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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38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9. 4.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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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38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YwVlt_yr6v0

     

    542.

    육체가 라는 생각이 사라지면 행위나 행위자도 사라진다. 라디오는 노래도 하고 말도 한다. 그러나 뜯어보면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마찬가지로 나의 존재는 마치 빈 공간과 같다. 육체가 라디오처럼 말을 하지만, 이 육체 속에는 행위자가 없다. 그는 육체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육체가 행위를 하더라도 자신은 아무런 행위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달은 사람의 육체적인 겉모습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본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도 자기처럼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육체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그는 티 한 점 없이 맑은 거울과 같다. 맑은 거울은 비치는 대로 반사하지만 거울 자체는 비치는 대상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는 것처럼,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반면에 스스로 행위자라고 생각하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노래를 불러야할지, 또 세상에 도움을 주려면 어떤 행동을 해야할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구별이 장애물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자유 뿐이다. 그대는 거울과 거울에 비친 상을 동시에 본다. 그대는 거울이 실체이고 거울에 비친 상은 단순한 반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해서 거울을 볼 때, 거울만 보고 거기에 비친 상은 보지 않을 수 있는가? 또 그럴 필요가 있는가? 나라는 생각이 마음이다. 마음과 에고는 하나이다. 똑같다. 다른 정신적인 기능들. 이를테면 지성이나 기억 역시 마음이다. 마음, 지성, 의식, 에고 등이 모두 마음이다. 작용하는 기능이 달라 다른 이름이 붙었을 뿐, 본질은 하나다. 개별적인 영혼이라는 것도 결국은 에고이자 마음일 뿐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생각들이 일어나는 뿌리나 줄기이다. 에고가 생각을 전개시킨다. 모든 생각의 근원은 나라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결국 나라는 생각일 뿐이다.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다음에 자기를 육체와 동일시하는 그릇된 관념이 생긴다. 그러므로 나라는 생각의 탄생이 한 개인의 탄생이고 나라는 생각의 죽음이 그 사람의 죽음이다. 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라. 나라는 생각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개는 주인을 찾는 동안 냄새에만 집중한다. 그밖에 주인이 입은 옷이라든가 키나 몸짓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결국 주인을 찾는다. 영화를 볼 때 어둠 속에서는 화면의 그림들이 보이지만, 불이 환하게 켜지면, 스크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고한 아트만의 빛 속에서는 모든 대상이 사라진다. 에고는 다른 대상과 연결되지 않고 독립적으로는 존재하지 못한다. 자신과 대상과의 연결이 바로 무지이며 이 연결을 깨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이다. 깨달음은 늘 존재하고 있다. 단지 생각이라는 장막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주관과 객관으로 나뉘어지지 않은 순수한 실재에 집중하는 것 외에는 이 윤회의 바다를 건너갈 수 있는 뗏목은 없다. 우리가 이미 실재이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실재를 깨달으려고 한다는 이 사실보다 더 큰 신비는 없다. 참 자아는 무엇을 한 결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존재 자체로 존재함으로써 깨닫는다. 그대는 마음이다. 또는 그대는 마음을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이라는 것은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참 자아 탐구와는 달리 스스로를 실재-의식-지복 상태의 절대자(브라흐만)라고 생각하는 것은 명상(禪定)이다. 영적으로 진보한 사람의 손은 세상에 잠겨 있어도 머리는 홀로 자신의 맑은 내면에 거할 것이다. 보는 자, 보이는 대상, 보는 과정이 모두 동일한 의식 곧 참 자아의 현현이다. 참 자아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거울에 비친 그대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도 그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점을 깨닫도록 하라. 이것이 진리이다. 육체는 지각하는 힘이 없다. 따라서 육체가 나(에고)라고 할 수 없다. 에고는 참 자아와 스스로 지각 능력이 없는 육체를 연결하는 그 어떤 것이다. 에고는 확고부동한 실체가 아니다. 찾아보면 유령처럼 사라진다. 일시적으로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생각이 가라앉은 상태, 자기 최면 상태인 깊은 수면 상태, 일시적인 몰아경에 함몰된 상태)와 생각이 영원히 소멸된 상태가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라는 생각 때문에 우주가 나타났다. 거짓된 나는 그 근원을 찾으면 저절로 사라진다. 마음은 여러 가지 생각이 묶여있는 일종의 생각 꾸러미이다. 그러니 어찌 생각이나 욕망으로 그것을 없앨 수 있겠는가? 생각과 욕망은 마음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마음을 없애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마음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마음이 일어나는 근원으로 파고 들어가 거기에서 떠나지 않는 길밖에 없다. 그러면 마음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그 무엇을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분별심을 어떻게 사라지게 하는가? 대상은 실체가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이다. 결국 객관 세계는 주관적인 의식 안에 존재한다. 참 자아는 현상계 속에 두루 스며 있고, 동시에 현상계를 품고 있는 全一的인 실재이다.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단지 물러나 참 자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영적인 수행이다. 마음은 마음을 통해서만 없앨 수 있다. 마음을 없애야겠다고 말하지 말고 대신 마음의 근원을 탐구하도록 하라. 그러면 마음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마음이 외부로 향하면 생각과 대상을 낳지만, 내부로 향하면 스스로 참 자아가 된다. 우리가 추구하는 깨달음은 새로 생기는 그 무엇이 아니라 지금은 장애물에(무지-나라는 생각) 가려 보이지 않지만, 영원히 현존하고 있는 그 무엇이다. 우리는 장애물만 제거하면 된다. 해가 떠오를 때 어둠이 차츰차츰 없어지는가? 아니면 일순간에 없어지는가? 지성을 통한 탐구는 진리를 직접 드러내지 못한다. 지성은 진리로 인도하는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 참 자아는 무한한 나이다. 이 나는 완전하고 영원하다. 이 나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하지만 다른 나 흔히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일시적이다. 명상에는 정신적인 心象 작용이 수반된다. 하지만 참 자아 탐구는 실재를 추구한다. 명상은 대상이 있는 객관적인 행위이고, 참 자아 탐구는 대상이 없는 주관적인 행위이다. 자신의 참 자아가 하느님임을 깨닫는데에는 오직 고요함만이 필요하다. 자신이 참 자아인데도 자꾸 딴데서 찾는다. 그것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기 때문에 안으로 몰입해야 한다. 참 자아가 어떤 구별되는 형체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 포기하면 된다. 그대 방의 실내장식을 보기 위한 방법을 알려 달라는 말인가? 방 안으로 들어가면 되지 않는가? 참 자아는 그대 안에 있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진정한 그대 자신에게 오는 것은 어디 있으며 가는 것은 어디 있겠는가? 진정한 그대 자신은 늘 그대 자신으로 있는 것 아닌가? 이 아쉬람에 도착할 때까지 그대의 육체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였을 뿐, 그대는 늘 자리에 있었지 않은가? 가슴(근원, 지고한 공간, 진리의 빛)이 육체()에도 있고 내면()에도 있다고 말하지만 궁극적인 차원에서 보면 가슴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안이다 밖이다 하는 것은 다 육체를 기준으로 하는 말인데, 육체란 마음이 만들어낸 현상이기 때문이다. 고요함이 자리잡으면, 마음의 동요가 없다. 마음의 동요는 갈망 때문에 생긴다. 갈망이 사라지면 고요함이 찾아온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 내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의 참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참 존재를 깨닫도록 하라. 나라는 것이 없고 나의 것도 없으며 오직 신 또는 참 자아만 존재한다는 체험이야말로 지혜이자 깨달음이다. 그가 기뻐할 때까지 기다리라. 그대를 기쁘게 해달라고 신께 요청한다면 그건 헌신이 아니라 명령이다. 그대 자신의 근원이 그대 밖에 있는 어떤 신이라는 망상에 빠지지 말라. 그대의 근원은 그대 안에 있다. 그 근원을 향해 모든 것을 포기하라. 이 말은 그 근원을 찾아 거기에 몰입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대의 문제는 인간을 행위자라고 생각하는데 있다. 모든 것을 하는 행위자는 더 큰 힘이다. 인간은 단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고통에서 벗어난다. 그렇지 않고는 고통을 벗어날 길이 없다. 신은 사랑이나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 자체가 신의 모습이다.(순수한 지복, 아트만...)

    참 자아의 본성은 사랑이 끝없이 솟아오르는 지복이다. 고귀한 사랑에 도달해야만 자유를 얻는다. 참자아 체험이란 곧 사랑 체험이다. 마음이 나프탈렌과 같아서 참 자아 속으로 녹아 들어가면 흔적도 남지 않는다. 그 상태가 바로 깨달음이다. 무념 무상 상태에서 형태없는 실체를 숭배하는 것이 최고의 예배이다. 형태없는 실체에 대한 숭배는 에고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에고의 목소리가 사라진 침묵이 해탈이다. 신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에 대한 욕망을 티끌만큼도 가지지 않는 것이 필수적이다.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명상 상태를 거쳐야 한다. 신을 본다는 것은 신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것 속에 두루 깃들어 있는 신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신만이 존재한다. 한순간에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면, 소유에 대한 모든 욕망이 뿌리째 뽑혀버린다. 참 자아를 깨달은 성자는 참 자아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돕는다. 잔물결조차 일지 않는 고요함에 머물면 그 고요한 공간이 참 자아이다. 행위는 파괴적인 창조이다. 행위를 옹호하거나 지시하는 스승은 스승이 아니다. 궁극적인 차원에서 보면 모든 사람의 참 자아가 곧 스승()이다.

     

    풍경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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