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19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4. 16. 22:54
    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19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KiFXT1JXvLw

     

    523.

    자연은 생과 사를 가르지 않는다.

    이 세계란 깨달음의 종자가 터지기 위한 땅 속이며 땅 속에서 개화되는 꽃은 없다. 땅 속은 꽃이 피는 장소가 아니다. 자궁은 아이를 만드는 장소이지, 아이가 자라는 장소가 아니다. 고로 세상은 붓다들을 만드는 장소지 붓다들이 사는 장소가 아니다. 여기는 생활하는 장소가 아니다. 여기는 태어나는 장소이다. 고로 세상 일에 상관말고 세간의 존재 방법은 그대로 내버려 두라. 세상을 바꾸려 하든지 타인을 바꾸려 하든지 타인을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된다. 누구나 깨달은 채로 태어난다. 누구나 이미 깨닫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깨달음으로 돌아오는 것을 이 사회는 광기라 부른다.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이 죽으면 형태(원소의 배열)를 바꾼 것에 지나지 않듯이 정신도 차원이 다른 형태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은 아무 것도 죽은 것이 없다. 그저 형태를 바꾼 것이다. 육체는 빌린 것이므로 자연으로 되돌려주는 것이 당연하다. 마음이나 정보나 지식, 경험도 마땅히 자연에 돌려주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은 당신의 정리된 감각, 즉 자아이다. 그래서 광인들은 진정한 죽음에 살아있는 채로 직면한다. 죽음이란 그것은 언제든지 당신의 죽음 뿐이다. 정리되고 통일된 당신이라는 감각이 죽을 뿐이다. 그 감각이란 약하게 그저 경험과 감정과 불안과 쾌락신호의 모습에 불과한 것. 살아서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고 쓸데없는 참견을 하고 쓸데없는 것만 말하고 쓸데없는 행동을 하는 실로 시시한 당신이 죽을 뿐이다.

    원래 개성이나 견해 경험을 포함해서 자신의 것은 어느 하나도 없건만 그것을 내것이라 하면서 고뇌가 발생한다. 마음이나 사고 경험, 개성, 지식, 능력은 개인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개인(당신)이라는 장소에 발생했을 뿐이지 완전히 개인의 것은 아니다. 즉 그것은 생물학적인 것이지 당신 고유의 것은 아니다. 당신은 자신의 취미의 오합지졸(취향)을 개성이라 부를 뿐이다.

    를 넘으면 항상 괴로움이 된다. 즐거움이란 경미한 고통이고 극도의 즐거움을 고통이라 한다. 그러니 고락이란 자극의 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의 생태학적인 허용한도를 기준으로해서 갈라져 있을 뿐이다.

    성욕과 식욕은 같으면서 전혀 반대의 것. 하나는 부족을 보충하고 하나는 과잉에너지를 배설한다. 그런 이유로 생식기는 배설기관 가까이 붙어 있다.

    과부족이 아닌 적당한 것이 안심의 원인이다. 그런데 생물학적인 혹은 우주의 원칙으로서 과부족을 조장하는 것이 우주를 활동시키기 때문에 보다 즐기기 위해서는 보다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되며, 더 즐길수록 더 괴로운 것이 생긴다. 또 항상 이 두 가지를 왕복하는 것이 일반적으로는 생명활동이라 불리운다.

    절망이란 채워지지 않았던 실망감이 몰려드는 사고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사회나 실망감 보다는 당신은 그 감각이나 사고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것이다.

    붓다는 사물을 나누지 않고 선택하지도 않고 도망치지 않는다. 도망치는 것은 생을 연장하려 하는데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란 미혹의 부재이지 깨달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안심이란 불안의 부재이지 안심이 잇는 것은 아니다. 안심이란 편안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이 없을 뿐이다.

    우리는 정보에 갇혀 있기 때문에 정상인 것이다.(청각도 무서우리만큼 그 범위가 좁다.)

    당신 홀로 있으라-그것은 정신체가 죽는 것을 의미한다. 탐구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혼자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만이 도사가 된다.

    깨달음에는 주인공이 없다. ‘내가 깨달은 게 아니다. 깨달음이 자기 스스로 깨달음에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날 보겠지. 하지만 그곳에는 내가 아닌 있는 자가 있을 뿐이다. 우주의 존재도 아니다. 그것과 하나로 되었을 때에만 느낄 수 있다.

    사람들도 연구자들도 그들이 살아온 것에서만 선을 본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사고의 산물이다. 그것은 내면 뿐만이 아니라 외계의 물질도 원래는 사고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그 사고가 이미 믿음이라는 광기 그 자체이기 때문에 당신의 육체며 사고, 지성이 전부 미쳐 있다는 기반 위에서 존재한다. 대우주에서는 생과 존재 자체가 애초부터 전부 미쳐있다.’ 우주인조차 그들의 현실 속에 갇혀서 미쳐있다. 그렇다면 미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사고가 아닌 것 뿐이다. 사고는 감정의 근원이다. 감정은 육체의 근원이다. 그러면 사고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의식의 운동이다. 그렇다면 의식이 멈추면 어떻게 될까? 만물은 사라지고 그저 원래부터 이미 있는 게 있을 뿐이다. 이것이 붓다가 본 것이다. 방황이란 이것 이외의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은 생명 그 자체가 한 것이지 당신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단 한 가지 잃은 게 있다면 그것은 내가(그 속에 당신도 포함된다.) ‘무엇을 잃을까가 아니라  그 자체를 잃는 것이다. 자아의 소유물이 아니라 자아 그 자체다. 그것이 광명이다.

    7 영의 세계;육체 physical, 에테릭 eyheric, 아스트랄 astral(집단 무의식, 꿈의 3차원), 멘탈 mental, 스피리추얼 spiritual, 코스믹 cosmic, 니르바닉 nirvanic

    사회적인 행동을 일체 버려라. 사회에서 무심하게 바보로 불리우는 자들 그들이야말로 생명과 죽음의 신비를 전부 알고 있다.

     당신 자체이다. 당신은 나다. 나는 그저 단순한 의식이다. 따라서 당신도 그렇다. 선은 본질적으로 초월성이 기본이다. 타오의 본보기는 항상 자연이다. 오락, 학습, 과학, 예술, 종교 이것들은 단 한번도 인간을 행복하게 한적은 없다. 그것들은 사회적인 생활을 합리화 시켰을 뿐이다. 그것들은 끊이지 않는 지성, 감정, 에고, 육체적인 과잉 자극에 대한 굶주림을 확대 시켰다. 그것들은 외부 우주로부터 인류에 대해 조작된 불안산업’, ‘기아산업’, ‘고통산업이 의도한 책략적 결과의 산물이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거의 모든 것이 잡음이다.

    잠이 내일의 생명이라는 강제노동을 위한 연료보충 행위

    우주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은 단순한 기억의 사고와 감각 정보 뭉치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의 세계가 고작 사고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있어서 그곳에 예외의 사고란 있을 수 없다. 無常 속에서 살아 남는 것은 오직 존재성 밖에 없다. 당신은 자기가 있다고 믿고 있다. 되풀이해서 같은 것만 이미지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겨우 자기라는 것이 있음을 믿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되풀이해서 당신에게 여느 때와 똑같다고 안심시켜 주는 것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여느때와 똑같은 육체, 환경, 정보, 감각 탓이다. 그 항상 변함없는 당신들의 심리적인 밑바닥이 단 한방의 충격으로 무너질 때가 온다.

    자기가 만들어 낸 사고 속에 사는 것을 그만두라. 계속 깨라. 부숴라. 이미지라는 것. 사고라는 것. 꿈이며 희망을 계속해서 깨라. 늘 죽는다는게 실은 당신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구원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와 당신이 끝장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본성으로 돌아갈 수 없다.

    고독감은 어딘가에 의존이 있다. 고독이 아니라 단순히 누구도 필요없는 혼자인 것이다.

    습관적인 반응, 이런 일은 전부 당신 속의 사회가 하고 있는 짓이다. 선은 그 당신을 소멸시키고 오직, 당신 스스로, 당신에게 자연스레 일어나는 행위만을 평가 할 뿐이다.

    중생은 방황없이 방황한다. 雲水(출가 승려)는 방황하는 것을 망설이며 방황한다. 석가는 방황을 모른다.

    무사고가 사람을 불행하게 한 예는 한 번도 없다. 한편 사고가 사람을 행복하게 한 예 역시 한 번도 없다. 번뇌를 박살내는 일에 사고를 기울이면 불성도 바로 잃게 되지. 법은 결코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동기는 반드시 손익계산이 따른다. 자연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법률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자연의 균형을 무너뜨린 적이 없다.

    지혜를 더하면 더할수록 법에서 멀어져 간다. 과학은 어차피 능력이 없다. 늘 쓸데없는 걸 만들어 내고 그 뒤처리를 위해 또다시 쓸데없는 것을 만들어 낸다.

    대오란 단 한방에 끝난다. 그리고 그것은 무심이라는 후유증을 남긴다.

    나는 단 한 가지도 내 의상을 갖고 있지 않다. 내 의상은 전부 빌린 것이다. 지식도, 방편도, 인간으로서의 내 개성까지 그 모든 것이 빌린 것이다.

    단 한 가지 선이 나쁘게 보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당신이 손(참견)을 대는 것이다.

     

    풍경 111.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