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23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5. 26. 03:06
    반응형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23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IpgUM0Hv4rU

     

    527.

    탐구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를 원동력으로 한다.

    권력욕은 개인적인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갈등이다. 생물로서의 우리들은 타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자유획득) 극히 미세한 움직임을 보여도 어김없이 고를 만들어 내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육체 뿐만 아니라 사고가 움직이면 그 자체가 이미 기억과의 관계, 외부 사회와의 관계, 가치관과의 관계를 이끌어온다.

    당신의 자기라는 감각, 의식 그것이 진짜 고의 원인이다. 존재 자체가 고이다. 경감시키는 방법은 집착을 놓는 것이다. 따라서 고를 최소한 도로 머물게 하는 방법은 안정이다. 그것은 본래의 우리들의 본성으로 돌아감으로써 실현된다. 노력에 의해 현재화 顯在(나타나 있음) 시키는 작업이 아니라 자연스런 현재화를 방해하는 요소를 철거하는 작업이다. 즉 명상이나 좌선은 획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다.

    나라는 자각의식은 육체 영역에 의해, 경험적 기억이나 기술, 우발적으로 생긴 개성, 생각 등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모든 세계와 우주는 끊임없이 유기적인 관계성 속에서 변화하며 영향받고 있기에, 독자성이나 개별적인 영혼의 가치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구별이란 인간만이 하는 짓이다. 내면적인 개별성이나 개성을 주장할 의미나 가치는 없다. 그것들은 緣起에 따른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의 과거도 당신 것이 아니며 현재 소유하고 있는 당신 것도 당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곳에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인선은 과잉된 육체나 자아의식의 경감에 의해 고가 경감된다는 논리이다. 결국은 자기 의식이라는 자석에 부착된 정보나 기억이 당신에게 고를 만들어 내었던 것이라 자아가 사라져야 일체의 고도 사라진다.(두정유의, 어둠의 명상으로)

    어둠 명상에서는 감각도 사고도 자아도 완전히 사라진다. 두정유의가 필요한 이유는 그 이외의 육체의 각 부분은 원래 정지나 고요가 실현될 수 없는 구조로(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육체의 한계) 되어 있기 때문이다.

    활성화되어 안정된 것은 반드시 돈다. 이것이 윤회의 기본이다.

    육체로부터의 해방은 최후의 해방이다.

    강이 바다에 도달했을 때, =나도 없고 존재도 없고 그리고 사라져 가는 것도 아니며 바다가 존재하는 것이다.

    불성은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걸릴 리가 없다. 견성(깨달음의 인식)은 있을 수 없다. 그냥 나타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무가치하다. 그것은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로부터 떠나라는 것이다. 부정이란 단순히 그 반대로서의 긍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내리는 상대적인 판단일 뿐이다.

    세상에는 어떤 선악도 없다. 분별이 재발하는 것을 파괴하라.

    최고의 즐거움이란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충만된 안도이다. 최악의 괴로움이란 그 무엇으로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불안이다. 사람의 괴로움은 실은 깨달음의 일별에 그 원인이 있다. 끊임없는 성취욕은 기능적인 원인이다. 즉 인간이나 생물의 설계상의 원인이다. 그것은 당신 탓도 인간 탓도 아닌 당신의 구조상의 원인이다. 그래서 당신의 부모인 神佛, 창조주들과 절연하라.

    당신의 주의력은 절대로 연속되지 않는다. 사실 의식에는 가능성의 의식(움직이는)과 부동의 의식(정지된)이 있다. 우리들은 이동하는, 자기의 그 주의력이 의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동하는 의식, 주의 그 자체의 방향성을 또 다른 시점에서 감시하는 의식점이 있다. 거기엔 인격도 사고도 이념도 가치관도 없다. 단 그 전체를 빈틈없이 바라보고 있다. 전체를 빈틈없이 바라본다는 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것을 바라보는 그 중심은 그저 존재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만약 그냥 존재한다고 당신이 자각했다면 진정한 중심은 그 자각을 감시하므로 자각 그것도 그것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그 중심은 실은 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인식할 수 없다. 거꾸로 일체의 인식을 포기함으로써 인식이나 견성을 완전 포기하고, 자각을 버리고, 정말, 그냥 그곳에 앉아 공백과 함께 존재하면 된다. 그때 <>은 당신 자체가 되어 나타난다. 그곳에는 더 이상 당신은 없다. 본래 당신의 중심에는 그 무엇도 없다.

    게임(스포츠, 맥박, 필름, 오락, 생명활동, 노동)은 하나의(편안해지는, 해방감, 만족감, 행복감) 움직임을 중지하기(끝냄, 작은 휴식)위한 조건이다.-인위적인 해방

    노동이란 기본적으로 육체를 쉬기 위함이다. 편안하고 싶기 때문에 무엇인가 사고한다. 그러나 사고나 지성이 만족하려면 육체보다도 더 많은 식량(따분함이 공복감)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정보나 감각이 제공되지 않으면 사고체는 만족하기 어렵다. 따라서 인간은 대수롭지 않은 것을 끊임없이 사고한다. 이러한 사고활동에도 게임의 규칙과 완벽하게 동일한 규칙이 있다. 즉 일시적인 휴식 또는 종언 終焉(죽음, 마지막, 최후)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 조건은 만족이다. 사람은 만족(안도감, 안심)할 때만 활동을 정지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모든 활동은 본질적으로 항상 비활동을 목표로 한다. 개개의 자석(우리들과 만물)은 정지할 수 있는 조건을 열심히 찾지만 (우주의 구조는 그렇게 배치되어 있지 않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정지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다음 활동이 나타나거나 혹은 자기 마음대로 목적을 만들어선 다시 윤회를 계속한다. 하지만 이 원리를 눈치 챈 사람(승려, 명상가)은 사고, 육체, 감각의 활동, 신진대사 없이 처음부터 생명체가 갈망하는 그 만족감(안심, 정지)의 정수만을 뽑아내는 방법을 알고 실천한다. 거기에는 과정이나 수단이 필요없다. 왜냐하면 사고를 정지 또는 휴식시키기 위한 안심이나 행복을 초래하는 정지 인 조절축(절대 )이 이미 우리들의 내부(최중심)에 태풍의 눈처럼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만족이란 만족 그 자체에만 있다. 불만을 아무리 잘 조합시켜도 만족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사람은 자신의 냄새를 느낄 때(, 이불) 마음이 편안해(행복감, 안심)지는 본능이 있다.

    불행에는 형태나 원인이 있지만 행복에는 없다. 행복감을 자세히 관찰하고 감지하는 것이 가장 좋은 명상이다. 행복한 사건(, 기억)을 생각하지 말고 현재의 행복감을 그저 순수한 감각으로 느껴라(충족된 느낌, 깊은 안심, 정지되어 있는 것, 아무 것도 할 필요 없음...) 어떤 감각 정보(자극, 오감, 섹스)도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를 느낀(자극) 후에 안심하는 감각 바로 그것이 행복이다. 그것은 이미 대상은 잊게 되고 의식조차 없다.

    공허와 지복은 같다. 그것은 텅빈 그릇을 물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론 그릇의 공허가 이미 물이다. 채우는 것과 채워지는 것은 애초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당신은 사고 에너지를 그저 쓸데없이 쓰고 있는 미친 기계일 뿐이다. 단지 사고가 기계적으로 반응하고 매일같이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이 인간의 실정이다. 사고란 곧 중독이다. 당신의 사고는 결코 멈출 수 없다. 언어와 사고의 노예이다. 그러니 우선 사고 스위치를 끌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사고를 할 수 있다. 무언가를 이루는 자는 늘 철저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자기관리를 한다.  멈춤의 기술이 필요하다. 인간은 사고를 인간의 지적활동 내지는 정신활동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고는 發電 수단에 불과하다. 정보는 사고체라고 불리는 중추의 음식 재료로 인식되고 있다. 세계의 근거를 철학(깨달음, 예술, 미학, 심령술...)하는 것도 사실은 우주를 회전시키는 속임수 테크닉이다. 즉 그로인해 사고가 움직이고 의식은 그것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그 움직임에서 에너지가 생겨난다. 그것이 우주가 바라는 바다. 즉 우주가 존재하기 위한 동력이나 식품으로 스펙터클한 양식의 진동일 뿐이다. 사고는 무조건 기계적인 노동이며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 둘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우리들의 본질적인 의식이란 본래 생명경험을 더욱 잘 수비하여 빨리 안심할 것을 바라고 기다린다. 마치 우리들이 활동하지 않고 끝내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활동이다.

    각자는 무거울 때 무거워지고 가벼울 때는 가벼워져서 어떠한 분별도 하지 않는다. 즉 주저나 후회 안한다. 더울 때는 덥고 추울 때는 추울 뿐이다.

    는 항상 쌍방의 사이에서만 생긴다. 한쪽 편밖에 없는 경우는 갈등도 일어나지 않는다. 항상 자기 모순된 두 가지 욕망에서 비롯된 갈등의 결과 때문이다. 왜냐하면 도 있는 그대로도, 모두 악과 불순하다는 말의 단순히 반대 측에 있는 상대적인 목표 즉 단순한 사고의 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희망이 바로 장애다. 그리고 절망이야말로 바로 진정한 眞空이다. 왜냐하면 희망 속에서만 마인드는 살아남기 때문이다. 절망은 결코 비참하지 않다. 비참함은 항상 당신의 희망이나 기대를 잃을 때 오는 고통 뿐이다. 그러나 깨달음의 상태-생의 모든 희망과 목표를 철저하게 잃고 오직 현재에만 의식체가 살아서 호흡하는 영역-는 반드시 정신체의 소멸을 필요로 한다. 또 그것은 방법이나 기억을 덧붙이는 것에 의해서 오진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기대, 절망, 노력, 목표, 이상이 완벽하게 으로 간파되기까지 당신은 철저히 사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풍경 115.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