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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29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7. 4.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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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29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5h-THiecLjs

     

     
    533.

    자신의 육체는 자연의 법칙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 아니며 의식 또한 자기 이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것이 아니다. 사고와 육체의 주인으로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의식의 주인임을 포기했을 때 미소와 미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거기에 있다. 자신이 변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의식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지향성을 과거의 기억에 의해 제어하는 자가 없을 뿐이다. 그러니 나 개인의 선택으로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의식 자체가 보는 것이다.

    신과 인간에게 상호협력이란 터럭만큼도 없다. 우주란 신의 공포의 산물에 불과하다.

    만약 절대 행복인 것이 있다면 우주에서 살아가기 위함이 아니고 존재 세계에서 소실되기 위함이다.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 당신에게는 죽음이 다가온다. 그러나 너무 움직이면 바로 고장이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철저하게 존재 전부, 생의 전부에 무관심해질 때 당신은 죽음에도 무관심해진다. 당신의 안정이란 무관심에 의해 지탱되고 결국 움직이는 것에 무관심해지므로 움직이지 않는 것에 도달한다. 그것이 당신의 존재성 자체이다.

    어둠의 명상;처음에는 단지 어둠의 이미지이다. 이미지란 어디까지나 허상의 다리에 지나지 않지만 깨달음도 미혹도 그리고 살고 있는 것조차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고 하는 이 세상과의 절연 의식이 발생하면 그 명상은 제대로 된 것이다. 어둠 속에 佛法 같은 것이 있을리 없다. 그것은 다만 일 뿐, 무언가를 위한 무가 아니라 단지 . 그곳에서 나와 천천히 세상에 도달했을 때 그 착륙점이 뇌천(腦天)이다.

    깨달음도 최종적으로 어둠의 무가 되어 사라진다. 어둠 속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둠 뿐이다. 절대 무의 어둠 속에서, 한 발이라도 의식이 움직이면, 그 움직임 자체가 방대한 고통과 혼란을 발생한다. 絶對無에 대한 소용없는 저항, 이것이 모든 것의 방황과 고통의 근본 원인이다. 어둠은 단지 명상 대상이 아니라 그 속으로 사라져야 할 무덤이다. 거기가 오직 유일한 우리들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니, 지금 여기에 있느니, 존재성의 아름다움이니, 그저 존재한다는 것 따위는 절대 무로부터 느릿느릿 밖으로 나온 나의 산책로에 불과하다.

    절대적인 정적과 어둠, 무와 가까운 환경이나 대상에 온몸과 온 정신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행법이다.

    세계를 버려라. 우주 바로 그 자체를 버려라. 그러니 이제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 기대도 하지마라.

    어둠의 명상과 친숙해지면 친숙해지는 행위가 차례로 심층 무의식으로 움직인다. 처음은 단순히 어둠에 안정되어 있을 뿐이었는데 이윽고 자신의 근본적인 존재를 뿌리채 로하는 실감이 어디랄 것도 없이 발생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다음엔 아귀와도 같은 수준으로 근본적인 지성의 욕구 불만과 기아 상태를 겪는다. 권태, 무료, 시체 냄새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것이 어둠의 입구다. 그곳에는 출구도 없다. 어느 우주에도 태어나지 않고 단지 사라질 뿐이다. 그것은 확실히 당신들의 실존을 사라지게 하는 절대의 어둠이다. 이미지와 사고와 꿈과 희망을 계속 파괴하라. 모든 인간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환상마저 부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량의 수면 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사고의 홍수(상념의 물결)가 밀려든다. 사고 스스로 자신의 죽음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에게 거듭 죽으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차원에서의 소멸을 뜻한다. 처음에 잠은 당신을 편하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당신을 불안정하게 한다. 그 다음에 당신의 사고가 부패되고 광란하기 시작한다. 죽어가는 사고의 격렬한 저항이 시작된다. 이어서 당신의 뇌는 발효된다. 즉 발광한다. 만약 도중에 도망가지 않는다면 마지막 출구는 깨달음 뿐이다. 그리고 따분함, 태만, 답답함, 혼수(昏睡)의 길은, 강으로 뛰어드는 한순간의 용기가 아니라 지속적인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서서히 산 채로 죽임을 당하는 일과 직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고, 그러한 죽음을 향해 나아갈 때의 그 어딘가에서 전혀 예기치 않게 대오가 일어난다. 단지 죽음의 연습 어딘가에서 갑자기 존재하는 것이다.

    사인선의 공안;존재라는 것은 존재감보다 빠르다. 존재하는 쪽이 존재감보다 앞서 존재한다. 존재감을 계속해서 느껴보라. 그 긴장감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이것이 기본적인 공안이다.  당신의 존재감과 존재감의 틈새에는 무엇이 있는가?”

    만약 당신이 그것을 체험하고 싶은 경우, 그것은 단지 체험하고 싶다는 관심에 의해서는 달성되지 않는다. 반대로 모든 것에 즉, 지금 거기서 일어나는 당신의 감각, 사고, 당신의 자각, 당신의 존재감, 모든 것에 철저하게 무관심해지는 공부를 하면 된다. 그리고 무엇이 인식되어도, 무엇이 이해되어도, 무엇을 느껴도 철저하게 그러한 이해나 자각이나 이것이다라는 것을 단호히 계속 버린다면 그것만이 체험을 가능케한다. 오가는 것은 무엇이든 당신의 본질이 아니다. 끝까지 파고들라

    자신을 정신 활동의 덩어리, 목적 의지, 희망, 호기심, 애증의 덩어리로 계속 인식하기보다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물체로서 존재하는 시간을 가져보라. 그것이 진정한 명상이고 좌선이다. 고뇌는 사고의 산물에 불과하다. 과연 내부의 사고나 걱정은 당신의 사고가 협력하는 것 없이 혼자 힘으로 당신을 괴롭힐 수 있을까

    법의 씨앗은 중생이 갖고 있다. 석가는 아무 것도 지니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있을 뿐이다.

    선정을 위한 이상적인 빛은 붉은 색(암실)이다. 우리들은 어디 있어도 눈을 감으면 실로 언제나 붉은 빛을 보고 있다. 빨강은 우리들에게 친숙한 색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피부에는 혈액이 통하고 있으므로, 눈을 감으면 주위가 어떤 빛이라도 항상 붉은 필터가 끼워져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눈을 감으면 어둡다고 하지만, 그것은 검정이 아니라 어두운 적색이다.

    물리적 암흑의 명상은 빛을 완전히 차단한 방에서 뇌천에 유의하지 말고 어둠을 상상하지도 말라. 일체 할 일도 없다. 무저항인 채 죽음의 심연으로 돌입할 뿐이다.

    가능한 눈 깜박일 때 눈꺼풀에 유의하는 것이다. 무리하게 눈 깜박임을 천천히 할 필요는 없지만 무의식으로 하고 있는 눈 깜박임에서 눈꺼풀의 움직임을 가능한 의식하는 것. 석가의 비파사나는 호흡을 지키는 것이지만, 사인선은 자신의 눈을 깜박일 때의 눈꺼풀 움직임을 감시한다. 눈꺼풀 동작을 지켜보면 필연적으로 눈 깜박임은 약간 늦어질 것이다. 무리해서 천천히 할 필요는 없지만 자연스럽게 조금씩 늦어지게 된다. 정리하면 하루종일 유의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아주 빈번하게 찻잔을 사용할 것. 눈 깜박임을 가능한 한 지켜볼 것.

    사인선의 지관타자;의 지관타자는 그냥 앉아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아무런 변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인선에서 가장 이상적인 좌선은, 처음부터 좌선이 자연스레 일어나는 것이다. 앉고 싶어서 앉는다든가, 앉아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앉는 게 아니라, 정신차리고 보니 깊이깊이 이완되어 어느 사이엔가 앉아 있더라는 식이다. 이것이 진짜 좌선이다. 진짜 좌선은 일어나는 것이며 어떤 의지에 의한 것도 아니다. 전혀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앉아있는 것이 바로 좌선이다. 그곳에는 어떤 동기도 없다. 오히려 어느 사이엔가 좌선 그 자체에 앉게 되는 상태이다. 유암행이란 이 상태가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위한 장치이다. 노력만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동시에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 유암행 이외, 평소에 만약 자연스럽게 앉아 있는 상태가 찾아오면 의식을 무리없이 공중의 두정점에 몰입시켜라. 자연스런 좌선 중에서도 최소한 이것만큼을 하지않으면 광명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삶이라는 긍정성은 광명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것들은 그저 당신이 단순히 약간 이전보다 다소 걸림이 없어져 편안해졌다는 착각에 지나지 않으며 그런 건 언젠가 특정한 상태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게 된다. 이른바 좌선 중독자는 겉으로는 평정을 가장하고 좌선을 즐기는 사람인양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존재 자체와 하나가 되지도 못하며 좌선이나 어둠 명상을 단순한 도피처, 피난 장소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명상에 있어서 무엇을 보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보는 행위 그 자체에 열쇠가 있다. 다시 말해서 누구에 대한 복종이 문제가 아니라 에고가 완전하게 죽기만 한다면 춤이든 섹스든 노래방이든 상관 없지만 그 비워줌은 완벽하게 철저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약물, 알콜, 감기약, 위장약 정도라도 무언가 약물을 복용하고 있는 경우에는 그 어떤 명상이나 과정을 밟아서는 안 된다.

     

    풍경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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