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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40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9. 23.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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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40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boCzlsF8hsI
     
     
    544.

    이미 꼭대기에 올라와서 다른 사람들이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모든 길을(사람을) 볼 수 있다. 누구에게나 목적지는 동일하다. 쿤달리니와 아트만(참자아)과 샤크티(에너지)는 이름만 다를뿐 같은 것이다. 육체는 마음 안에 있으며 마음은 뇌에서 활동한다. 뇌는 다른 근원(참자아)에서 오는 빛을 받아 활동한다. 하지만 참 자아는 다른 곳에서 와서 정수리 차크라를 통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늘 있는 그대로 현존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빛을 발하며 영원하고 움직이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 참 자아에서 일시적으로 파생되어 나타난 육체나 마음에 자신을 한정지어 놓고 있다. 필요한 것은 이 그릇된 동일시를 버리는 일 뿐이다. 그러면 영원히 빛을 발하는 참 자아가 분리되지 않은 유일한 실재로 드러날 것이다. 마음의 건강을 위하여 육체의 건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계속한다면 육체를 돌보는 일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육체도 결국은 참 자아라는 도화지 위에 그려진 그림이 아닌가? 자신의 본성에 머무는 것이 진정한 아사나(앉은 자세)이다. 온 우주가 그 위에서 편히 쉴 수 있는 곳은 참 자아 뿐이다. 참 자아야말로 흔들리지 않는 자리이며 튼튼한 기초이다. 그것에 대한 자각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앎이며, 그 앎에 머무는 것이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는 최고의 아사나이다. 자신이 행위자라는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 행위해야 한다.(카르마요가) 모든 행위는 행위자가 없어도 저절로 진행된다. 그대가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할 때 서로 다른 이름과 모습이 존재하지만, 육체 의식을 초월하면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도 함께 사라진다. 깨달은 사람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대는 창조한 힘이 세상도 창조했다. 그 힘이 그대를 돌볼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세상도 돌볼 수 있을 것이다.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이 세상을 돌보는 것은 신의 일이지 그대의 일이 아니다.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집착하지 마라. 그대는 그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참 자아가 그대의 몸을 움직이게 하고 있다. 그대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결과 모든 근심 걱정과 갈망이 사라진다. 그대는 그대와 결합된 더 큰 존재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하고 있다. 설령 마음이 움직일지라도 지고한 실재인 참 자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행위를 일으키는 듯이 보이는 마음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참 자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마음을 소멸시키는 길이다. 사마디에 있는 사람은 바람 한 점 없는 곳에서 타오르는 등불처럼, 또는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 바다처럼 아무런 동요도 없다. 그들은 세상 모든 것이 자신과 하나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이 상태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자기와는 다른 존재로 보인다. 사마디는 단순히 현상계의 여러 대상에 대한 분별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분별하는 마음 자체가 사라진 상태이다. 이것이 진정한 니르비칼파이다. 기름을 부을 때 그 불줄기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는 것처럼 명상, 금욕, 정진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될 때 사마디에 이른다. 자신의 참 자아 주인공이 되는 것이 곧 사마디이다. 사마디는 깨어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꿈조차 꾸지 않는 깊은 수면 상태의 밑바닥에 흐르는 인간의 본래 상태이다. 참 자아가 이런 세 가지 상태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세 가지 상태가 참 자아 안에 있다. 깨어있는 상태에서 사마디를 얻으면 깊이 잠든 상태에서도 그 흐름이 지속된다. 의식이니 무의식이니 하는 말은 마음의 영역에서나 통용되는 말이다. 참 자아는 의식과 무의식을 초월해 있다. 자신의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사람들과 서로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다면, 신과도 그렇게 말을 주고받지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천상세계;바이쿤타, 카일라사, 인드라로카, 찬드라로카

    초능력은 마음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현상이고 환영이다. 그것은 깨달음에 장애가 된다. 온전하게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참 자아를 깨닫는 것이 진정한 초능력이다. 그것만이 참다운 앎과 자유를 얻는 길이다. 보는 자, 보이는 대상, 보는 행위가 모두 참 자아일 뿐이다. 얻은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잃어버리게 되어 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추구할 가치가 없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은 마음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신비한 초능력은 결국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더 많이 갖는 것과 평화로워지는 것.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진정한 능력인가? 수행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 체험을 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몰입이라는 말은 자꾸 밖으로 향하는 습성이 있는 마음을 내면으로 돌리는 것을 일컫는다. 의심을 하나씩 없애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한 가지 의심을 해결하고 나면 다른 의문이 생길 것이다. 이 과정은 끝없이 되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의심하는 자의 근원을 탐구하여 의심하는 자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 모든 의심이 사라질 것이다. 그대가 어떤 경험을 하고자 한다면 이원성(주체와 대상)에 빠지고 만다. 무슨 체험을 하든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된다. 느끼는 자와 느낌이라는 이원성이 사라질 때까지(유일한 실재만 남을 때까지) 그것을 느끼는 자가 누구인가를 끈질기게 계속 참 자아를 탐구해야 한다. 외부에 무엇이(두려움) 있다고 지각하는 것은 내부에 보는 자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 내면에 있는 보는 자가 누구인지 탐구해 보라. 그러면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두려움 뿐만 아니라 에고를 축으로 하는 모든 생각들도 더불어 사라질 것이다.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추적해 보라. 그러면 육체를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 이니라, 육체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마음(의식)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 한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사랑한다. 자신의 존재가 곧 영원한 각성 상태의 의식이며, 그것이 곧 자신의 참 자아이기 때문이다. 지금 육체속에 있는 동안 순수한 의식에 도달하도록 하라. 그러면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일단 잠이 들어 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깨어있는 동안 생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도록 노력하라. 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조차 생각이다. 생각이 사라지지 않으면 잠도 없어지지 않는다. 생각과 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장애물;, 집중을 방해하는 세상의 감각적인 대상들, 이런 감각적인 대상들에 대한 과거의 기억, 희열이나 지복감(느끼는 자신과 지복 자체가 분리) 이 모든 것을 초월해 지복 자체가되면 즐기는 자와 즐김이라는 이원성이 사라진다.

    명상 수행의 마지막 장애물이 황홀경이다. 고요함으로 충만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그것은 사마디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것이다. 사마디에 들어가면 깨어 있으면서도 잠자는 것과 같은 의식 상태가 나타난다. 그러면 자신이 항상 의식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의식이 그대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은 늘 사마디 속에 있다.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장애물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 참 자아가 아닌 것에 대한 생각을 멈추는 것이 진정한 명상이다. 일단 내면의 행복을 발견하면 결코 밖으로 나가 헤매지 않는다. 자기가 행위자라는 느낌이 온갖 장애를 만들어 낸다. 명상의 요체는 참 자아 탐구이다. 나머지는 모두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의 질문은 모두 생각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대가 느끼는 행복이 아닌 다른 느낌은 다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명상을 꼭 해야되는 이유가 있는가? 이미 모든 사람이 깨달음 상태의 참 자아에 머물고 있다. 생각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참 자아는 병에 걸리는 일이 없다. 병에 걸리는 것은 그대의 육체이다. 하지만 나는 병에 걸려서 아프다고 말하는 것은 그대의 육체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대 자신이다. 그대는 육체를 자신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육체라는 것도 그대의 생각이다. 그릇된 동일시를 벗어나 진정한 그대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하라. 그러면 실망하거나 좌절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명상을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한 곳에 모아야 하고, 그 다음엔 마음을 없애야 한다. 그대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외부의 신은 없으며 신의 시험도 없다. 수행 도중에 생기는 병이나 통증은 병이 아니라 신경과 오관에 나타나는 긴장이다. 마음은 나디(신경 또는 경락)를 통해 외부의 대상을 인지한다. 명상을 하면 마음과 감각 기관의 연결이 점차 끊어지는데 그때 긴장이나 날카로운 통증을 느낀다. 이런 고통은 집중하는 수행을 계속하면 저절로 사라진다. 먹고 마시고 잠자는(최소) 등의 자연적인 욕구를(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행위) 필요 이상의 욕망으로 발전하지 않는 한 기본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은 해가 되지 않는다. 이 세상은 결코 창조된 적이 없다. 현상계가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계가 창조 과정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창조과정을 부정한다. 현상계는 상호 작용하는 물질과 에너지의 집합체가 아니라 참 자아 안에서 원인없이 나타나는 현상계이다. 현상의 본성 또는 근원이 참 자아와 똑같기 때문에 현상계 역시 필연적으로 참 자아의 실재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현상계를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현상계가 실제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상의 본질이 참 자아와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서로 분리되어 있는 객체들의 집합으로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을 통해 인식하는 현상계는 실재가 아니다. 참 자아 안에 나타난 현상으로 직접 체험하는 현상은 실재이다. 현상계는 마음이 만들어 낸 마음의 산물이며 마음이 사라지면 현상계도 사라진다. 여러 가지 이름과 모양으로 나타난 이 현상계는 참 자아 자체의 나타남이지만, 참 자아가 원인이 되어 이 현상계가 창조되고 유지되고 파괴되는 것은 아니다. 무지는 왜 생기는지 묻지말고 이 무지가 누구에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탐구하라. 존재하는 것은 유일한 실재 뿐이다.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신의 계획도 없고 그 계획에 따라 나타난 세계도 없다. 구속도 없고 구도자도 없고 자유도 없다. 오직 하나의 실재만이 존재한다.(無因論) 그대들이 보고 있는 것은 모두 보는 자와 관련되어 있다. 보는 자가 없으면 보이는 것도 없다. 마음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마음 자체가 스스로 만들어 낸 현상을 본다.(同時論) 점진적 창조론에 어떤 결론이 있는가? 보는 자가 없으면 보이는 것도 없다. 창조는 보는 자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보는 자를 찾아라. 진리는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풍경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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