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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39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9. 1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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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39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KglMQXkzc60

     

    543.

    헌신의 도가 성숙한 지경에 이르면 신이 나타난다. 그 신이란 그 개인의 영혼의 목격자이기도 하고 그 영혼 자신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본래 모습인 사트치트아난다(실재-의식-지복)의 상태에서 인간의 형체를 하고 나타난다. 그러면 제자들은 그의 은총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우선 우주 전체를 스승으로 보는 법부터 배워야 하고 살아있는 모든 것 속에서 스승()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만물을 신의 모습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스승이 반드시 사람이야 할 필요는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스승일 수 있다. 이성과 감각의 밀림에 갇힌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스승밖에 없다. 스승(Guru)이란 결국 집중(guri)일 뿐이다. 신과 스승과 참 자아는 같은 것이다. 몸은 결코 그대가 아니다. 참 자아는 움직이지 않는다. 세상이 참 자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대는 있는 그대로 그대일 뿐, 결코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대가 여기서 떠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떠나는 것이 아니며, 그대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으며 어느 곳에든 다 있다. 눈에 보이는 장면만 바뀔 뿐이다. 그대는 은총을 바라는데 은총은 그대 안에 있다. 은총이 외적인 것이라면 그건 쓸모가 없다. 은총은 참 자아이다. 은총은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그대는 은총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은총과 탐구, 이 둘은 동시에 작용한다. 무지는 그대가 스스로 만들어 짊어진 것이다. 스승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은 자신이 곧 모든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참 자아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이 구도자의 마음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고,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들 내면에 있다. 그대는 항상 그대의 참 자아 안에 있는데 시간과 공간이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물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목이 마르다고 하는 것은 마치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목말라하는 것과 같다. 은총은 어디에나 항상 있다. 전수를 통해 무언가를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스승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모든 말의 뿌리이다. 그러나 생각의 흐름이 정지된 상태로 그냥 있을 때에는 침묵이라는 전우주적인 언어를 통해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 침묵은 영원한 언어의 흐름이며, 언어는 그 흐름을 방해한다. 침묵은 가장 높은 차원의 언어이며, 가장 효과적인 언어이다. 진리 자체는 언어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진리를 가리켜 보이는 것 뿐이다. ‘에 집중하는 것은 이 길이야말로 바른 길이다. 다른 것은 모두 돌아서 가는 길이다. ‘에 대한 집중은 참 자아로 인도하지만, 다른 수행은 엉뚱한 곳으로 인도한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애쓰고, 참 자아를 탐구하는 사람은 그렇게 애쓰는 자가 누구인가를 찾는다. 명상을 통해서는 결국에는 참 자아에 도달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마음을 항상 참 자아에만 고정시키는 것이 자아 탐구이다. 거기에 비해 명상이란 자기자신을 브라흐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지를 마음 속으로 그리며 참 자아에 대해 명상하는 사람은 그 이미지에 도달한다. 하지만 아무런 이미지도 마음속에 그리지 않고 고요함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무한하고 고귀한 무형의 참 자아에 도달한다. 그대가 참 자아를 모른다면 그대의 참 자아와 그것을 모르는 자아가 있어야 하는데, 그대의 자아가 둘이라는게 말이 되는가? 생각이 사라진 그 공간 즉 생각으로 물들지 않은 순수한 마음이 참 자아이다. 집중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해야한다. 긴장을 풀고 편안한 마음으로 명상하라. 끼어드는 생각은 긴장하지 말고 부드럽게 물리쳐라. 명상 중에 잠을 쫓아버리려고 하는 것 자체가 명상을 방해하는 생각이다. 잠이라는 것도 하나의 생각이다. 이 생각도 극복해야 한다. 생각에서 자유로운 본연의 상태를 스크린이라고 할 때, 깨어 있음과 잠은 그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에 지나지 않는다. 스크린에 어떤 영상이 비치든지 신경쓰지 말고 그냥 지나가게 하라. 명상은 투쟁이다. 한 생각에 집중하는 힘은 반복 수행을 통해 서서히 얻어야 한다. 마음의 평화는 오직 명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몸의 어느 부분에(차크라) 집중하면 그대가 집중하는 주체가 되고 집중하는 몸의 차크라 부분이 집중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정신적인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를 실마리로 삼으라는 두 가지 이유 1.아무도 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2.어떤 수행 법을 택하든 마지막 목표는 모든 경험의 근거가 되는 의 근원을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브라흐만이다라는 것은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그렇게 말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말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그대의 참 자아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대의 참 자아는 항상 브라흐만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구의 생각인가? 모든 생각은 육체와 외부와 동일시하는 가짜   라는 생각에서 나온다. 생각이 없는 상태에 머물도록 하라. 생각이 있는 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 소리, 호흡, 미간, 만트라 모두 일시적이다. 자신의 참 자아를 알기 위해서는 아무런 외적인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 그대가 이름과 형상을 가진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다면 이름과 형상에서 비롯되는 한계는 떨어져 나간다. 그렇게되면 집중 명상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경전은 일종의 거울인데, 자기를 보려면 직접 보면 되는 것이지 꼭 거울을 들여다 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경전의 가르침을 배우는 목적은 참 자아가 아닌 것을 분별하여 하나하나 떼어내는 데 있다. 오직 그것 뿐이다. 생활하면서 나는 누구인가를 계속 생각하면 참 자아에 도달할 것이다. ‘가 신의 이름이다. 이것이 최고의 만트라이다. ‘은 부수적인 만트라이다. 몸은 마음이 반영된 투사물이다. 마음과 그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입으로 내가 그이다를 아무리 반복해도 탄생과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탄생과 죽음의 고통을 벗어나려면 스스로 그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 이 세상에서의 임무를 포기하지 말고 수행하라. 직업을 버리거나 가정을 떠나는 것은 포기가 아니다. 진정한 포기는 욕망과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욕망을 버린 사람은 세상으로 들어가 온 세상을 향해 자신의 사랑을 펼친다. 환경을 바꾸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음이 유일한 장애물이다. 장소가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내면에서 신을 찾는 일에 몰두하고 있으면 외적인 일은 저절로 진행될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 그대가 활동하도록 마음에 활기를 주는 어떤 기운의 흐름이 있다. 그것이 바로 참 자아이다. 참 자아가 모든 활동의 진정한 근원이기 때문이다. 일을 하되 서두르지 말고 들뜨지 말고, 상상하지 마라. 일을 하는 주인공은 모든 일의 토대가 되는, 밑에서 흐르는 기운의 흐름이다. 그 흐름과 그대를 동일시하도록 하라. 근원을 생각하는 여유를 갖도록 하라. 외부로 향하는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출가이다. 모든 일은 정해진 대로 일어난다. 그대가 선택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내면으로 돌리는 것뿐이다. 홀로 있음은 일종의 마음의 기능이다. 어디에 살든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고독한 상태에 있을 수 없다. 반면에 욕망을 여윈 사람은 늘 고독한 상태에 있다. 어떤 일에 집착하면 그 일이 족쇄가 된다. 하지만 초연한 태도로 일에 임하면 행위가 행위자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면 홀로 있음 상태에 있게된다. 그대가 하는 행위는 하나도 없다. 모두 신이 하는 일이다. 깨달은 사람 자신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모든 행위가 그저 일어나는 일일뿐 그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이런저런 행위를 하면서도 평화 가운데 있다. 그는 언제나 행위가 일어나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는 침묵의 증인으로 남아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가 참 자아 바깥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돕는 최선의 길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대의 육체와 감각이 유혹을 받는 것이지 참 자아가 받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육체와 참 자아를 혼동하지 말라. 그대는 늘 순수하다. 죄인이 아니다. 음식의 질이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 마음은 음식을 먹고 자란다. 근원을 탐구함으로써, 또 가슴에 몰입함으로써 참 자아에 도달한다. 이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직접적인 방법이다. 이 길을 가는 사람은 나디, 사하스라라, 수슘나, 파라나디, 쿤달리니, 프라나야마, 차크라 같은 것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대는 늘 참 자아이다. 그것을 찾고 그것이 되도록 하라. 무엇이 누구에게서 분리되어 있는지를 찾도록 하라. 그것이 요가이다. 자기를 실재인 참 자아에서 분리된 개체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 요가의 진정한 뜻이다. 모든 요가는 자기를 참 자아에서 분리된 개체라는 오래 묵은 생각을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요가는 생각의 흐름을 멈출 것을 요구하는데 자신을 탐구하는 것이 더 쉽다. 억제했던 원인이 사라지면 마음은 즉시 다시 살아난다.(단식, 호흡...)

    마음을 통제하는 유일한 두 가지 방법

    1.마음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

    2.초월적인 힘 앞에 완전히 복종하여 죽이는 길

    마음이 조절되면 호흡은 저절로 조절된다. 억지로 호흡을 조절할 필요는 없다. 프라나야마(감각억제-집중-명상, 사마디) 등으로 마음 조절을 한다. 요가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음을 조절하는데 있다. 영적으로 진보한 사람은 호흡조절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마음 조절로 들어갈 수 있다. 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육체와 동일시하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숨을 들이 쉬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탐구에 몰입하라. 그리고 숨을 멈추고 있는 동안에는 유일한 실재인 내가 그것 상태에 머물러라. 이것이 진정한 프라나야마다. 참 자아 탐구의 길을 따를 힘이 없는 사람은 마음을 조절하기 위해 프라나야마를 하라. 방법은 1.호흡을 규칙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이고 2.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을 단순히 주시하는 방법이다.

     

    풍경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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