일이지만, 그 둘을 혼동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이다.

    우주는 그 자체를 나눌 수 없는 일종의 거대한 원자처럼 오직 진정 나눌 수 없는 전체로 형성되어 있다.(法界=사사무애 事事無碍, 무경계)

    모든 사물과 사건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다. 세계 속의 모든 실체는 다른 모든 실체와 상호 침투해 있다.

    워홀의 작품은 이른바 시뮬라크르의 시대. 즉 복제가 자립하여 원본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시대의 예술적 증언이었다.

    원자라는 아주 작은 우주 안에 미세한 개별 입자들이 미래의 무한한 우주와 아주 먼 과거의 무한한 우주 속에 무수한 대상과 원리를 완전무결한 상태로 포함되어 있다.

    모든 것은 하나이고 하나는 모든 것이다. 각각의 입자는 다른 모든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런 입자 각각도 동일한 방식으로 동시에 다른 입자 모두로 구성되어 있다.

    현자는 이름과 모양을 실재와 혼동하는 일이 없다. 명색을 버리고 모든 분별이 사라질 때 그곳에 남는 것이 사물의 진정한 본성이다.(眞如) 이 보편적이고 무분별적이며 불가지한 진여 그것이 유일한 실재이다.

    사물이란 단지 경험이 만들어낸 추상적인 경계에 불과하다.

    사고가 상징적인 지도 제작이고 실재 위에 경계를 덧씌우는 과정이다. 사물을 본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며, 생각한다는 것은 스스로 사물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하기와 사물화하기는 우리가 실재를 잡기위해 던진 경계라는 그물에 붙인 두 개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공은 다양성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것들은 개별적 존재 이상의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보다 깊은 의미를 불러 일으킨다. 그것들은 자신이 아닌 것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된다.

    모든 사물과 사건이 상호 의존적이며 상호 침투한다. 모든 것들은 그들이 아닌 것과 관련되어 있다. 무경계 영토에서는 모든 사물과 사건이 똑같이 하나의 몸(법신)이다. 우주 속의 모든 대상들은 단지 단일한 에너지(브라흐만, , )의 다양한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경계는 본래 있지도 않은 분리(갈등)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 순전히 환상이며 철저한 속임수이다.

    합일의식=무경계 각성

    요가, 기도, 의식, 찬송, 단식, 정신집중 등 최초의 경계를 파괴하려는 시도 조차도 단지 파괴하려고 하는 바로 그 환상을 강화시키고 영속 시키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풍경 133.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