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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20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5. 4.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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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20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QPfdJ8HN3Fw

     

    524.

    본래 자신의 사고에서 자각이 나온다. 하지만 드디어 갈 곳이 없고 배출구가 없는 사고는 한동안 몸부림 치며 뒹굴다가 관찰받는 자로 위치가 바뀐다. 따라서 입을 다무는 것(침묵)’은 우선 자기에게 되돌아가기 위한 첫 번째 길이다. 입을 다문 당신의 다음 길은 세상에서의 위치 확인이다. 눈을 감아보라. 수많은 소리가 들릴 것이다. 현상이 벌어지는 현장은 바깥세상이다. 하지만 지각의 현장은 바로 당신(연못)이다. 생각하고 결과를 보고 사고며 감정이며 기억으로부터의 행동이며 모두 당신이다. 그래서 변혁도 탐구도 관찰도 그 대상은 어디까지나 당신으로부터 시작된다. 다음은 귀를 막고 말해보라.(연못을 본다.)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그리고 당신 스스로에게서 깨어나라.

    대오;大死底의 사람. 자아(에고)의 완전한 소멸.

    깨달은 후의 수행은 오로지 철저하게 아무것도 하지 말것. 그냥 멍하니 있으라. 태만의 극한적인 경지이다. 생각도 하지 마라. (대오 후에 찾아오는 대오의 상실 때도 동일. 작은 깨달음 후엔 좌선하라) 애초 깨달음 그 자체는 원래부터 당신이 한 일은 아니다. 존재가 자연스럽게 한 일이기 때문에 깨달음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그 뿐이라 생각하는 겸허함과 유연함을 가져라.

    보석을 손에 넣은 인간에게만 보석을 던져버리라는 사실이 의미를 갖는다. 애초에 보석을 손에 쥐지 않은 인간에게는 그런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사랑은 스스로 일어나는 그 모든 걸 허용하는 것으로 완벽한 무조건이다. 그것을 할 수 있는건 타오 이외에는 없다. 이는 붓다들을 제외한 당신들 그 누구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또한 단 한번도 지구상에서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붓다들은 이 세계와 우주가 사라져도 허무 속에 있다. 그들은 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고는 그것의 반대 관념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무엇이건 당신 마음의 무언가를 거부하고 거절한다면 그 순간부터 당신은 반드시 당신이 거부하는 그것에 사로 잡힌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그 순간부터 그것들에게 지나치게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이란 당신 내부의 모든 사고를 의미한다.

    지장이란 그 모든 경험을 넘어서 허무에 사는 각성된 의식체, 무구한 에너지와 고요함, 시작이며 끝인 의 존재가, 어떤 필요한 순간에 그것을 자기 개인의 내부보다 깨달음을 손실하고, 굴러 떨어지고, 민중과 하나가 됨으로써 완전하게 타오를 달성하는 자이다. 예수의 최후는 지장으로의 전락이었다. 이렇게 해서 (십자가 위에서) 어렵게 타오가 완료된다. 높은 곳이 높은 곳에 그대로 있어서는 다리는 결코 놓여지지 않는다. 완전한 보통 사람으로의 전락이야말로 타오의 씨앗을 뿌린다. 그런 연유로 지장은 당신들과 같은 세계로 내려왔다.

    철저한 불행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사람은 단 1초도 광명 속에 돌입할 수 없다. 당신은 몇십분씩 명상하기 보다도 지금이라는 것 속에 더욱더(無思考) 철저하게 날카롭게 쳐들어가라. 지금 안에는 연기할 어떤 목적도 애초에 명상을 하는 자도 당신도 지금을 잡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변용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단 한 가지 순간은 2분간의 절대 무심으로 당신이 죽을 각오로 덤벼들었을 때이다.

    진짜 좌선은 동기가 없다. ‘일어나는 것이며 어떤 의지에 의한 것도 아니다. 유암행이란 이 상태가 자연스레 일어나기 위한 훈련이다. 평소에 만약 자연히 앉은 상태가 찾아오면 의식을 무리없이 공중의 두정점에 몰입 시켜라.

    원칙적으로 인간은 정지된 대상물에는 집중이 안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사인선의 두정유의이다. 무턱대고 의지를 갖고 애를 쓴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라 집중하는게 아니라 두피의 감각이 시시각각 강해지거나 약해지고, 징징거리는 위치나 범위가 변화하는 모습을 <관조>함으로써 집중이 된다. 기를 모으는 것과 같은 무리한 집중이 아니라 그냥 두정 부근의 감각의 변화를 잡고 느껴줌으로써 무리하게 집중하지 않아도 유의는 깊어진다. 또 감각은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지겨워 질 일도 없다. 의지를 집중하는 게 아니라 관찰력을 집중함으로써 자연히 지속적인 유의를 하는 것이다.

    얀트라;도구, 도형이라는 뜻으로 특정한 형태는 의식을 각성시키는 힘이 있다. 사각형, 삼각형, 육각형, 원형 등의 추상적인 도형들을 배치한 특수한 그림들로서 내면 의식의 세계를 추상적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 얀트라에는 각기 고유한 기운이 있는데 기감이 발달한 사람들은 그것들에서 나오는 기를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을 자신의 기로 만들 수 있다.

    여간해서 어둠 명상으로 전환이 안될 때는 두정의 위치를 전두부(이마의 머리 솜털이 난 경계 부분과 두정 사이의 거의 중간 5cm)에 유의해 보라.

    자살은 죽음이 의식되어서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삶에 대한 과잉반응이 원인이다. 따라서 삶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사람은(확실한 현실을 갖지 않은 사람도) 자살하지 않는다.

    의식체, 붓다들, 동물들, 유아들은 자살하지 않는다.

    책임이란 선악의 판단에서 생기기 때문에 선악의 분별이 없는 사람에게는 책임감도 없다. 철저한 무책임이야말로 강박관념으로 부터의 해방수단이다. 책임감이란 사회적인 體裁(자신의 관점이나 자기 입장을 타인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일)와 평가, 내면적인 자기 평가로부터 생겨나는 강박관념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공포로부터 도망치려는 행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책임감이 강한 사람(선악의 분별이 확실한)은 자살률이 높다. 자연계는 항상 붓다 그 자체의 의식체이기도 하다. 자살의 원인은 분명한 이기 때문에 고가 없으면 자살하지 않게 된다. 살아있다는 자각이 없는 생명체는 자살을 생각하지 않는다. 경험하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 어설픈 분별이나 정의를 내리고, 예측을 하는게 자살의 원인이다. 즉 무언가에 사로잡혀서 불안한 고로부터 편안해지고 싶어서 그리고 자신이 살아있는 상태를 이상하게 규정하고 있어서 또한 제정신이란(사회적 평균) 무엇인가를 확정해서 정해 놓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분별이야말로 자살의 원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분별한데다 나아가서 그 어느 한 쪽이 옳다고 믿거나 감각적으로 어느쪽인가를 편애해서 고집했을 경우에, 괴로움이나 모순에 따른 갈등이 생기고, 생명의 고나 발광에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살하면 편할 것이라 생각하고 자살한다. 자살의 원인은 편한 것을 찾는데서 생긴다. 자살 후가 고라면 아무도 자살을 최종수단으로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자살은 편함을 찾는 충동에서 비롯된다. 사실 모든 수행이나 고행은 세상에서 가장 쉽고도 편안한 길의 탐색이다. 논리적으로든 감각적으로든 철저하게 편안한 것을 타오로 부르며, 본래 선이란 철저하게 편함에서 비롯된다. 종교의 본질이란 안락이나 안심에 있는 것이지 수행차원이나 목표달성 게임으로서의 수행에 있지않다.

    무지가 안정의 원인이다. 앎이야말로 붙들리는 원인이다. 이것이 타오의 근본이다. 선은 견성이든 깨달음이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문제 삼지만 타오는 그것을 망각하고 망연자실을 항상 의 바른 길로 삼아왔다.

    탄트라;틸로빠-나로빠 naropa-마르빠 marpa-밀라레빠 milarepa

    타오, , 탄트라는 시공간을 문제삼지 않는다. 내일이 되면 깨달음을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 여기에서만 깨달음의 소재를 확정하고 있다. 그래서 노력이나 오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이 달성된다고 보지 않는다. 또한 깨달음이 어딘가 자신과 다른 곳에 있거나, 특정 선사나 특정 토지에 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가치관의 완전부정과 절망의 완벽함(절대 무와 존재) 결국 진리나 옳음이란 없는 것이다.

    eoism;타오, , 탄트라, 원시불교가 목표로 한 정적, 침묵, 절대 무, 무위라고 보는 것. 즉 모든 것을 무가치하다고 간파하고 철저하게 우주를 경멸 또는 무시함으로써 가치관이나 목적을 벗어 납니다. 이것이야말로 본질이 아닌 것을 부수면, 본질은 스스로 남는다. 따라서 수행으로 기법을 쌓는게 아니라 덜어 냄이 깨달음의 문이 된다.

    진정한 불법에 있어서의 말의 용도는 개념이나 습관의 파괴(항상 사고를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며 결코 설명을 구축하는 수단이 아니다. 따라서 도사란 결국 제자가 심신이 동시에 침묵할 때까지 계속 떠드는 것이다.

    對機法;석가가 법을 설한 방법의 하나로 제자나 질문자의 근기에 맞게 가장 적절한 가르침을 전수하는 것을 지칭한다.

     

    풍경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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