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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36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8. 21.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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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36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_xghPDMtkRU

     

    540.

    숨어있는 신의 영광이 나타난 생명의 무대에서 춤을 춘다. 절대가 상대 속에서 춤을 추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의 헌신은 다만 시도, 노력 또는 애씀에 그칠 뿐이다. 기껏해야 더 크고 더 높은 사랑에 대한 상상이다. 그러나 우주적으로 진화한 사람의 사랑과 헌신은 영원을 품에 안은 생생한 가치를 지니며, 하나의 우주적 개성 속에서 영원의 시간을 숨쉬게 한다. 이것이 사랑의 힘이요. 헌신의 영광이다. 즉 사람의 개별적 마음이 하나님의 우주적 마음으로 화한다. 또한 사람의 말은 우주의 침묵을 대변하여 우주적 지성이 그의 개별 마음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사람이 전지전능, 무소부재한 우주 실존의 실체인 것이다. 그의 개별 생명은 우주적 존재의 영원한 바다에 이는 물결이요. 그 물결은 우주 생명의 전 대양을 품고 있다. 그는 나타날 수 없는 영원한 존재의 나타남이다. 상대 무대에서의 그의 활동은 절대자의 영원한 고요를 표현한다. 그가 사는 상대 생활의 빛속에 절대자가 그 존재의 표현을 본다. 형체 없음이 형체로 나타났고, 침묵이 파동으로 화하여, 표현못할 존재가 개성으로 나타나고, 개인이 우주 생명을 숨쉰다. 마음은 삶의 중심 축이다. 만일에 마음이 그 근원에까지 이를 수 있다면, 생명 전체가 근원과 이어질 것이다. 사람의 의식은 신 의식으로 높이고 인간의 마음을 거룩한 지성 또는 우주적 마음(하나님)으로 향상시켜라. 그리하여 개인 생명을 우주 생명과 협동케하라.

    나도 그것, 너도 그것, 모든 것이 그것

    베단타 vedanta;모든 생명은 하나라는 뜻

    우주는 출렁이는 의식의 가없는 바다이다. 이 무한한 바다 즉 통일장(순수의식)이 삼라만상의 본질적인 실재이다. 그것은 의식이므로 자기 내부에서 반응하여 파동을 일으킨다. 자체의 무한함이 진동하여 소리의 파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음파가 베다의 물결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 삼라만상을 지배하는 자연법칙들이며 이 소리들로부터 우주가 생성된다. 우리가 완전한 삶의 수준인 깨달음 상태에 이르면 자신이 다름 아닌 출렁이는 가없는 의식의 바다임을 알게된다. 의식이 자신을 완전히 알게 될 때 앎의 주체(리쉬 Rishi)가 되고 또한 앎의 대상(찬다스 Chandas)이 된다. 앎의 주체가 앎의 대상을 알 때 앎의 과정(데바타 Devata)이 생겨난다. 이 세 가지가 합쳐진 하나의 통합된 실재가(통합된 가치 삼히타 Samhita) 전 삼라만상의 출현과 진화의 기초를 이룬다. 리쉬, 데바타, 찬다스가 서로 간에 그리고 삼히타와 상호 작용함으로써 모든 베다의 소리들은 의식의 바다 속으로 연속해서 전개되어 나온다. 베다로부터 브라만이, 브라만에서 베단가, 연이어서 우판가, 이티하사, 푸라나 그리고 스므리티 등 베다의 소리들이 펼쳐진다. 삼라만상이란 다름아닌 자연의 지성이 자기 내부에서 반응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이 시초의 소리들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만물의 기본은 리쉬, 데바타, 찬다스에 있으며 물질에서는 바타 vata, 피타 pita, 카파 kapha라는 3개의 도샤 Dosha로 나타난다. 리쉬, 데바타, 찬다스가 물질화 될 때 그들은 자신들의 통합된 가치인 삼히타를 망각하게 된다. 이것을 소위 프라기파라다(Praqyparadha-지식의 착오)라 부르며 베다 과학에서는 모든 질병과 고통의 원인으로 본다. 아유르베다 Ayurveda에서는 도샤라 부르는 바타, 피타, 카파의 세 가지 몸의 속성의 구성 상태에 다라 개인의 신체 유형이 결정된다고 한다. 바타는 신체의 모든 움직임을, 피타는 열과 신진대사를, 카파는 신체의 구성과 유지를 담당한다. 곧 몸의 세 가지 속성을 뜻하는 바타, 피타, 카파의 완전한 조화를 위해 인간 의식, 생리, 행위, 환경을 전체적으로 고려하여 이 세 도샤들이 균형잡힐 때 의식의 세 요소인 리쉬, 데바타, 찬다스가 완전히 조화되고 그들의 가장 본연의 상태인 삼히타에 이르른다. 그 속에서 인간은 지식의 착오로부터 벗어나 삶의 모든 요소가 통합된 경지 속에서 완전한 건강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된다. 그러할 때 우리는 완전히 깨어난 참 자아를 찾아 베다(순수의식)와 삼라만상을 비로소 알게된다. 창조의 싸이클이 완결된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본디 한계가 없는 의식의 바다인 아트만의 잠재력이 활짝 꽃피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나는 브라만이다.’라는 경지이다. 비로소 나 자신 안에서 아트만의 진화가 결정에 도달한 것이다.

    깨달음이란 어떤 것을 대상으로 알거나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있는 그대로 眞我가 드러나는 것이다. 땅을 파면 구덩이가 생기는데 그 구덩이 안의 공간은 새로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것으로서 단지 공간을 채우고 있던 흙을 제거했을 때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진아는 그것을 가리고 있던 우리 안에 있는 그릇된 관념을 던져버릴 때 저절로 드러나는 빛이다. 진아는 결코 무가 아니다. 오히려 존재의 충만이자 순수의식이며 영적 희열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내가 곧 브라흐만이다라는 범아일여의 진리를 실현하는 가장 간단하고 직접적인 방법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은 장작불을 뒤집는 막대기처럼, 다른 모든 생각들을 불태워버린 후에 그 자체도 불태워져 소멸된다. 만약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난다 해도 그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서 일어났는가?’하고 물어야 한다. 이에 대한 답은 나에게가 될 것이다. 이와같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계속하면 마음은 점점 그 근원으로 향하게 되고 생각은 점점 사라지게 된다.

    영적으로 성숙된 사람만이 침묵의 언어를 누릴 수 있다. 언어는 진리에 대한 언급일 뿐이며 진리 자체를 전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진정한 본성은 무형의 의식이다. 우주 의식과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의식만이 유일한 실재이다. 개체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의 세 가지 특성(축축함, 투명성, 유동성)을 따로 떼 놓을 수 없듯이 참 자아도 세 가지 측면 즉 사트 sat(實在), 치트 chit(意識), 아난다 ananda(至福)이 있다.

    인간의 의식은 깨어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깊이 잠든 상태 사이를 번갈아 오간다. 이런 일시적인 세 가지 의식 상태가 나타나도록 하는 근원적인 실재가 곧 참 자아이다. 참 자아라는 토대 위에서 이런저런 의식 수준이 전개된다. 항상 존재하는 것이 실재이다.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지만 모든 형태와 이름의 토대가 되는 것이 실재이다. 그것은 제한되어 있는 것들의 뿌리이지만 스스로는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의 배후에 스스로 있다. 실재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다. 실재란 주객이 분리된 상태로 대상을 인식하는 행위와 무지가 소멸된 뒤에 남아있는 순수한 의식이다.

    그대가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그대의 다른 이름이다. 그대 자신이 깨달음이므로 그것을 얻거나 키워나갈 필요가 없다. 그대는 단지 참 자아가 아닌 것들을 그대라고 생각하는 오해만 버리면 된다. 이원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현재 알고 있는 것은 에고에서 비롯된 것이고, 따라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기억 또한 상대적이다. 기억하는 주체가 있고 기억되는 대상이 있다. 그러나 주체와 대상의 이원성이 사라진다면 누가 누구를 기억한단 말인가?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고 고집하는 무지만 버리면 된다. 깨달음을 얻는다고들 이야기 하지만, 이미 실재하는 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몸이 나라는 생각이 사라진 상태가 바로 참 자아의 상태이다. 그 상태에서는 대상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 참 자아를 의식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무엇을 깨닫는단 말인가? 실재는 항상 있는 그대로 있다. 우리는 그 무엇도 새로이 창조해 내지 못하며, 이미 가지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얻을 수도 없다.(구덩이 우화) 우리는 단지 구속되어 있다는 착각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자유에 대한 생각이나 자유롭고자 하는 갈망이 사라지고, 자유로움 자체가 된다. 그러나 스스로 구속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자유롭게 되기를 갈망하는 동안에는 구속되어 있는 것이다. 스크린 위에 장면들이 나타났다 사라져도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고 해도 되지않고 본래 그대로 스크린으로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그대는 세 가지 의식 상태의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그대의 참 자아로 남아있다. 즉 세 가지 의식 상태에서 전개되는 상황이 그대를 괴롭히지 못하며, 그대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대는 여전히 참 자아로 남아 있다. 극장 안에 켜있는 등불(참자아)은 어떤 역할의 배우에게나 똑같은 빛을 비춘다. 보는 자나 보이는 대상은 모두 마음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세 가지 상태는(, , ) 단지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궁극적인 실재만이 있다.(늘 현존하는 참 자아만이 실재이다.) 마음과 참 자아의 차이는 아무것도 없다. 마음이 내면으로 향하면 참 자아이고 외부로 향하면 에고와 현상계가 된다. 여러 가지 옷들의 이름이 다르더라도 모든 옷의 본질은 옷감이다. 실재는 오직 하나일 뿐이며, 이름과 모습이 다를 뿐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참 자아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라는 독립된 실체는 없다. 참 자아는 마음이 없이도 존재하지만 마음은 참 자아가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브라흐만을 사트 치트 아난다(실재-의식-지복)라고 한다. 유일한 실재(사트)를 브라흐만이라고 한다. 의식(치트)은 유일한 실재인 브라흐만의 빛이며 지복(아난다)은 브라흐만의 본질이다. 의식과 지복은 실재의 다른 형태이며, 이 셋을 합쳐 사트치트아난다라고 한다. 가장 근본적인 착각은 참 자아가 육체와 마음이라는 제한된 틀 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다. 자신은 특정한 육체를 지닌 독립된 개체라는 생각을 버리는 순간, 여타의 그릇된 생각들로 이루어진 가공의 건축물은 일시에 무너진다. 그러면 참 자아의 의식적인 각성 상태가 된다. 그 각성 상태는 영원하다.

     

    풍경 동영상 링크

     

    곤충의 사랑 : https://youtube.com/shorts/GGBRC4TMJdk?feature=share 

     

    매미의 사투 : https://youtube.com/shorts/1EloF7SISnI?feature=share 

     

    곤충의 먹이사슬 : https://youtube.com/shorts/ifEBJgfJklE?feature=share 

     

    곤충의 오르가즘 : https://youtube.com/shorts/uomXGkVBgrY?feature=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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