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28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6. 27. 02:39
    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28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13yDI0S5A-M

     

    532.

    죽음은 육체나 정신을 구성하는 물질이 차원이 다른 연기가 되거나 차원이 다른 벌레에게 잡아 먹혀서 형태를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경험과 감정과 불안과 쾌락신호의 모듬에 불과한 것으로 정리되고 통일된 당신이라는 감각이 죽을 뿐이다. 죽음이 당신에게서 빼앗는 것은 단 하나 당신의 정리된 감각 즉 자아이다.

    개성(취향)은 당신이라는 장소에서 자라는 현상에 불과하다.

    명상이란 수평의 차원이 아니라 수직의 차원이다.

    사색하거나 방법을 만들면 관찰 된 것으로 변한다. 그저 그대로 두면 그대로인 것을 아무것도 하지마라.

    깨달음이란 우주의 산물이고 생명을 배반하는 현상이다. 만약 깨달음을 진정으로 체험한다면 당신은 끝장이 난다. 이 우주에 두 번다시 존재할 수 없다. 깨달음이란 덧칠이 아니라 칠을 전부 벗겨내는 것이다. 명상 속에서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는 하나이다. 그때 당신은 바로 지복 그 자체이다.

    광명엔 전부 깨닫든지 아니면 전부 미혹 뿐이다. 그러므로 미혹이 줄어서 광명에 근접한다는 것은 큰 착각이고 오해이다. 점차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한번에 없어진다. 하지만 없어지는 순간의 횟수가 늘어나는 것이 명상이다. 명상에서 안정되기 위한 시간이 조금만 필요한 것은 이 스위치를 움직일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 빛을 서서히 어둡게 하기 위한 시간은 아니다. 명상에 드는 몇분의 시간은 그저 스위치를 내려 어둠에 죽는 단념 각오하는 체념에 필요한 시간이다.

    사실 우리들의 존재감은 실제로 연속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얻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다. 그저 행복하다. 그래서 그저 웃는다. 우리들이 미소짓는 이유를 우리도 모른다. 당신은 깨달을 필요가 없다. 그저 미혹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있다는 자각조차 하지 않는 단지 존재성 일 뿐이다.

    올바름이나 잘못은 주인공인 당신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당신 본인은 그 어느것도 아니다. 내가 무엇을 잃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잃는 것이다. 그것이 광명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불만 이외에 탐구의 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분함(무료함)이란 실제로는 위대한 정적, 죽음, 재생, 변용으로의 이 열리는 것인데 그들은 따분함을 마치 자기 인생을 파괴하는 영역처럼 착각하여 그곳에서 멀리 도망쳐 버린다.

    진정한 명상이란, 일체의 훈련없이 무심에 이르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항상 해결해야 함이 아니라 그저 대면해야 할 것 뿐이다. 해결이라는 강박관념은 애초 자신을 다 버리지 않는데서 비롯된다.

    연속되지 않은 공백(암흑)-대상은 아무것도 없지만 의식은 있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그대로의 존재성이 있을 뿐이다. 자각도 없다.

    당신이 직감에 귀를 기울일 때 이미 거기에는 당신의 사고가 있다.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도 있고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욕망도 있고 그 문제에 관해서 생각한다. 이런 수법으로 직감은 의연히 당신 사고에 이용된다.

    속인과 구도자는 결국 동전의 양면과 같다.

    가치관, 그것은 장애이며 단지 사고, 쓸데없는 잡념에 불과하다. 고는 항상 두 가지 사이에서만 일어난다. 하나밖에 없을 경우는 갈등도 되지 않고 또 자타 공히 유해하지도 않다. 희망이야말로 장애다. 절망이야말로 진정한 공이다. 왜냐하면 희망속에서만 마인드는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러니 절망 속에서 마인드는 출현하지 않는다. 희망은 미래로의 억측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절망이야말로 지금 여기로의 문이다. 관계성에서 자신의 위치를 잡는 버릇이 있는 한, 누구 한 사람도 행복해 질 수 없다. 철저히 개인 내부의 중심에 이르지 않으면 모든 세계는 어중간한 협조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당신 혼자서 가야 한다.

    명상의 성과(자기변화, 반성, 자기개선, 좋음)를 항상 인식하려 한다. 그 까닭에 명상가가 바로 명상 속에서 사라질 수 없다. 즉 이것은 바로 존재와의 거리를 낳는다. 견성하지 않는 한 당신은 무엇을 해도 틀린 것만 만들 따름이다. 깨닫고 있지 않으면 타인에게 도에 관해서 말하지도 권하지도 마라. 개인의 문제로서 필요로 하는 행법이라면 그것은 타인과 관계없다.

    에고는 목적을 잊고 수단(수법)에 매달리는 악습이 있다. 동기를 부여하는 자극일 뿐인 것은 활동유지와 존재에 역점을 두는 것이지 우주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은 아니다. 애초 우주가 존재한 이유는 영구히 답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오이즘은 우주의 존재 그 자체를 무가치로 하는 출발점에 서서 우주를 바라본다.

    극도의 안정은 죽음과 유사하다.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 하는 자는 안정을 얻을 수 없다.

    계속 움직이려면 당신에게는 반드시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살기 위해서 필요한 물건이나 행위, 또 하나는 그것을 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고통이 생기는 시스템이다. 꺼져 사라지는 것을 우주는 허락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사고 자체에는 사라지지 않으려는 본능이 있다. 그러므로 살아 남으려해서 고통을 낳는다. 이것이 마음의 고통이다. 아는 만큼 다툼만 벌인다. 적어도 자기 사고를 옆으로 놔두기만 해도 좋을 텐데 딱하게도 사고가 생존경쟁을 시작한다.

    명상이란 죽는 연습이다. 죽는 것에 대한 안심이 없다면 당신은 모처럼 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 한다. 완전한 공, , 그것이 당신 최후의 집이다. 이 지구에서 죽음에 대해 직면한 것은 불교, 타오, 선 뿐이다. 다른 모든 종교, 마술, 신지학 등은 죽음을 그저 육체의 환승 혹은 그저 통과라고 착각한다. 낙원, 천국, 고차원의 윤회, 그리고 또 다른 혹성이나 항성이나 차원 단층으로의 윤회, 이것들은 죽음이 아니다. 그저 이동이다. 그들은 결코 인간을 한 사람의 붓다로 만드는 경우는 없다.(, , )

    모든 생물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법칙은 활동을 정지하지 않는 것이다. 즉 정지하도록 만들어져 있지 않다. 결국 우리는 우주에 있어서 진화나 변화 보다 높이 발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 움직이게 하기 위한 상업적인 부품은 아닐까? 의의, 의미, 가치관, 희망, 동기, 목적, 철학, 종교, 사회, 예술, 과학 같은 것은 활동의 촉진을 위해 덧붙여진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며 그 총칭은 움직임이다. 우주는 움직이기 위해 즉 만물에게 멈추지 마라라는 명령을 실행시키기 위해 각각의 생물이나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그 활동이 감소하면 고통신호로 압박하는 수단을 쓴다. 그 동기와 근거는 그저 붕괴하여 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만물의 활동법칙은 무로 소멸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굶주림과 고통을 참고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활동을 계속하도록 설계했다.

    철학이란 사고의 자유다.

    날이면 날마다 불만에 빠지고 공포를 느끼며 사고하는 생물은 비단 지구인만이 아니라 우주 전역이 마찬가지였다. , 고통을 감지할 수 있는 생물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우주의 수요는 그들을 거듭 개량하도록 요구했다. 그곳에서 식량의 축적을 익혔다.

    계속해서 다음 발신을 보냈지만 무료해졌다. 무언가 영문도 모른 채 불안정해졌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인류는 그저 사는 것만으로는 불만스러워졌다. 무언가에 굶주린 것이다. 이 굶주림은 감정적인 것이다. , 이번에는 감정 차원에서 무언가 섭취하지 않으면 생존에 불안과 불만이 늘 따라다니도록 프로그램된 것이다. 이것은 굶주림의 차원이 조금 변화된 것에 불과하다. 이리하여 점차 부가되는 기관들은 반드시 그 차원의 에너지를 섭취해야만 보존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이리하여 정보에 대한 굶주림이 생긴 것이다.

    언어 자체는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오해가 생겨나고 다시 그로부터 갈등이 생겨났다. 우선 인류가 지성을 이용해서 해결하려 한 최초의 불만은 언어의 커뮤니케이션 한계. 즉 오해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그림이 나오고 문자가 만들어진 것이다.

    고차원 지성체라 해도 거기에서는 진화나 정보를 추구하는 기아(飢餓) 프로그램의 영향을 받고 있다. 식물이든 기체든 그 무엇이든 소위 신진대사가 필요하다. 이것이 정지하거나 정체되면 체내의 하위 중추에서는 고통을 느끼고, 감정 중추에서는 불안이, 지성 중추에서는 고민이 된다. 음식물, 충동, 정보 등의 에너지가 적당하게 출입하고 교환되면 건강체로 존재할 수 있다. 그 대가로 인류는 항상 고통과 쾌락을 끊임없이 왕복하게 되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획기적으로 참신한 기획이 등장했다. 고통과 갈등에다 새로운 공포를 제공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되면 전 우주의 생물로부터 생존 의지의 에너지인 루슈를 채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가 막히게도 그것은 사물에 대해서 질려버리는 기능이었다. 이는 당연히 지성 중추의 개량을 통해서 발생했다. , 시시함을 느끼는 중추이다. 똑같은 것을 하면 무료해한다. 한가해지면 무료함을 느끼도록 고안이 된 것이다.

     

    풍경 120.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