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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37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8. 28.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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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37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_Dbp0fFCqeQ
     
    541.

    깨달음은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새롭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만 버리면 된다. 고요함과 평화가 깨달음이다. 참 자아가 아닌 상태란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의심은 참 자아가 아닌 것을 참 자아와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참 자아가 아닌 것이 사라지고 나면 참 자아만이 남는다. 방을 꽉 채우고 있는 물건들만 치우면 빈 공간은 저절로 드러난다. 빈 공간을 어디 다른데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참 자아의 자리에 도달해야 한다면 참 자아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다는 뜻이며 결국 새롭게 획득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새로 얻은 것은 언젠가는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영원하지 않은 것은 추구할 가치가 없다. 그래서 참 자아의 자리에 도달한다는 그건 것은 없다. 그대가 참 자아이다. 그대는 이미 참 자아 자체이다. 그대가 할 일은 무지의 장막을 걷어 내는 일 뿐이다. 참 자아를 육체나 마음과 동일시하는 것이 무지이다. 따라서 깨달음은 누구나 가능하고 구도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해탈이란 미래의 어느 때에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영원히 현존하고 있다. 실제로는 구속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자유만이 있다. 이미 그 상태이거늘, 무엇 때문에 영원한 자유니 해탈이니 하는 이름을 붙이고 그 헛된 이름을 추구하는가? 무지만 없애면 된다. 그 외에는 할 일이 없다. 해탈에 관해 질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해탈이란 구속에서 벗어난다는 뜻인데, 그것은 현재 구속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구속은 없다. 그러므로 해탈도 없다. 깸과 잠은 육체에 대한 의식이 여부에 있을 뿐, 본래의 의식 자체는 변함이 없다. 구속은 육체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생겨난다. 육체와 나를 동일시하는 그릇된 느낌이 사라져야 한다. 진정한 나는 육체에 대한 의식이 없는 동안에도 늘 존재한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으며 새롭게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현존한다. 영원히 현존하는 것이라야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새롭게 나타나는 것은 결국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육체는 영원한 실재가 아니라, 육체라는 현상이 나타나도록 만드는 참 자아 의식만이 영원한 실재이다. 문제는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나를 육체와 동일시하는데 있다. 모든 고통은 이 잘못된 동일시에서부터 시작된다. 깨달음이란 어떤 새로운 것을 얻거나 새로운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속임수가 제거된 상태이다. 세 가지 상태를 번갈아 오가는 중에도 존재의 연속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대의 진정한 존재는 어떤 상태에서도 현존하지만, 개체적인 자아나 인식의 대상인 현상세계는 그렇지 못하다. 연속적인 것이 영원한 것이다. 따라서 연속적인 그대의 존재 자체는 영원하지만 육체나 이 세상은 그렇지 않다. 육체나 이 세상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참자아라는 스크린 위를 지나가는 일시적인 영상일 뿐이다. 그대가 비참하다거나 불행하다고 느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대는 그대의 무한한 본성에 스스로 제한을 가한 다음, 자신을 유한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슬퍼하고 있다. 그래서 존재하지도 않는 제약에서 벗어나려고 이런저런 영적 수행을 하면서 발버둥 친다. 그러나 이미 제한되어 있다는 전제하에 진행하는 수행이라면, 그런 수행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는데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대가 참 자아를 모른다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모른다고 착각하는 무지일 뿐이다. 진정한 지혜는 그대를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그대의 무지만을 제거한다. 깨달음을 얻으면 그대의 본성에 지복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본성이 이미 지복이며, 깨달음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그 본성이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어떻게 해야 참 자아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은 마치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이 이곳으로 가는데에는 어떤 길이 있으며 그 중에 어느 길이 가장 가까운 길이냐고 묻는 것과 같다. 그대는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는 그릇된 생각과 외적인 대상을 실재로 착각하는 무지만 버리면 된다. 즉 참 자아가 아닌 것들만 제거하면 된다. 괴로움이란 것도 그대의 상상이 만들어 낸 것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모두 에고(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대가 육체를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조악한 물질 세상이 존재하지만, 그대가 영혼이라면 세상 모두가 영혼일 뿐이다. 만약 에고라는 것이 있다면 그대가 둘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에고는 없다. 그러니 무지 또한 없는 것이다. 무지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지는 에고의 부속물이다. 에고 의식을 가지고 존재하지도 않는 무지와 고통 속에서 괴로워할 이유가 무엇인가? 참 자아에 대한 망각이 곧 무지이다. 고통과 슬픔을 느끼는 것은 마음이다. 참 자아의 빛 속에는 무지가 없다. 그대가 보고 있는 이 세상도 에고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참 자아를 안다는 것은 참 자아가 된다는 뜻이며 참 자아가 된다는 것은 본래 상태의 자기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의 눈을 볼 수 없어도 눈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듯이 자기가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혼란은 거울을 앞에 놓고 자신의 눈을 바라보는 식으로 참 자아를 객관화시키는데서 온다. 그대 자신, 그대의 참 자아는 결코 객관적인 대상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모든 것을 객관화시켜 보려고 하기 때문에 그대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지각 능력이 없는 육체가 참 자아를 알 수 있는가? 그대는 스스로 참 자아이면서도 어떻게 하면 참 자아를 알 수 있느냐고 묻는다. 생각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다 보면 생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궁극적인 근원인 참 자아만이 남을 것이다. 현상계의 사물은 에고가 생각하고 바라보는 세상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모든 것들이 참 자아와 하나이다.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이 장애물이다. 천상천하에 참 자아만이 홀로 존재한다. 깨달음의 단계에 도달하면 이미 그러하고 이미 도달해 있는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미친듯이 발버둥쳤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의 장난, 다시 말하자면 환영일 뿐이다. 그것은 순수의식의 빛이 반사된 것에 불과한 마음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마음이 밖으로만 향해 있어서 그 근원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실재에서 분리된 상태로는 존재할 수 없다. 깨어 있음이 곧 진정한 앎(영원, 본래적)이다. 그러므로 무지는(비본래적, 비실재) 없는 것이다.

    진리 듣기-비추어 보기-집중-내면을 응시

    무지란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있다면(에고), 그 목표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흐르는 물 속에 비친 그림자는 흔들린다. 흔들림을 멈추게 하려면 물이 아니라 빛에 주목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에고와 에고의 활동을 무시하고 그 배후에 있는 빛에 주목하라. ‘나라는 생각이 에고이다. 참 자아만이 진정한 이다. 깨달음이라는 말은 깨닫는 자아와 깨달아지는 참 자아라는 두 개의 자아를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어찌 참 자아를 알지 못하겠는가? 마음을 없애려고 하는 것도 역시 마음 아닌가? 어떻게 마음이(으로) 마음을 없앨 수 있겠는가? 마음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 찾아보라. 그러면 마음이라는게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리라. 참 자아의 자리에 들어가면 마음은 사라진다. 무티크(해탈, 자유)는 우리의 본성이며, 우리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짓이다. 우리는 실재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되어 있다고 상상함으로써, 분리를 극복하고 실재와 하나되기 위해 맹렬한 영적인 수행을 한다. 있지도 않는 분리감을 상상으로 만들어 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대의 존재 자체가 지복 아닌가? 존재와 지복은 같은 것이며, 그대가 곧 그것이다. 그대는 지금 덧없이 변화하는 마음이나 육체를 그대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그대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존재이다. 그대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지복을 찾지 못한다. 진정한 지복이라면 영원해야 한다. 영원한 것은 그대의 존재 뿐이다. 참 자아가 되라. 그것이 지복이다. 그대는 항상 지복 상태에 있다. 참 자아는 항상 깨달음 상태에 있다. 이미 그리고 항상 깨달음 상태에 있기 때문에 달리 깨달음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존재가 순수의식이며 참 자아이다. 그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그대의 존재가 바로 참 자아이며, 참 자아의 주인공은 이미 깨달음 상태에 있다. 새로운 깨달음이라는 것은 없다. 시간 관념은 그대의 마음 속에만 존재한다. 그대의 참 존재는 시간과 공간이 없어도 존재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늘 참 자아임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참 자아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목표이고 평화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화가 아니라는 관념만 극복하면 된다. 오는 것은 가게 되어 있다.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만이 영원히 존재한다. 스승은 그대가 갖고 있지 않은 새로운 것을 그대에게 주지 못한다. 일단 깨달음에 도달하면 이 세상에 섞여 살지라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튼튼한 신발을 신은 사람은 앞에 산이 나타날지라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어떠한 일을 만나도 자연스럽다. 그 자신의 참 자아 주인공과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모든 것의 원인이다. 마음이 사라지면 본래 상태는 저절로 드러난다. 궁극적인 실재인 참 자아의 입장에서 보면, 깨달은 사람도 깨닫지 못한 사람도 없다.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앎(깨달음)만이 존재한다. 현상계는 깨달음 사람에게나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나 다 보인다. 다만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뿐이다. 스크린이 없으면 영상이 나타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보는 자가 없으면 보이는 대상도 없다. 깨달은 사람은 스크린과 그 위에 나타나는 장면들이 모두 참 자아임을 안다. 깨달은 사람의 경우에는 실재 그 자체가 기준이다. 그러므로 깨어있든, 꿈을 꾸든, 깊이 잠자든, 실재는 영원히 지속된다. 실재와 하나된 사람에게는 마음도 마음의 세 가지 상태도 없으며, 따라서 내향성도 외향성도 없다.

     

    풍경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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