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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30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7. 10.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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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30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wX31KxXM6oQ

     

    534.

    두 가지 공안의 기법

    공안(1);0.1초의 깨달음;예로부터 불성은 이미 존재한다고 말해왔다. 그것은 찾는 것이 아니라고도 말해졌다. 단 한순간에 대오는 가능해진다고 했다. 만약 불성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거기에 도달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시간이 걸리지 않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라면, 그 실현에 필요한 시간은 0.1초 이하일 것이다. 깨달음은 0.1초에 도달할 수 있다. 오히려 인간이 0.1초 이상의 시간과 준비를 만들어냄으로써 실패한다. 제한 시간은 0.1초이다. 그러면 우리들에게는 오히려 할 수 없는 쪽이 많아진다. 호흡이나, 뇌천에 유의, 준비하는 시간, 발견하려고, 잠깐의 의식, 자신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지는 공포 등 긴급 시에는 생각할 여유도 마음의 준비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 절벽에 서게 되면 사람들은 깨닫는 경우가 많다. 우선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고작 가능한 것은 숨을 죽이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하는 것이다. 0.1초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존재 감각뿐이다. 0.1초 속에 이미 있는 것은 자신이라는 자각마저 애매한 무언가, 바로 그것

    찾아도 쓸데없고, 무언가를 해도 쓸데없고,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쓸데없고, 자각도 불안도 쓸데없는 연속적인 무위 그대로 몇 십분 단지 느긋하게 앉아 있는 것이 좌선이다.

    명상이나 좌선 그 자체가, 원래 무엇인가를 내면에서 보거나, 인식하거나, 이해하거나, 관찰하거나, 알거나, 경험하거나 한 끝에 결국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일반적인 오해를 완전히 소멸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참된 명상가는 무, 어둠, 빛을 이미지하는 것이 아니며, 진실한 좌선자는 자신의 본성이나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최종적으로는 대상물로서 아무것도 보지 않으며, 느끼고 있지도 않다. 심지어 자신의 존재조차도. 자신의 행위조차, 그들은 그 무엇도 대상으로서는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 자신 내부의 관조자로서의 존재마저 느끼고 있지 않다. , 그들은 확연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 속에 있다. 그들 중심에 머무른다. 그 이상의 중심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 있다. 그 이상의 내면이라고는 관찰될 수 없는 중심 그 자체가 되어 있다. 중심이 되어 있다란 것은 오히려 그것을 보고 있지조차 않다는 것이다. 그저, 그 중심에 계속해서 존재할 뿐이다. 그저 그렇게 존재한다. 그 속에서 그들에게는 자연스럽게 행위가 일어난다. 이제 그 이상 바로 앞에는 아무것도 없는 장소이다. 하여, 거기에 미혹이나 깨달음이 있을 수는 없다.

    몸은 고통과 죽음의 대상이며 창조의 도구며 위대한 하늘의 쓰임이다. 몸이 먼저 빛이 되고 성불해야 한다. 생명의 본질은 에너지다. 우주적 지성을 가진 에너지다.

    의식은 세상 모든 곳에 편재해 있으며 물질적 신체 없이도 소통이 가능하다.

    가장 발달된 자아나 지성이라면 최후에는 반드시 자기 소멸을 목표로 하게 된다. 자아는 경험의 반복을 통해서 결정화된다. 반복되는 경험이 아니면 자기 동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매번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에 인간은 자기 동화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명상의 체계 중에서 주요한 부분은 반복되지 않는 것만을 실습자에게 경험시킨다. 만약 명상을 하면서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전혀 명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라. 명상이란 절대적 허공에 드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는 그 어떤 것도 반복되지 않는다. 기억에 머무는 것조차 없는 허공과 고요속에서는(무형) 경험되는 것은 어느 것도 반복될 수 없다. 그렇다고 새로운 것도 오래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모두 비교에 의한 구별이다. 만약 그것을 고요나 침묵이나 허무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은 거기에 명칭과 형태를 부여하는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원에 대해서는 결코 무엇 하나도 말할 수 없다. 더구나 그것은 볼 수조차도 없다. 그저 당신은 그것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생존에 불리한 것은 죽음과 연결되므로 나쁜 것이다.

    이 세계의 가치 기준은 모두 죽음으로부터의 거리로 측정된다. 즉 재산이 있으면 굶어 죽을 확률이 적어 조금은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유치하고 경박한 기준일 뿐이다.)

    7가지 재난-유행병, 외국의 침략, 내란, 풍수해, 화재, 상해, 일월식

    먹이사슬의 복잡성 원인의 하나로, 약육강식의 복잡한 먹이사슬에 의해 생물들이 끊임없는 긴장상태와 활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또 먹이사슬에 의해 에너지나 정보도 수송된다. 인간에게 폭력적인 지혜를 제공하여 다른 생물을 제압하고 잡식성을 갖도록 프로그램화한데에는 지구의 생물 사육 관리자들이 인간속에서 먹이를 통해 행해지는 정보의 마구잡이 합성을 실험하고 싶었던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 인류의 뇌는 정보의 믹서기 처럼 기능한다.

    우리들 뇌에는 유사성 검색 소프트웨어’(유리한 생존방법을 발견하기 위한 수단)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우리들 마음속에 잡념(연쇄적인 妄想)이 발생하는 원인이다.

    망상을 제거하거나 깨달음을 체득하려는 그 동기의 근저에 생존욕이 있는 한, 결코 無慾이나 無心이 일어날 수는 없다. 욕망도 무욕을 향한 욕망도 모두 동일한 욕망에 불과하지 않는가?

    착각하지 마라. 무언가 하나의 연구에 오로지 매달리는 것이 하나(一如)된 상태가 아니다. 결코 심리를 무장하기 위한 명상을 하지 말고 좌선을 편해지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마라. 앉으려면 목적없이 앉고 움직일 때는 목적없이 움직여라.

    자아, 사고, 윤리, 우주, 사상, 문명 이것들은 모두 생존 때문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생존이라는 단 하나의 명령속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수단이다. 만약 생존이라는 목적이 제거되면 이것들은 그 자체의 존재 가치를 상실한다. 이 세상에는 공연히 죽음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굶주림(육체, 감정, 지성, 일체화)이라는 기본적인 고통은 생물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인간이 이용하는 모든 물리법칙이란 원자 차원의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에 응용될 수 있다. 고통이 없는 곳에서는 움직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원자 차원의 고통. 그것은 시공간의 왜곡으로서 경험되고 있다. 원자 안에서 일어나는 고통은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전적으로 동일한 감각이다.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만나는 자리(남녀의 분리)에는 반드시 스파크가 생긴다. 처음에 하나였던 것을 두 개로 나눈 경우 분할된 각각의 극에 고통을 낳고 그 고통을 회피하려고 하다보니 제 각각 원래의 하나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존재물(움직이는 모든 것)은 모두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그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 산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고통을 회피하는 작업이다. 고통이란 무엇인가? 고통이란 안정되지 않은 것이다. 안정되지 않은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완전한 소멸 사이다. 완전한 절대 허무야말로 우리들이 를 회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그 이외의 어떠한 차원도 살아있는 한, 움직이고 있고 움직이는 한, 그 근원에 굶주림의 고통이 있다. 이것이 석가가 삼라만상이 곧 고라고 간파한 근원적 통찰이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은 무언가에 굶주려서 괴로워하는 것이고 굶주림을 회피하려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거기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석가가 발견한-은 존재하지 않는 것. 즉 비존재(열반)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석가가 말하는 깨달음이란 다른 종교에서 설법하는 만물이나 신과의 일체화도 아니고 고차원으로의 환생이나 빛으로의 회귀는 더욱 아니며 다양한 차원세계를 의식하고 여행하며 계속해서 학습하는 것도 아니고 영적 세계로의 편입도 아니다. 해탈이란 우주로부터 영원히 사라져 가는 것이다.

    사고와 감각의 초월은 우주를 초월하는 것과 거의 똑같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주란 처음부터 단순한 사고와 감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통합 후에는 우주의 분할과 분리가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통합도 분할도 천사도 악마도 빛도 어둠도 결국은 상대성속에 놓여 있으며, 모두 같이 우주를 돌기위한 작디작은 부품에 불과할 뿐이다. 이 우주의 기구 자체로부터 이탈하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바로 유일하면서 진정한 붓다들이다. 그들은 항상 절대 를 강조할 뿐이다.

    아는 것(=명료함, 또렷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 무언가를 아는 만큼 인간은 너저분해지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도의 최대 원칙은 마음은 결코 명료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곧장 다음과 같이 명료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하나의 답은 항상 100가지 의문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대오자는 깨달음의 순간에 앎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한 無知를 얻는다. 처음의 알기 이전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는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1.도는 처음부터 말할 필요가 없다.

    2.만약 말을 한다면 그 순간 말에 의해 도의 한계를 규정하기 때문에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혹을 구성하는 세 가지의 요소는 사고, 감각, 존재의식이다. 사인선의 세 가지 요소는 두정 유의, 어둠 명상, 각성이다. 두정 유의는 사고를 소멸시키기 위함이고 어둠 명상은 감각을 소멸시키기 위함이다. 각성이란 존재감을 소멸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당신 속에서 존재이 소멸되었을 때 거기에 존재이 나타난다. 깨달음을 얻고나서도 아직 존재한다가 남아있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한 에고여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존재한다 마저 떨어질 때 그것이 깨달음이다. 단순히 행위를 지각하는 것이 비파사나의 본질이다. 그것은 행위자를 자각하진 않는다. 자기(관조자) 성찰에 빠지는 일이 없다. 사물의 현상에 대한 지각만이 있고 관조 주체(자기)가 의식되지 않는 것이 본래 비파사나가 추구하는 것이었다. 사물을 지각하는 주체인 관조자에 대한 자각이 자아를 발생한다.

     

    풍경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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