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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26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6. 12.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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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26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UbJxvl41VpQ

     

     
    530.

    어느 때인가 무료해져서 자살하는 현상이 전 우주에 만연된 적이 있었다. 이를 보자 기획자는 초조해졌다. 전 우주에 생존 의욕이 급속하게 저하되는 현상이 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측이라는 지성 센터의 게임이 시작되었다. 항상 모르는 채로 무언가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하는 만성적인 불안 상태가 되었다. 그리하여 무엇이 옳으냐?의 논쟁이 시작되었고, 이 올바름을 증명하기 위한 게임이 시작되었다. 더구나 옳다고는 알고 있지만, 인류의 중추 특성 때문에 실행할 수 없었던 올바름의 기준 즉 계율을 주면, 인류는 양심의 가책이나 죄악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이 기획자는 여기저기에 조금씩 다른 신의 개념 또는 현상을 시험적으로 뿌려보았는데 그 결과, 겨우 몇 가지 다른 신의 개념을 뿌렸을 뿐인데도 인류는 스스로의 불신에서 비롯된 불안 때문에 상대방 신의 개념을 없애려고 나섬으로써 치열한 전투 상태로 돌입했다. 이에 대해 기획자는 크게 만족했다. 애매한 신념은 항상 흔들리는 불쾌감의 원인이 되어, 두 가지의 행동이 일어난다. 하나는 적대적인 것의 부정과 파괴, 또 하나는 집단을 거대하게 만듦으로써 다수결이 옳다고 굳게 믿는 것으로 안심하는 방법이다. 마침내 애매한 진실과 신에 대한 신앙을 서로 상대방에게 강압하는 게임이 시작되었다.

    육체를 관리할 필요가 없는 세계에 사는 존재들은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 여기서부터가 본질적 문제이고 또 석가가 제시한 불교의 근본 문제이다. 어떠한 진동 밀도의 차원에서도 그곳의 거주자들 혹은 생물, 또는 어떤 존재이든 생존 유지를 위해 반드시 모종의 움직임을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은 소위 이 모든 차원의 거주자들의 식용 생물이 될 수 있는, 아주 뛰어난 칼로리 메이트적 생물이다. 우리들은 다른 생물을 섭취함으로써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들보다 상위의 존재는 우리들의 감정, 기억, 사고, 지각, 의식 자체를 그들의 생존을 위한 먹이로 삼는다.

    만약 지구 인류나 지구의 생물들이 붓다와 신에게 사랑받는 자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주 차원에 있는 종족의 먹이를 공급하기 위한 가축이나 곡물로서 품종 개량된 존재들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어떨까? 인간은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즐겁고, 감정적으로 괴롭고 즐겁고, 지성적으로 괴롭고 즐겁고, 의식적으로 괴롭고 즐겁다. 이는 우리들의 자주적인 인간 존엄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를 키운 목장주는, 우리들이 육체나 감정의 희노애락 혹은 지성이 만드는 비전, 성을 추구하는 충동 혹은 깨달음을 구하느라 우리들이 괴로워하고 깨달음을 달성했을 때 발생하는 신호를 모조리 수확한다. 그야말로 우리들을 중국 요리에 쓰는 한 마리 돼지처럼 정신도, 육체도, 남김없이 식용으로 취급하고, 그 때문에 우리들이 태어났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들이 사는 길에는 다음과 같은 표지가 걸려 있다. ‘멋대로 해라, 다만 반드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자유롭게 살라. 무엇이든 하고 싶은대로 해라. 그래봤자 어차피 인류는 진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뇌, 쾌락, 사고, 사랑, 미혹, 깨달음, 공포 등을 그대로 발생시켜 주지 않으면, 우리들이 먹이를 손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실 인류는 지금 그대로도 좋다. 그저 그대로 좋다. 너희들에게 공복이나 공포로 고통이 발생하면 그것을 기꺼이 먹는 자가 있고, 너희들이 희노애락을 가지면 그것을 기꺼이 먹는 감정 생물이 있으며, 너희들이 깨달음을 얻으면 그것을 기꺼이 섭취하는 의식체가 있으니, 그야말로 인류는 우주의 칼로리 메이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구의 역사에는 잘못이 없고, 너희들의 행동에도 잘못은 전혀없다. 현 상태 그대로 공복과 병마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허무감에 괴로워하며, 지식을 수집하고 과학 예술에 몰두하며, 비참함, 애증, 전쟁과 미혹을 계속 왕복하면서 더욱 크게 번식하라. 우리들은 시기가 되면 너희들을 수확할 뿐이다.

    우리들이 육체에서 깨달음이라 불리우는 의식에 이르기까지, 全身全靈은 우리보다 상위의 어떤 존재자의 먹이다.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것이 인류의 우주 존재에서의 현실적인 위상이다. 이 결론에서 우리들이 얻는 올바른 삶의 방식이란 다음과 같다.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무엇이라도 좋다. 다만, 더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고, 울고, 번민하고, 방황하고, 깨닫고, 저주하며, 그리고 살아라. 사는 것에 집착하라. 또 움직임을 절대 멈추지 마라 이 기본 명령은 우리들 유전자에 입력되어져 이것을 변경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우리들은 윤회를 해서 어떤 상위 차원(신계, 불계, 멘탈, 원숭이 혹성체, 항성체, 은하계 의식체 등)에 태어나든 영구히 식용 가축으로서 생존을 계속한다.

    그런데 최후의 의문이 남는다. 그 전체의 우두머리로서 우리들을 생산하고 식용으로 먹는 그자는 절대적인 지배자인데 왜 우리와 마찬가지로 먹이를 필요로 하는가? 단 한 가지 이유라면, 우주의 절대자는 존재 유지병, 활동병이라는 신경증을 가진 거대한 병자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그자는 당초 왜 그처럼 비열하게 존재를 유지하려는 것일까? 사실 그는 를 두려워한다.

    당신은 완전한 무능, 무력, 무가치하다. 정말 시시한 생물이다. 당신 한 사람이 그곳에 존재할 가치는 전혀 없다. 우주는 인간을 중심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외부 우주의 무수한 지성, 무수한 생명, 소위 무수한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마치 사람의 혼이 우주를 영원히 여행한다는 환상적인 꿈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 사실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우주적 규모의 의문을 당신들에게 계속 들이댔다. , ‘좋겠지. 훌륭하다. 영구히 배우고, 진화하고 즐기며 계속 변화하라. 몇억 년의 세월의 끝에서 혹 한순간 당신은 무엇을 위한 진화이며 무엇을 위한 우주인가?’를 물을 때가 올 것이다. 그때 당신은 우주를 하나의 모형 정원으로 이해한다. 곧 생에 절망하고 또 존재에 절망하는 날이 올 것이다.

    루슈-생존욕으로의 집착, 무에 대한 공포

    우주는 그저 분해와 통합을 되풀이 할 뿐이다. 의미나 목적 근거 원인은 없다. 그저 그럴 뿐이다. 우주는 존재하려는 의지 때문에 존재한다. 존재를 향한 의지가 우주의 근거이다.

    인생의 이유는 전부 생존을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전혀 진화됨이 없이 육체는 단지 오직 자아만을 의식하도록 만들어졌다. 루슈(안정하지 못하고 항상 움직이고자 하는 의지)라는 것은 외로움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외로움이 원동력이 되어 무언가 갈등의 움직임을 만드는 일에 이용 가치가 있다.

    인간의 동요=초조함을 발생 시킬 때에는 마음이 진동한다.

    생물 속에 자아까지 만들어버리면 다른 동물에게 습격당하지 않아도 루슈를 만들고, 죽지 않아도 루슈를 만들며, 지켜야하는 가족이 없어도 루슈가 나오고, 완전히 외부에서 손대지 않아도, 자기 갈등과 고뇌와 그에 따른 움직임을 만들어준다. 이리하여 자아를 발달시키기 위한 감각 부가와 고차원 의식의 미량 주입, 나아가 사회적인 종교, 경제, 도덕 등에 따른 심리적 갈등과 자아가 발달하여, 관리자가 전혀 손대지 않아도 인간은 스스로, 점점 더 많은 루슈를 생산하는 것이다.

    우리들 혼이 식물에서 동물로 태어난다면, 움직이지 않던 식물일 때는 필요하지 않았지만, 동물이 되면 많은 구조와 관리가 필요해진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육체 관리가 더욱 귀찮아진다. 움직이면 상처도 입고 고통도 늘어난다. 움직이기 위해 신경을 발달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외부의 적에 대한 감지 능력도 향상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식물이라면 가만히 흡수하면 충분할 양분이건만, 동물이 되자 일일이 움직이고 포획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결국 무엇이 늘어나게 되는가? 바로, 긴장이다. 결국 可動性 생물이 된 이점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갈등과 고통만 점점 더 늘어날 뿐이다.

    진화 계열상 인간이 멋대로 칭한 것으로 상위에 위치하는 동물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등생물보다 괴로움과 갈등하는 기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우주에서 여러 혹성의 생물 관리를 해온 관리자, 발안자가 애당초 왜 유기체를 식물에서 동물로 개량했는지를 직시한다면, 그것이 안정되게 살아남기 위한 진화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 , 안정된 생존을 하는 생물이 아니라 불안정한 생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동물이 되면 식물보다도 몇백배 더 갈등 수요가 늘어나기 때문에, 하물며 지능을 가진 인간에 이르면 자기 관리를 위한 혼선 요소가 늘어 동물의 몇백 배가 된다. 그리고 자아를 발달시키는 점에서는 가동성 생물은 그 목적에 적합하다. 피부 감각과 운동 감각의 발달은 개체의식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지구인이 경솔하게 일반적으로 우수하다고 부르는 생물학적 발달의 모습은, 각도를 바꾸어 갈등 요소 부가의 결과로 볼 때, 너무나도 명확해진다. 어느 차원에서도 벌레처럼 끊임없이 안정하지 못하고 활동하는 부품을 만들어 낼 목적으로 인간과 이른바 지적 생물이라 명명된 것은 창조되고 개량된 것이었다.

     

    풍경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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