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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45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11. 19.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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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45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KPDcKm6uFUo

     

    - YouTube

     

    www.youtube.com

    549.

    당신은 자신의 초월적 자기를 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눈은 자신의 눈 자체를 볼 수 없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진정한 자기, 아는 자, 내면의 나임이 아니다. 그것은 지각할 수도 정의할 수도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속박이란 보는 자를 보여질 수 있는 이 모든 것들과의 잘못된 동일시에서 비롯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해방은 이런 잘못의 단순한 역전에서부터 시작한다. 오직 신만이 당신의 눈을 통해 보고, 당신의 귀를 통해 듣고, 당신의 혀로 말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안다. 당신 영혼의 심연에는 인류 자체의 영혼이 존재한다. 그것은 신성한 초월적 영혼이다.

    합일의식에 이르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생은 진리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에 먼 곳에서 찾는다. 비유컨대 물 한가운데 있으면서 목마르다고 애원하며 울부짖는 사람과 같다. 진리를 찾는 자는 결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진리임에!

    브라흐만이 곧 그 사람의 자기이지. 그 사람에 의해 획득되는 무언가가 아니다.

    우리의 찾음, 우리 자신의 욕망, 그것이 발견을 앞질러 방해한다. 우리가 찾고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언제나 바로 이 현재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현재 경험으로부터 물러나고 있다. 우리는 진정으로 답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답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다. 합일의식은 언제나 현존한다는 그것이 우리의 본능 즉 본래의 깨달음이다. 바로 이 순간의 근원이자 기반이기 때문에 본래이며, 깨달음이란 현재 형상의 근원이다. 영적 수행은 깨달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합일의식으로 이끌어주는 것도 아니다. 깨달음이란 좋은 기분과 같은 특이한 마음 상태가 아니다. 그대가 앉아 있을 때 존재하는 마음의 상태, 그 자체가 깨달음이다. 좌선에 있어서는 바른 마음 상태를 논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이미 바른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단지 깨달음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길은 무언가를 얻기위해 앉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수행이다. 선 수행이란 우리의 진정한 본성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접시를 닦으면서 본래의 깨달음을 생각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접시닦기 자체가 본래의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저항이라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알 때까지 그는 은밀히 물러나기, 집착하기, 찾기를 계속할 것이고 자신이 물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물러남을 계속할 것이다. 자신의 모든 행위가 저항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합일의식을 획득할 수 있는 어떤 움직임이 있다고 여전히 믿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합일의식에 애당초 있지도 않은 장애물을 세우게 된다. 합일의식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그것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명도는 일체 아무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없다는 것을 간파할 때 자연스럽게 저절로 일어난다. 합일은 언제나 이미 사실이기 때문이다. 저항을 알아 차리는 것이야말로 저항의 해소이며, 또한 이미 선행하는 합일의 인지이다. 당신이 저항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이 저항감이다.

    세계와 자기는 두 개의 다른 체험이 아니다. 다시 단일한 경험이 된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파도뿐이며, 그 파도는 모든 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파도 옮겨 타기를 하지 않게 된다. 현재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재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브라흐만 이외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브라흐만에 대한 근원적인 저항처럼 보였던 것조차 실제로는 브라흐만의 운동이었다. 지금 이외의 다른 시간이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결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신생아의 자기는 물질적이다. 어린이에게 어른으로의 성장은 낙원에서의 추락이 아니다. 깨달은 존재로 성장해 가는 것은 한때 잃어버린 합일 상태로의 복귀(선성의 회복)가 아니라 출생시 이미 시작된 발달 과정의 연속(선성으로의 성장)이 된다. 유아적 자기가 비교적 평화스러워 보이는 것은 천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지옥의 불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는 결코 존재의 기반을 상실하는 일이 없다. 유아기는 무의식적 초개인 단계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전개인적 단계이며, 초합리성, 초언어적이 아니라 전합리성 전언어 단계일 뿐이다.

    역사는 최후의 심판을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전체성을 향해 가고 있다.

    당신이 붉은 색을 볼 수 있는 것은 각막이 붉음 없음 또는 무색이기 때문이다. 공간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당신의 현재 의식이 무공간이기 때문이고 시간을 의식하는 것은 당신의 의식이 무시간이기 때문이다. 형체를 보는 것은 의식이 무형이기 때문이다. 공과 의식은 동일한 실재에 대한 두 개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현시된 세계는 상호 침투하는 과정으로 서로 잘 짜여진 네트웍 또는 홀론 holons이다. 그것은 참으로 일종의 전체론적 모델이다. 현시된 세계와 내면의 나가 둘이 아니다. 그 실재를 발견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면의 나를 따르는 것이지 객관적인 세계 주위를 내달리는 것으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 몸은 (생각하는 마음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도) 내가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아니다라고 부정하고 나면 그것들을 지켜보는 각성(覺性=眞我, Atman)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나다. 각성의 본질은 실재 實在 Sat, 의식 意識 Chit, 지복 至福 Ananda 이다.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인식이 사라질 때 진아를 깨달을 수 있다. 현상계에 대한 모든 인식과 행위의 원인은 마음이다. 따라서 마음이 사라지면 현상계도 사라진다. 생각이 바로 마음의 본질이다. 또 생각과는 별개의 독립된 현상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영혼)이 진아 밖으로 나올 때 현상계가 나타난다. 마음은 항상 무엇엔가 의존하고 있으며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마음과 호흡의 근원은 같다. 마음의 본질은 생각이고 최초의 생각은 라는 생각이며 이것이 바로 에고 ego인데, 바로 이 에고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호흡도 시작된다. 따라서 마음이 가라앉으면 호흡이 조절되고, 호흡이 조절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잠을 잘 때는 마음이 사라져도 호흡은 멈추지 않는다. 호흡은 거치른 형태의 마음이다. 마음은 죽기전까지 육체 안에서 호흡을 유지하며, 죽음과 동시에 호흡을 가지고 가버린다. 따라서 호흡조절 훈련(신의 명상, 만트라, 단식...)은 마음을 가라앉히는데는 도움이 되지만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선한 마음, 악한 마음이 따로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오직 하나 뿐이다. 욕망과 증오는 피하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사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진아는 현상계이고 개아이며 신이다. 자기 자신을 진아, 즉 신에게 완전히 던져 버리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수행자다. 그것은 진아 안에 몰입한다는 뜻이다. 짐이 되는 것은 모두 신에게 맡겨라. 그가 모든 것을 책임질 것이다. 왜 망설이는가? 기차를 타면 기차가 모든 짐을 다 운반해준다. 무엇 때문에 짐을 들고 불편을 감수하는가? 왜 짐을 기차에 내려 놓고 편히 쉬지 못하는가? 자신의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자신을 알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스승) 눈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행복은 진아의 본질이다. 현상계의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 현상계란 생각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진아가 아닌 것을 구하지 않음이 무욕이요. 진아를 벗어나지 않음이 지혜다. 자아 탐구는 마음을 진아 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명상은 자기 자신이 브라흐만(실재-의식-지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구속되어 있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탐구해 들어가서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는 것이 해탈이다.

    명상이나 집중, 관조를 하면서 해야 할 일은 어떤 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있는 일이다. 어떠한 행위를 함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있는 상태 그대로 그냥 머무름으로써 진아가 드러나는 것이다. 진아는 보이는 대상(객체)과는 분리된 보는 자(주체)만이 아니라 이 둘을 함께 포옹하는 제3의 실체이다.(순수의식)

    축축함, 투명함, 유동성 있는 물의 세 가지 속성을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실재-의식-지복 세 가지 측면을 통합된 전체로서 체험된다. 신은 우주를 유지하는 무형의 존재다. 신은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며 우주는 신의 본래적인 힘이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우주로부터 신을 분리할 수는 없지만, 우주가 나타나든 사라지든 신은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대가 바로 각성(진아)이다. 이원성이 사라진다면 누가 누구를 기억하겠는가? 그대는 다만 진실 아닌 것을 진실로 고집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때 진아를 진아로 깨닫게 된다. 그러면 그토록 진아를 발견하려고 애썼던 자신에게 웃음을 터트릴 것이다.

    침묵만이 진실하고 완전한 앎이다. 현상계의 수많은 차별상들은 진실되지 않다. 그것들은 진아의 표면에 나타난 허상에 불과하다.

    우물을 파면 구멍이 생기는데 그 구멍 속의 공간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다. 다만 공간을 채우고 있던 흙을 옮겼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내면에 쌓여있는 오래되고 낡은 축적물을 밖으로 던져 내기만 하면 된다. 그것들이 모두 떨어져 나갔을 때, 진아만이 홀로 빛날 것이다. 자유란 새롭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구속되어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없애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할 때 거기에는 아무런 욕망도 생각도 없게 되지만,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는 한은 스스로 구속되게 된다.

     

    풍경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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