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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41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10. 14.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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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41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Z88H3Tcgwj8

     

    545.

    베다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한 아트만의 본성을 가르쳐 주고, 우리가 바로 그 아트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대는 현상계 안에 있는가 아니면 현상계가 그대 안에 있는가? 잠자는 동안에도 존재하지만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현상계를 지각하지 못한다. 잠에서 깨어나면 현상계가 다시 나타난다. 그렇다면 현상계는 객관적인 실재가 아니라 그대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의 생각은 모두 그대에게서 나온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있는 다음에 현상계가 있으며 나는 참 자아에서 나온다. 현상계란 자신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세계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상상하는 나와 나의 근원인 참 자아를 찾아야만 한다. 이론적인 설명은 지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사변적인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을 보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을 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참 자아를 보고 있는 동안에는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 참 자아만 바라봄으로써 창조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라.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은 먼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현실 차원에서 출발하여 이 세상은 늘 변하기 때문에 고정불변의 실재가 아니라는 단계를 거쳐,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는 참 자아에 도달한다. 거기에 이르면 실재가 아니라고 부정했던 세상도 유일한 실재인 참 자아에 통합된다. 모든 것이 하나의 실재로 융합되면 세상도 실재가 된다. 우주가 참 자아로 인식되면 실재이지만 참 자아와 분리된 객체로 인식되면 실재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환영과 실재는 하나이며 똑같은 것이다. 대부분 종이에 써 있는 글씨만 보지 종이 자체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글씨의 유무에 관계없이 종이는 존재한다. 글씨에 집착하여 글씨를 실재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글씨는 종이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실재가 아니고 환영이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 현명한 사람은 종이와 글씨를 하나로 본다. 종이와 글씨가 하나인 것처럼 브라흐만과 우주도 하나다. 이 세상이 참 자아로 체험될 때는 실재이지만 분리되어 서로 다른 이름과 형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일 때는 실재가 아니다. 연기가 불빛을 가리지만 찬란한 의식의 빛으로 마음이 밝아지면 이 세상의 본성이 환영이 아니라 실재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즉 이 세상을 지고한 실재로 본다.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이름과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 이 세상의 본질은 비어 있음 공이며 지복이다. 그리고 하나이다. 꿈은 그대가 꿈에서 보는 세계의 실재를 의심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깨어있는 동안에도 그대는 그대가 보는 세계의 실재성을 의심할 수가 없다. 그 세계를 만들어낸 마음이 어떻게 자기가 만들어낸 세계를 실재하지 않는다고 의심할 수 있겠는가? 둘 다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며 마음이 어느 하나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의 실재를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의 방향을 내면에 머무른다면 또 모든 체험의 토대가 되는 참자아를 각성한다면, 지금 보고 있는 현상계가 꿈 속에서 보았던 세계처럼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꿈속에서의 느낌은 그대가 깨어있는 상태에서 하는 말이다. 깨어있는 동안 경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대는 지금 이 세계에 몰입하고 있기 때문에 현상계가 실재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자는 동안에도 그대는 분명히 존재할텐데, 만약 현상계가 스스로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재라면 자는 동안에는 왜 나타나지 않는가? 지금 현상계 스스로 나는 실재한다고 말하는가? 아니면 그대가 현상계는 실재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현상계가 마음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 존재하는가? 마음이 있을 때, 곧 깨어있을 때만 존재하지 않는가? 마음이 있을 때만 현상계가 존재한다. 의식은 언제나 자아의식이다. 그대가 어떤 것을 의식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대 자신의 의식이다. 자아의식이 아닌 의식이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런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이 아닌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속성이다. 하지만 진정한 존재인 실재는 the sat 속성이 아니라 실재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실재는 존재-의식 sat-chit이다. 의식이 없는 존재도 아니고, 존재가 없는 의식도 아니다. 그런데 현상계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도 못한다. 이런 현상계를 어떻게 실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 현상계의 본성은 어떠한가 현상계는 변화하는 무한한 흐름이다. 스스로 존재하지도 않고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도 못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실재일수는 없지 않은가. 잘못된 관념 때문이다. 똑같은 강에서 두 번 목욕했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또 똑같은 불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틀리다. 불꽃은 매 순간 변하고 있다. 깨어있는 상태에서 세상이 늘 있는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런 것은 모두 지각의 오류다. 나를 다른 것들과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은 순수의식의 빛이 반사된 빛이다. 이 반사된 빛이 나로하여금 대상들을 만들어 내도록 한다. 그러나 이런 반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사를 일으키는 반사면이 있어야 한다. 현상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존재할 수 있는 영역과 그것을 지각할 수 있도록 하는 빛이 필요한데, 이 둘은 동시에 나타난다. 마음의 빛은 참 자아의 빛이 반사된 것이다. 참 자아의 자리에서 보면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으며 천국이나 지옥도 없고 환생도 없다. 자신의 개체적 자아가 실재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죽은 다음에도 개체적 자아의식이 계속 유지되어, 결국 또 다른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새로운 탄생을 맞게 된다고 믿는다. 그는 이 환생 과정이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마음의 작용으로 진행된다. 왜 더 많이 알려고 하는가? 현재를 발견하라. 탄생과 환생은 육체와 관련되어 있다. 그대는 지금 참 자아를 육체와 동일시하고 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 그 두려움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하는 소리이다. 탄생과 삶 죽음 환생은 잠들었을 때는 생각 안한다. 오직 깨어있을 때만 한다. 그대가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낳고,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낳는다. 그대가 태어났다고 믿기 때문에 경전은 너는 신이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만 경전은 현재의 삶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내일은 내일에 맡기고 오늘의 삶에 충실히라. 에고는 낮은 차원 즉 생각의 차원에 속한다. 체험이란 오직 현재에만 일어나며 현재의 체험을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는 없다. 시간과 공간은 마음이 만들어낸 관념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탄생과 환생은 마음이 만들어낸 환생에 지나지 않는다. 육체와의 그릇된 동일시가 육체가 영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낳고 그 마음이 거듭 태어나도록 한다. 진정한 환생은 에고가 죽고 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개체적인 영혼이 태어났다 죽었다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은 어느 차원에 있든(물질, ...) 거기에 맞는 몸을 만들어 낸다. 깨달음에 도달하면 마음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에 태어남도 죽음도 결코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환영의 사슬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삼스카라(자신이 가지고 있는 경향성)가 남아있는 동안에는 개체성이(죽은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즉 나뭇가지를 잘라도 다시 나오는 것처럼 뿌리가 뽑히지 않고 그대로 있는 한 나무는 계속자란다. 개체적인 영혼은 이래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늘 본연의 우리 자신으로 현존한다. 이것만이 진리이다. 수없는 생을 거치면서 쌓은 카르마도 아주 작은 깨달음의 불꽃 하나로 완전히 태워 버릴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현상계와 현상계를 연구하는 수많은 학문은 모두 에고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대는 육체가 아니며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깨달음을 통해 알게되는 보편적인 실재가 곧 신이고 참 자아이다. 신을 깨닫는 것은 신을 체험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기가 곧 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개체성이란 신과 하나라는 동질성을 잃어버린 결과로 나타나는 망상이다. 망상이 사라지면 신만 남는다. 그대는 늘 현존하고 있다.  있음이 참 자아이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 신이 현존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 세상의 만물이 자신의 행위를 한다. 행위가 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신은 행위(책임)와는 무관하다. 뭇 존재들 모두 합친 전체성이 신이다. 어떤 관념은 그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의 관념이다. 신은 숭배자가 마음 속으로 반복해서 생각하고 명상하는 형태로 그에게 나타난다. 신이 수없이 많은 이름과 형태로 나타날지라도, 그의 본질은 형태가 없는 의식이다. 신이 거하는 장소는 가슴에만 있다. 다른 곳에 신의 왕국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는 관념, 즉 에고가 만들어내는 망상이다. 가슴이 신의 왕국이다. 신의 왕국은 그대 내면에 있다. 그곳은 참 자아의 빛으로 충만하다. 어떤 신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전지전능 하든지 아니든지) 생각하는 것(그게 무슨 상관인가?) 보다 그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신은 영원한 전체이며, 따라서 그가 알아야 할 객관적인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의 생각이 사라진 상태, 곧 생각없는 생각이 진정한 신에 대한 생각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없애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참 자아를 깨닫는 것이다. 이는 마음이 사라지면 고통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 자아를 깨닫기 전까진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진정한 헌신으로 도와줘야 한다. 불행의 원인은 그대 밖에 있지 않고 그대의 에고 안에 있다. 그대는 스스로 한계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넘어 서려고 헛되이 애쓰고 있다. 에고를 무시하고 부정함으로써 소멸시켜 버린다면 자유를 얻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스스로 온갖 어려움을 만들어낸 다음 거기에서 구해 달라고 아우성친다. 창조는 마치 보리수 나무와 같다. 새들이 오기도 하고 그림자를 만들기도 하고 목매달기도 한다. 그러나 보리수 나무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고 조용히 자신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는 순수한 지복의 바다가 있다. 그게 그 사람의 실재이다. 불행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재 속에는 불행이 없다. 상상일 뿐이다. 불행은 개별적인 존재라는 그릇된 느낌이 만들어내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풍경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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