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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24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6. 1.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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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24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pJYkDKpLw0g

     

    528.

    (깨달음)이란 타인이나 세계와의 관계성 속에 존재할 수 없다. 오직 도 그 자체와의 조화 속에서 완결된다. 즉 그것은 결코 인간을 위한 도는 아니다. 그것은 의식 그 자체를 위한 여행이다. 따라서 깨달음이 세상이나 인간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하는 논의에는 결코 영향을 받지마라. 그런 논의에 빠지면 의식이 외부의 환상을 향하기 때문이다. 관계성 속에서 존재 의의를 찾는 습관이 있는 한 그 누구도 행복해 질 수 없다. 철저하게 자기 내면의 중심에 이르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은 (육체가 아닌) 의식으로서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는 것이다. 생애 내내 나와 함께 하는 타인은 그 누구도 있을 수 없다. 혼자란 하나. 개인이 완전한 개인으로서 독립했을 때만 진정한 전체성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의 에고란 실제로는 철저한 혼자가 아니다. 단지 타인이나 사회 정보의 집합일 뿐이다. 그러나 도에서는 오직 혼자만의 공이 있을 뿐이다.

    인간이 동물에게는 없는 자아를 가진 결과 정신적 안정을 찾아 외부세계를 헤매게 된 것이다. 동시에 지혜있는 자는 자아를 이용하여, 그 중심부까지 쳐들어가 세계에서도 버림받은 개체로 이르는 도를 깨닫기도 한다. 깨달음의 순간에는 철저하게 심리적으로 혼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최후에 오직 하나가 남는 것이다.

    바보가 되는 자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바보로 있는’(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않는 것, 성취욕에 있어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것. 그러면 어떤 긴장감도 없고 진정한 느긋함, 편안함이 있다.) 자는 오직 각자 뿐이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영리해지려고, 높아지려고, 동등해지려고, 바보로 취급되지 않으려고 한다. 바로 이것이 괴로워하는 심리적 이유다. 일종의 비교(자신이 무언가 알았다는 생각) 를 산출한다. 객관적으로 시시한 일, 쓸데없는 일이란 없다. 그것은 단지 당신이 동의할 수 없고 좋아하지 않는 것 일 뿐이다. 상식 또한 옳은 것은 아니다. 단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주 지원하는 것에 불과하다.

    신이 인간의 고를 그처럼 용인하고 있는데 왜 내가 나설 필요가 있는가? 세상의 모든 바보스런 양상은 똑똑(최고)’하고 정상이며 착한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데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바보이고 가장 낮은 최저 최악의 인간, 악인이 될 것. 비교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면 타인보다 낮은 위치에 머물라.

    아무 문제가 없다면 고는 발생하지 않는다. 항상 당신에게 현실 감각을 동반하는 사건이 고다. 고란 사건의 내용과는 전혀 관계없다.

    無常이란 어떤 면에서는 현상에 안정이 없기 때문에 고라고도 할 수 있다.

    불행의 원칙;세계에 대한 오감이 섬세하고 현실 감각이 강한 때(의식은 오감을 통해 밖으로 유실된다.) 의식에 불안한 동작이 있는 경우, 자기 동일화 된 사고가 있는 경우

    지복의 원칙;세계에 대한 현실감각(마음도 포함)이 희박한 경우

    절박함(진지함)이 없다면 아무것도 이뤄지지(변용) 않는다.

    모든 경론은 마음의 부주의의 뒤처리에 지나지 않는다.

    명상의 체험성이든 논리이든 사라지기 위한 구실이든 살기위한 구실이든 당신이 구하는 것 자체가 우주에서는 감쪽같이 연료로서 매각된다. 당신이 논리의 주도권을 마치 지성이 장악한 것처럼 착각하는데 지성이나 이성이란 그 자체가 존재가 생명을 연장하려는 수단으로서의 기계의 일부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주가 상관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좋으니 움직이고 실감해서 이 우주를 유지하게하는 것 뿐이다.

    지성활동 그 자체는 우주가 회전하기 위한 일곱 가지 음식 중의 하나다. 지성은 자유의 산물이 아니라 그것은 단순히 거름, 연료, 동작이다. 따라서 내 마음의 침묵이란 필연적이다. 그것은 발광의 회피라는 필연성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구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구하는 마음이란 우주의 양분이 되는 비료이기 때문이다.

    대오에는 함께 죽을 대상(사고와 관념이 결집할 핵, 구도심, 절대적인 철학기준, 동결되는 고...)이 필요한 것이다.

    깨달음의 갈망은 (모두 외부로부터의 교육 때문이다.) 覺者들이 수행하던 바탕에는 없었다. 오히려 그 이전의 문제로서 깨닫지 않으면 안되는 다른 이유가 있다. 깨달음은 그들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깨달음이란 와 욕망을 계속해서 줄인 곳에 있다. 그런데 고 역시도 를 계속 줄인 곳에서 비로소 고가 본체의 핵(고제)을 드러낸다.

    격리실에 갇혔을 때 완전한 의식체라면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사고체라면 당신은 자신의 머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사고가) 환각 속에서 미치고 말 것이다.

    지금의 우주는 (대실패의 뒤처리 작업에 불과) 앞 세대의 우주(관리가 실패한 결과)가 일단 멸망하고 그들 사이에서 이라 불리는 한 점으로 응축되어 있던 우주가 의 응시에 참을 수 없어서(우리들은 너무 긴 어둠에 질리고 질렸다. 그래서 세계를 만들었다.) 껍질을 깨고 나왔다. 즉 세계가 깨져버린 것이다. 한순간에 음양 양극의 연쇄 반응이 일어나 우선 6차원에서의 세계의 주형이 만들어졌다. 그후 그 주형이 응고되면서 차원이 내려갔을 뿐이다.

    우주 최대의 고문은 유폐(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결코 소멸될 수 없는 채로 계속해서 를 맛본다.)이다. 고제의 진짜 근본원인은 생명이 무한한 정지 상태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생존욕도 욕망도 동작도 고통도 자아의 갈등도 무료함도 그 모두가 이차적인 고의 산물에 불과하다. 생명으로서의 일차적인 고는 절대의 靜止 있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들이 늘 그것과 직면하기 때문에 생명은 늘 그곳에서 도망치려고 한다. 절대 무의 공간이 우주의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 속에 있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 거기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 고는 어디까지나 존재물의 설계상 구조적인 고.

    현실이란 습관적인 사고와 관습적인 감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심령적인 영역은 다른 차원 층의 사고와 감각이다.

    진정한 구도심은 낮에 자고 한밤중(새벽 2-4)에 일어나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낮 시간대의 정상적인 생활과의 단절을 통해 당신의 존재 혹은 현재에 균열이 생길 것이다. 한밤중의 어둠에서 철저히 홀로일 때 정적과 허무에서 탐구는 시작된다. 이는 존재 세계로부터 소멸되기 위한 방법과 논리다.

    우주의 영업(생명체험 게임)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게임에 질린 자는 그저 혼자서 허무 속으로 사라지면 될 일이지 타인까지 끌고 들어갈 필요는 없다.

    명상을 하려면 항상 내용없는 대상(하얀벽, 어둠, 두정)을 고르는 것이 좋다. 내용이 없어야 사고가 만들어 지지 않고 그만큼 본성에 가까워지고 자기 동일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명상중일 때 한순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무지의 감각이 엄습한다. 이때가 개오의 직전이다. 무지와 동일화 되어라. 깨달음 자체는 이것이다라고 지적할 수 없다. 그 원인은 본인 스스로 바로 깨달음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거기엔 오직 지복(만족)만 있다. 깨달음 그 자체는 영원히 미지의 향나무와도 같다. 그 향취를 맡고서야 비로소 그것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거기엔 앎이 필요없다. 무언가를 알아야만 되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만스럽기 때문이다. 아무리 깨달음을 추구해도 당신이 그것에 굶주려 있는 한, 앎은 깨달음을 알고자 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알고자 하는 움직임 즉 무언가를 대상화하려는 움직임을 停止(멈춤)하고 또 靜止(물체가 그 위치를 바꾸지 않고 움직이지 않음. 또는 그 상태)하는 일이다.

    지복 이외의 그 어느 것도 개오의 증표가 될 수 없다. 지복이란 만족을 느끼는 감각 그 자체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그것을 만들어 내는 본원은 항상 알 수 없는 것. 대상화 될 수 없는 것이며, 깨달음조차도 대상화 하지 않는 것이며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

    도에 있어서 無知란 특정 지식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상화 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앎이란 바로 대상화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깨달음을 체험하고 싶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알려고 하지 말고 무지 안에서 전면적으로 停止하는 일 뿐이다. 깨달음이란 무심이라는 환상 에고조차도 본래 있지도 않은 허구일 뿐이다. 그것들은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진아를 자각하는 것. 깨달음, 관명, 자기개선, 변화...)에 눈이 멀어버린 상태로 마음이 잡음을 일으켜서는 명상이 될 수 없다.

    확인하려 하지마라. 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에고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명상이란 수단이 아니다. 단지 그곳에서 완결된 지금을 말하는 것이며 진아에게 당신이 溶解되는 것이다. 명상에 목표란 일체 없다. 명상을 즐기려는 것조차도 쓸데없는 사고다.

    만약 고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면 극히 미약한 에 대한 희망과 바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지막 한발을 내딛기 직전에 죽지 못했다

    관조라는 것조차도 사고가 행하는 것이다. 관조란 일어나는 것이지 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관조하는 의식이 자신의 본성이라고 당신이 생각했다면 그것은 그 시점에서 이미 단순한 사고에 불과한 것이다.

     

    풍경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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