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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18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4. 11.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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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18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ruMYgxxMx-I

     

    522.

    자연의 만물은 안녕’, ‘고마워’, ‘미안합니다.’, ‘그래 그렇겠지 말하지 않는다. 수다도 푸념도 늘어 놓지 않는 그들의 가장 아름다움은 사회성이나 체제나 위선이 없다는 것

    인간이 미간에 주름을 만드는(생각하고 있다는 증거) 원인은 의문, 의혹, 혐오, 혼란, 사색, 비참함, 갈등, 강조, 강압, 공격, 분노

    그것은 비교 검토의 사고가 당신에 의해 시작되어지기 전의 당신 일이다. 눈은 눈을 볼 수 없다. 눈은 눈으로 있을 뿐. 하물며 보여진 쪽의 영상이 어떻게 해서 눈을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가? 따라서 생성되어진 쪽에 있는 당신의 사고가 생성시킨 원래의 의식을 인식한다든지 이해하려고 한 시점에서, 그런 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악행을 저지르는 범죄자는 최저가 아니다. 그들은 타인에게 있어서 최악이라도 그들 본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좋은 일(만족, 쾌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가장 낮은 곳의 사람이란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죽은 자와같은 존재다. 고로 최저야말로 無敵의 정점이다. 정점은 반드시 무너진다. 하지만 밑바닥은 무너지는 일이 없다.

    그들이란 말하자면 당신이다.

    쫒거나 기다리거나 바라거나 보려거나 느끼려거나 되려거나 하려거나 기원하거나 하지마라. 그만둔다는 것조차 안된다. 그냥 그치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개인 단 한 사람 그 개인이 탈출 할 수 없는 광기로부터 구출해내기 위한 최후의 길이다. 그것은 단 한 사람 당신이 편안해지면 되는 것이다. 자기 한 사람이 계속 편안히 지낼 수 있을 때 만이 진정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전혀 도움이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도움이 된다는 등의 생각도 완전한 환상이다. 무지만이 구원이다.

    만약 어둠을 당신이 대면하는 집으로 삼는다면 누구도 어떠한 체계도 가치관도 당신의 의식에 불필요한 덧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엇이 칠해져도 어둠 앞은 .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무언가로 삼지 말라. ‘아무 것도 아닌 것 아무 것도 아닌 그대로이다.

    감정이 만약 남김없이 제로가 되었다면 그것이 禪定의 본질이다. 그러나 만약 불투명하게 무언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번뇌라 불리운다.

    건강체로 앉은 그대로 그 자리에서 시체가 되어보라. 시체는 살아있는 게 아니라 물질로서 단지 존재한다. 자연에 있어서 생과 사는 절대적으로 똑같은 가치이다. 생을 원한다면 죽음을 지불하라. 불행과 근본적으로 만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가장 근본적으로 불행한 이들이다.

    감각 능력의 확대, 논리 사고의 발전과 확대의 끝이라는 도달점에서 광명을 고도로 발달된 극점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광명이란 실제로 모든 능력의 상실이다.

    일상과 종교는 강박관념과 희망으로 넘쳐난다.

    히말라야에서 명상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정말 명상적인지 아닌지의 시련은 세간에서 시험해 보아야 한다.

    당신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당신의 지각, 이미지, 사고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 뿐이다.(타인과는 상관없이) 그곳에 당신의 현실이 있다.

    다수결은 집단적인 생존을 위한 타협(집단적인 미치광이)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 안에 있는 것은 그저 당신의 육체적, 심리적 쾌감, 혹은 불쾌감과 직결되는 사건 뿐이다. 당신은 그러한 자신의 반응들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만 살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당신이 있음으로써 당신의 현실이 있다. 당신이 없어지면 현상은 당신 없이도 존재한다. 당신이 있든 없든 현상은 계속 있다. 그런데 당신이 없어진다면 당신의 현실은 없어지고 현실이 당신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한, 당신이 없어지면 현실도 없어진다. 때문에 세계를 어떻게 하는가는 당신의 사정이다. 그 세계가 되는 것은 당신 내부의 것이다.

    발견되는 것은 실제로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이 있다.

    깨달음, 대오, 사마디, 모크샤(자이나교에서 궁극의 자유의 경지), 니르바나, 광명

    당신이 깨달았다면 의식은 지금 이 순간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게된다. 당신은 대오 이후 단 하루의 경과도 느낄 수 없게된다. 의식에 머문다면 당신에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란 기억의 배열, 비교에서 생기는 감각정보나 기억의 배치 방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깨닫고 있다.’는 결코 인식되지 않는다. 그곳에는 단지 깨달음이 존재할 뿐이다. 깨달은 자는 이해자가 아니라 존재자이다.

    사토리;깨달음

    실은 세속의 인간은 모두 출가한 꼴이다. 모두 존재의 본성으로부터 출가한 채로. 실은 질문을 하는 자는 무지한 자가 아니다. 진정 무구하고 무지하다면 질문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묻는다는 것은 이미 당신 안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 결론을 내린 것이 반드시 있다. 질문은 당신의 분별이나 자신이 알고 있는 몇 가지의 기존의 앎을 조합해서 발생한다. 40세까지 모든 큰 쓰레기를 쌓았다면 남은 20년 동안 그것들을 전부 떼어내라. 당신에게 모든 것이 필요없어지면 당신은 현재에만 머문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필요하다는 관념을 떼어내는 일 이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색과 형태로 메워져 있는 것이 중생의 눈이다.

    혼란이란 당신이 알려고 하는 것에서 생긴다. 알려고 하지 말고 무지가 가장 편안한 것임에 익숙해져라. 무언가를 알았다고 해서 당신의 작은 머리로 대체 우주의 무엇을 알았단 말인가? 지혜 따위는 필요없다. 별 것 아니다. 당신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아무 것도 보지 않으면(무심)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다.

    광명에는 on/off 밖에 없다.

    TV 제작 방침-움직이는 그림책;따분한 진실 보다는 재미있는 거짓말

    육체의 기능적인 측면에서 발생한 심리적 성질(부성원리나 모성원리)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생물학적인 것이므로 본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얻음에 따라 채워지는 (즐거움) 것은 항상 욕망(의 산물) 뿐이다.

    섹스와 식욕은 동질의 것이다. 우리들은 그저 생물학적 에너지 발생의 인자에 지나지 않는다. 남녀 분리도 그저 방편에 불과하다. 우리들은 우주에 떠도는 단순한 전기 에너지에 불과하다. 그 에너지 발생에 박차를 가하는 수단이 단순히 남녀의 분리였을 뿐이다. 진정 굶주린 자와 굶주리고 있다고 말만하는 자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다.

    침묵 속에서 무언가를 알게되는 것이 아니다. 침묵 바로 그것이 문이다.

    가장 나쁜 모습의 부품이 생동감 넘치는 생의 충실감을 원하는 기능이다. 그것은 반드시 정반대의 극을 필요로 한다. 당신이 기뻐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괴로운 것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고체 생물의 절대적인 오락의 조건이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산업이었기 때문이다. 그 감정이나 사고의 전체적인 진폭은 다른 천체의 생명체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에너지로 취급된다.

    요슈아;그리스도의 다른 이름. 유태어의 이름 앞에 붙음

    을 만나서 을 죽이는 것이 선이다.

    어둠이나 무를 보는 것(자각)이 아니라 당신이 어둠과 무가 되라. 무엇을 지각하고 있는 한 아트만의 실현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때문에 진실한 자기를 아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다.

    이해란 당신 과거의 기억이 당신 머리 속에서 정리가 되고 단순히 정보가 정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추측, 추론이란 그것을 미래에 투영하는 도박에 지나지 않는다.

    무를 논하거나 탐구하면 당신은 어떤 선문답에도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무가 된 때에만 당신은 어떤 선문답에서도 놀 수 있다.

    생에 대한 감사는 집착만을 낳지만 죽음으로의 수용(이제 여기서 죽어도 좋다.)은 집착으로부터의 이탈을 낳기 때문이다.

    공부하려고 하는 마음을 모두 말살하는 것이 진정한 좌선.

    자연은 생물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분별이나 구별하지 못하고 그저 있다.’ 초목은 자신을 초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존재 할 뿐이었다. 그저 존재하고 있기 위해서 그저 존재하고 있는 것 만이 필요하다. 초목이 시드는 것을 거부하면 결국 이 세상은 멸망하고 말 것이다. 초목은 빛만을 사랑하진 앟는다. 또한 초목은 날씨를 구별(좋다. 나쁘다.)하지 않는다.

     

    풍경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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