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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22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5. 16.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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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22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CGXuIQhSwoI

     

    526.

    인간이 꾸며낸 지성이라는 껍질을 도려내지 않으면 사람의 본성 중심에 도달하지 못한다. 경지 따위는 아무 것도 없는 바보 그 자체이다. 아무 것도 모르면 모를수록 당신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낼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을 혼란시키고 불행하게 만든 것은 자신이 무언가 소중한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망각해버리면 과거 당신이 체험한 것이 아닌 당신이 지금 현재 체험 중인 것만이 남기 때문이다.

    눈앞의 현실이란 그 자체가 사람마다 전혀 다른 것이다. 선이 말하는 주의집중, 순간에 깨어 있음 등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잡념은 시각정보에 의해 만들어진다. ‘정말 지금 여기란 무엇일까? 그것은 오직 그 순간에 그 사람이 지각하는 세계가 현실인 것이며 현실이라는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이란 생물의 지각 속에만 있다. 두 사람의 인간 사이에는 처음부터 현실감각에 어긋남이 있다. 하지만 진짜 이것이란 대상물이 아니라 그것은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자신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즉 자각도 자기도 의식도 없는 것이다. 空性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이다. 그곳에 언제라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라는 중심이 아니라 無名의 중심이며 오직 존재하는 것이다.

    답은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도 모르게 우러 나오는 것이다. 거기에는 완전히 지금이 된 의식이 있을 뿐이다.

    꽃은 말한다. ‘우리들은 어떤 계열의 불법에도 속하지 않아. , 나는 당신 눈 속에 들어 있어 人法이 되지말고 대자연의 법이 되라. 자연이 당신을 통해 도를 설법하도록 하는 것이지 당신이 를 설법해서는 안된다. 당신이 설법을 하는게 아니라 법이 당신을 그냥 통과한다. 도는 모르는 채 전달되는게 좋다. 당신은 깨달음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그것을 잊어라. 그때 부처가 비로소 당신을 통해 사람을 인도한다. 부처는 빈 그릇을 정말 좋아한다.

    소오는 무지를 알고 있음이며 대오는 그 무지조차 모르는 것이다. 무언가를 알고, 알 수 있고, 이해하고, 가 확실하게 보이고, 잡히는 일이 당신들의 내면에 자각되어 일어난다면 그것은 모조리 목표를 벗어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당신의 사고는 이해, 숙달, 확신, 확인을 기뻐하도록 교육 받아왔다. 하지만 그래서는 대오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르게 된 지점이야말로 당신의 중심 자체이기 때문이다. 진짜 무위자연, 자연법이 그 속에서 터져 나온다.

    하나의 가치가 존중될 때 그 반대의 것은 혐오 당한다. 선도 악도 우열이 없어졌을 때 사람은 그 어느 쪽도 가치를 두지 않고 무심해진다. 어느 한쪽이 우세하면 그쪽을 계속해서 고집한다. 그것이 똑같아지면 시시한 것이 된다. 시시한 것에 사람들은 결코 머물지 않는다.

    당연한 것은 사람들에게 항상 평화를 가져온다. 도에는 일정한 규칙이 없다. 그래서 도는 붙잡을 수 없다. 현자의 마음은 고요하지만 그의 발자취는 항상 예측 불가능한 것이다. 단 한 가지 물은 도랑을 향한다는 사실 뿐이다. 도사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기 보다는 중생에게 그것을 일으키기 위한 (거짓이라도) 을 해야만 한다. 뛰어난 현자는 선악에 놀림 당하는 일 없이 선악을 갖고 논다. 그래서 그는 선도 되고 악도 될 수 있다. 선악의 초월을 고집하는 자는 결국 선도 악도 아닌 사람이 되고 만다.

    마음없는 물체처럼 좌선하라. 우리들은 틀림없는 하나의 물체이다. 마치 그저 단순한 물체, 장식물, 돌이나, 풀처럼 순수하게 존재할 뿐인 사람들이다. 정신이나 마음도 그 차원의 물질이다.

    만물의 생명은 하나이다. 거기에 특별한 능력이나 경지, 의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참된 명상가란 정신의 높은 곳에 도달한 자가 아니라 정신이 사라진 저 아래까지 깊이 즉 물체(축생)의 수준으로까지 떨어진 자이다. 그리고 그곳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당신은 모든 물질이 의식을 갖고 살아 있음을 실감할 것이다. 당신이 그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으면 그들과 동조할 수 없다. 순수의식성과 순수물질성은 지독하게 닮았다. 저차원의 물질과 고차원의 의식은 동조한다.

    無用 

    자신을 정신활동의 산물(그러면 모든 생명으로부터 고립된다.)로 똘똘 뭉친 존재로서 혹은 목적의식, 희망, 호기심이나 애증의 덩어리로 계속해서 인식하기 보다는 하나의 아무 것도 아닌 물질로서 존재하는 시간을 가져보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명상이며 좌선이다. 마치 당신이 하나의 물체처럼 무위와 무심으로 그저 앉아 있을 때 만물이 광명과 삼매 속에 젖을 수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체 의식은 최하위의 물질적 차원에 당신이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물체는 그저 그 자신으로서 그냥 존재할 뿐이다.

    대오한 사람의 그 후는 모든 것이 중생에게 전달하기 위한 생활이 되어야지, 자기 경지를 유지하는 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깨달음은 죽음이 스스로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사트바(유동), 라자스(활성), 타마스(정적);우주를 파괴, 창조, 유지의 세 가지 상태로 분류한 것처럼 인류의 의식과 에너지 상태를 세 가지 특징으로 분류한 것이다. 라자스는 기독교나 마호메트와 같은 격한 성질을 의미하고, 타마스(불활성)은 노자나 라마나 마하리쉬와 같은 고요한 성질을, 사트바(중성 또는 조화)는 붓다처럼 온화하게 밸런스를 유지한 성질을 가리킨다.

    거울은 자신에게 비치는 것에 철저히 무관심하기 때문에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를 비출 수 있다.

    진짜 견성은 견성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자신의 내면을 보고 아아 이거다.’라고 말하지 마라. 말하면 오히려 그렇게 말하고 있는 당신의 존재 그쪽이 깨달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말하는 당신, 그리고 말하고 있는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 즉, 그곳에 존재하는 그것이 주인공이다. 또 그렇게 말하는 당신 본인은 거기에 상관없이 계속해서 옳고 그름과는 무관한 실존인 것이다. 옳고 그름이라는 것은 당신의 주인공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당신 본인은 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고뇌는 사고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 사고의 협력없이 혼자 힘으로 당신을 괴롭힐 수 있을지 시험해 보라.

    란 항상 未知이다. 그것이 도인 까닭이다. 따라서 도는 이런 것이다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육체가 아직 있는 한 우리에게 완전한 해탈은 있을 수 없다.

    근본적인  즉 절대안심 같은 건 없다는 절망을 확실하게 터득한다면 절망 자체가 고를 소멸시킨다. 왜냐하면 고란 거의 대부분이 욕망과 희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 자체가 사라질 때, 깨달음은 스스로, 전부터 계속 그곳에 존재했을 뿐이다. 고란 본래 없는 것이라고 잊어서는 안된다. 고는 삼라만상, 살아가는 것 모두의 근본이다.

    절실함이 없는 기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종교인들 대부분은 내세며 극락에 대한 탐욕스러움으로 광기에 차 있다. 이것들은 전부 불안과 불만에의 공포를 이용한 심리적 삼매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으로 지금으로 살아야 한다. 생존을 위해 내일의 행복이나 과거의 분명함 속에 있으면 안된다.

    가치관은 어김없이 시비를 만들어 낸다. 선이 정도라고 말하는 순간 선이 아닌 길을 당신은 마음 속에서 악이라고 단정하고 평생 거기에 사로 잡혀서 괴로워 하게된다.

    잡고자 하면 그것은 꼭 어김없이 도망간다.(지금, 깨달음 등도 마찬가지다.) 당신을 무언가가 된다라는 환상, 무언가이고자 하는 갈등의 고로부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만된 존재로 만들고자 할 뿐이다. 그 어떤 것이든 이래서는 안돼야말로 당신 자아의 원동력이다. 좋은 것은(좋을 때는 거기서 만족하기 때문) 절대로 당신을 움직이지 못한다. 만족은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 ‘훨씬 더 만족해야 돼라는 생각이 일어났을 때 당신은 또다시 더 만족하지 않으면 안된다를 다시 만들어 낸다. 따라서 자신이 쓸모없이 무너지고 싶지 않다라는 사실이 당신이 갖는 일체의 고의 원인이다. 무엇을 구하고 있건, 찾거나 구하는 것은 탐욕의 상태이다.

    목적이란 지금과는 다른 것이 되고자 하는 일이다. 현상에의 개선 의지야말로 진보라고 말하지만 자기가 놓인 상태의 무언가를 안돼라고 말하는 순간에 당신은 거기에서 도망치고자 한다.

    이 세계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그것은 당신이 사멸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이다. 진짜 두려움의 현장은 항상 당신이 있는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에만 한정된다. 두려움, 공포는 세 가지 상태(혐오, 거부, 살육)에서 이루어 진다. 그것은 변화가 두려울 것이다. 문제는 변화로인해 당신의 과거가 사라지는 것이다. 즉 과거의 죽음이다. 삶이라는 과거에 집착하게 되어 죽을 때 그렇게 해서 죽음을 두려워한다. 또 반대로 삶을 두려워한다. 자기 내면의 고요가 주위 움직임으로 변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현재 이 지금이란 항상 변하는 것이다. 그 속에는 어떠한 과거도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현재 안에서 과거가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곳에는 이해라는 건 없다. 이해는 과거와의 조합이기 때문이다. 이해가 떨어지면 당신에게는 선악의 판단도 없다. 만약 당신이 진정 지금에 존재(대오)하고자 한다면 당신의 마음 안에서 제일 소중한 것부터 순서대로 버려나가는 일이다. 왜냐하면 소중한 것일수록 집착이 강하기 때문이다. 시시한 것에 집착할 사람은 없다. 그것이 깨달음이면 깨달음부터 버려라. 깨달음보다 더 소중한 것을 찾아보라. 그것이 찾아지면 제일먼저 그것을 버려라. 그리하면 눈깜짝할 사이에 대오한다. 소중한 것 따위를 갖지 않는 것이 소중하다면 그 생각 자체를 버려라. 지금이 소중하다고 말한다면, 그 지금을 제일 먼저 버려라.

     

    풍경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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