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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21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5. 10. 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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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21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iTV97nOhB3M

     

    525.

    보고도 못본척하는 것이 에고의 특기이다.

    로리타 콤플렉스;남자가 나이 차가 많은 젊은 여자를 사랑하는 현상. 어린시절 어머니의 간섭을 많이 받고 자란 남자가 그녀에 대해 반발심리를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하며 여성들의 사회적인 파워가 강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유약해진 남성들이 보다 젊은 여자에게 집착하게 되는 현상이다.

    기본 행법은 처음 1개월 한다. 이후 가끔해도 좋다.

    접심 2주간 꼭 할 것. 나중에 가끔해도 좋다.

    유암행은 무기한으로 한다.

    또한 최종행법의 필수항목을 병행할 것

    인식자가 인식자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비체험의 원리이다.(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 그때는 존재의 주체 그것과의 사이에 一如가 일어난다. 즉 전혀 거리가 없어지는 것. 이것이 환희의 정체이다. 신이 신을 인식한다. 깨달음 그 자체가 깨닫고 있다. 존재감과 존재감의 사이에 몰입하라.

    우리들의 에고는 진정한 단순함, 간소함을 두려워 한다. 에고는 복잡한 논리나 곤란한 수행, 전통적으로 보증된 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자신의 에고가 채워지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고 있다라는 자아가 기뻐한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해지는 것을 에고는 가장 두려워 한다. 하지만 타오도 불교도 에오이즘도 목표로 삼는건 오직 에고를 소멸 시키는 것이다.

    선은 항상 사실 그것 만을 문제 삼는다. 선은 설명을 싫어하며 설명하는 것을 外道로 본다.

    에오이즘의 기본 요점-목적을 가져서도, 희망이나 기대를 가져서도, 소중한 것을 가져서도 안된다. 가치와 의미를 무시하라. 할 일 없이, 아무 것도 탐구하지 말라

    종교나 과학이 이념이나 이상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고통에 대한 공포심 쾌락에 대한 욕망이다.

    우리 인간에게 공통적인 죽지 않으려는 본능, 생존하기 위한 본능 그 자체야말로 모든 폭력과 전쟁의 근본원인이다. 그 결과로 강박관념이나 열등감, 우월감, 자만, 공포와 망상, 타인에 대한 파괴, 자기 파괴 등이 일어난다.

    좌선을 통한 변화에 지나치게 구애받는 것은, 마치 싹이 막 움튼 식물의 잎과 뿌리를 짓뭉개는 것과 같아서 마침내 식물을 죽이고 맙니다. 변화는 어디까지나 부드럽게 지켜보십시오.

    에오이즘의 公案

    1.중간에 존재감이 끊어진 곳에 앉아버려라

    2.원래부터 붓다라 불리우고 있다면 0.1초에 깨달아라

    3.그밖에는 진심으로 자신의 사멸을 생각하고 혼 조차도 죽는다는 것을 고찰할 것. 육체뿐만이 아니라 본질적인 혼의 완전한 죽음이 도의 문입니다.

    4.우주만물의 본래 존재가 옳다라는 전제를 전부 내던지고, 우주 만물에는 고상한 목적, 불법, 높은 수준의 인간성의 획득, 진화의 가치 등 그 어떤 것도 없이 그저 우주 만물의 존속과 활동유지만을 위해서 갈등하고 있음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삼라만상이 절대무를 두려워하면서 계속 윤회하고 있을 뿐인 절대사실을 철학적으로 직면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결코 구원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진정 돌아가야 할 장소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행복해지려는데 그 원인이 있다.

    좌선은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무심히 편안할 뿐이다. 깨달음의 결과로 무심해지진 않는다. 무심히 있는 것만으로 이미 그것이 깨달음인 것을 알게 되어 빙긋이 미소지을 뿐이다. 무엇인가를 추구하다가 그것이 얼마나 필요없는 것인가를 알게 되기까지 필요없는 것을 다 하는 것이 수행의 전부다. 고기를 낚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가 고기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른다면 막상 고기가 잡혀도 당신은 고기를 버릴지도 모른다. 스승의 평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직 본인이 만족해야만 한다. 두려운 것은 알려고(파악할려고) 하기 때문이다. 움켜쥐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에 움켜쥘 수 없어 두려운 것이다.

    깨달음 이란 무엇입니까? 무엇입니까란 깨달음인가?

    찾는 것은 마음이 보고 얻는 것이다.

    앉고 나서 그리고 깨닫고 나서 행복해지려 하지마라. 앉았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행복하지 않고서는 좌선이 되지 않는다.

    죽음 뿐 아니라 생의 그 어떤 것도 당신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용의주도함(그 동기의 근저에 선악이 있다.)이 당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무언가 되려고 하는 마음만큼 세속적인 것은 없다.

    악은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것이다. 실로 고통은 안정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모든 것이다. 그것이 불행의 정체이다. 선은 선악 분별이 고통의 원인이다.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결국에는 자기 성취욕의 먹이로 삼으려 한다. 현대인들은 욕망(성취) 으로 받아들이도록 철저하게 주입 받으며 성장했다. 진정한 공포 그것은 완전한 자기 소멸이다. 생물은 언제나 잔혹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안에서 고통스럽지 않게 끝날 현상만을 보며 살아간다. 자기 마음의 응원단만을 오합지졸로 끌어모아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행위는 자연과의 보조에 크게 모순되고 있다. 따라서 그 모순의 결과가 고통을 낳고 불안한 악을 산출한다. 선은 본질적으로 논리를 싫어한다.

    死神이야말로 의 어머니이다.

    선은 세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오직 한 명을 구할 뿐이다.

    생명이나 자연섭리 활동에서 본다면 애초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규칙위반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육체도 자연이고 무위이다. 그리고 뇌세포까지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법칙에 의해 무위로 자연스럽게 활동한다. 육체도 자연인데 대체 어디에서 미망이라는 고뇌가 당신에게 생겨나는가?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자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곳에 논리가 있다는 증거다. 방석을 쌓듯 자신의 이해를 (작은 선적인 경험) 차곡차곡 모아서 깨달음을 달성하려고 한다. 선은 지금 있는 것으로 앞뒤를 재단(가치관, 선악)한다. 그러나 논리적인 파괴 작업이 필요하다. 미래 영겁까지 앞뒤가 파괴되어서 내가 갈 곳이라곤 지금밖에 없다. 그것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단 하나 남겨진 장소이다. 즉 남은 장소이지 얻은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꿈이나 희망은 반드시 시간의 맥락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선은 지금의 기백으로 앞뒤의 맥락을 자르는데 만약 앞뒤도 없이 근본적으로 도망칠 장소가 완전히 암흑이 되었다면, 사람은 수행하지 않아도 지금 이외의 그곳 밖에는 갈데가 없을 것이다.

    우표를 수집하는 사람을 바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우표를 수집할 것인가?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은 하나이다. 무엇보다도 제일먼저 배워야 할 것은 구하지 않는 것이다. 보여지는 세계가 모조리 사라지지 않는 한 진아의 실현은 없을 것이다. 존재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본다면 환영이든 물체든 이념이든 그 무엇이든 그것은 중심이 아니다. 중심은 없다. 바로 . 일체 무. ‘그것 뿐이다. 보여 지는 세계가 세계로서 있는 동안 아트만은 나타나지 않는다. 명상에 의해 세계가 사라지고 최후에 그것을 보고있는 자마저 사라질 때 진아가 실현된다. 그의 방편은 우선 자신에게 의식을 향하고, 나아가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자가 누구인가를 묻고, 자신의 의식 존재를 보는 존재의식에 접근하면, 이윽고 주체와 객체를 구별할 수 없어져 일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다가온다. ‘나는 누구인가에 답이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물음으로써 당신의 의식이 밖으로 나가도록 제어장치를 걸 따름이다. 아무런 사고도 없는데 괴로운 인간은 없다. 문제나 고민은 모두 사고가 연루되어 만들어 진다. 그런데 존재도 그 무엇도 일체 떠나 버린다면 당신의 고민은 없어질 것이다. 당신 안에서 일체의 의문이 떨어지는 것(묻지 않는 것) 그것이 깨달음의 한 모습이다. 만일 질문을 한다면 질문과 대답 사이에 있지도 않는 시간이라는 가공의 거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란 질문도 아니고 대답도 아니다. 그저 그대로, 지금 여기, 이대로 그저 이것이다.

    지혜는 반드시 미혹하게 된다. 그러나 지혜라는 실체조차 없는 무지로서의 지금 여기서는 이제 미혹조차도 없다. 그러나 붓다란 안자’, ‘깨달은 자라기 보다는 순수한 존재자에 지나지 않는다.

    삶이 순수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순수해야 한다.

    모든 것이 이고 일체가 소멸한다. 따라서 의미도 없는 그저 무일 뿐이다. 당신의 의미나 의분을 완전히 포기했을 때에만 당신의 본성은 이윽고 일체의 만물에서 해방된다.’ 그러기 위해선 어떤 가치관도 어떤 세계도 있어서는 안된다. 오직 무, 어둠 뿐 무엇이든 당신의 내면으로부터 분쇄하라. 얻는 수행이 아니라 잃는 수행이다.

    자신을 고양이라고 부르는 고양이는 없으며, 자신을 풀이라고 부르는 풀도 없다. 사람은 자신들을 이름 짓고 정의한다. 하지만 다리는 다리에 불과하고 표찰은 표찰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의 누구나가 부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생이 부처라는 표현이 가져온 폐해는 마치 부처가 인간 이상의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無明이며 無力이며 無知이며 無理解.  존재한다는 자각조차 하지 않는, 단순한 존재성이다.  아무 것도 아닌 자로 돌아가는 것이다. 중생은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미혹에 빠져있고 승려는 자신이 승려라는 미혹에 빠져있다. 어느쪽이건 버리는 쪽이 진정한 승려이다.

     

    풍경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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