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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25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6. 5.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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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25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kcm9qpovcUE

     

    529.

    도는 어디에나 있다. 단 걷는 자가 아무도 없을 뿐이다.

    실재는 침묵, 공허, 진공, . 실재하지 않는 허구는 사고 즉 마인드다. 그것이 망상을 만들고 마음의 외침(이차적 사고)을 구성한다.

    나누어지지 않는 전체성. 삶 전체(죽음과 삶 포함). 에오의 죽음(삶도 포함한 죽음)

    그것은 당신이 이해하거나 오해하기 이전에 이미 당신에게 존재한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난해하지 않다. 단지 당신이 상상 자체를 끊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할 때 비로소 체험되지만 체험에 들어갔다면, 이미 이해될 만한 내용은 모두 없어진다. ‘그것은 그냥 체험된다. 그저 계속 체험된다. 단지 그냥일 뿐이다. 즉 논리화, 확인, 자각, 이해, 비교, 검증, 평가, 비판은 일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교 검증의 사고가 당신에게 시작되기 전의, 그것들 이전의 당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과 사고를 만들고 있는 원래의 의식에 대해 만들어진 쪽의 수많은 상으로부터 접근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 그곳에는 다가간다는 거리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의 의식이 단 한발도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은 실현된다. 눈은 눈을 볼 수 없다. 눈은 눈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른바 보여진 측의 영상이 어떻게 눈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만들어진 측에 있는 당신의 사고가 만들어낸 원래의 의식을 확인하거나 이해하고자 한들 그런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것이 정말 한가운데 중심이라면 그것 그것 이외의 것이라면 모든 것을 지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 자체는 결코 지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한가운데 중심이라고 말하는 것이 지각되면, 그것을 지각하는 것이 더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에서 지각된 것은 이미 그것이 아니다. 그래서 좌선을 하든 명상을 하든, 모든 체험이나 감각은 결코 그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지각되는 그대로의 사실 감각조차 그것이 아니다. 나아가 지금 여기의, 자기 존재감의 자각조차도 그것이 아니다. 만약 위의 시구에서 발췌한 내용이 당신에게 납득되면 이미 그걸로 끝이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것은 단순한 시구가 아니라 가장 명확한 진리의 묘사다.

    당신이 내면을 보기 그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것이 사인선의 기본 공안이다. 즉 사고가 시작되기 이전을 말한다. 사고라는 것은 본성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 본성이 존재하는 결과로서 사고가 있다. 원인은 의식쪽에 있으며 사고는 그 결과다. 의식없이 사고만 존재할 수 는 없다. ‘그것을 체험하기 위해 결과의 차원에서 원래의 원인을 볼 수는 없다. 무언가가 인식되면 인식이라는 것은 결과에 위치한다. 따라서 어떤 의식도 중심이 아니다. 중심은 알 수 없다. 그곳에서는 인식의 소멸이 일어나고 주객이 사라진다. 그저 존재한다는 자각은 결코 그곳에 없다. ‘아무것도 안 일어난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잡념이다. 그것은 중심에서 벗어나 있고 정지하고 있지 않고 원인이 아니라 결과의 차원과 자기 동일화 한 것이다.

    동물들은 하지 않는 이름’, 그것은 인간이 자아를 날조하는데 크게 기여한 매우 커다란 요소이다.

    의 세계를 경험하는 주체처럼 우리들이 생각하는 우리들 의식 자체의 중심이  그 자체이다. 우리들의 지각 경험의 실제 존재감을 끊임없이 지탱하는 것은 절대 무가 거기에 동시에 공존하기 때문이다. 즉 유를 인식(의식)하는 이상 우리들은 우리들의 실체(우리들의 의식이 무 자체이다.)인 무로부터 단 한순간도 떠날 수 없다. 또한 우리들이 있는것 자체가 실은 의 실재를 증명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애초 무를 인식의 배경으로 삼는 일 없이는 유가 인식될 수 없다. 그래서 명상가도 참선 수행자도 내가 골문이다를 이마에 붙인 채 골문을 향해서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감각과 상념의 세계를 싫어해서는 안된다.

    미간에서는 절대로 멈출 수 없다. 거긴 움직이는 것이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정이나 두정점은 원래부터 움직이지 않는다.

    항상 이해나 이해하려는 일이 시작되기 전에 멈추는 것이 도다.

    마음은 늘 설명을 함으로써 살아남으려고 한다. 하지만 의식은 설명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

    우리들은 항상 바람과 바라지 않음에 상관없이 지금여기에 속박되어 존재하는 자일 뿐이다. 미래와 과거는 그 지금이라는 거울을 오고가는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정보 자체는 생활에 있어서 이용가치는 있겠지만 도는 늘 지금에 있는 것만을 문제로 삼는다. 그러니 지금부터 생겨나는 것에는 개의치 말고 오직 무지 그대로 존재하라.

    수면은 행법의 에너지가 되기 때문에 두정유의만 잘 한다면 아무리 많이 자도 상관없다.

    유의도 어둠도 행법을 할 때 제대로 안되는 경우 결과에 상관없이 하라. 기본행에서 지릿지릿한 두정감각에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하며 의식의 포인트(위치) 자체를 유의점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接心 2단계 이후부터다.

    무심은 무사고가 아니다. 사고 자체는 결코 停止 靜止도 하지 않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만약 사고가 무의식 영역에서라도 완전히 停止하면 우리들은 죽는다. 예를들면 우리들은 음식물이라는 고체를 3개월 동안 먹지 않으면 죽는다. 물이라는 액체를 마시지 않으면 며칠 내로 죽는다. 공기라는 기체를 몇 분간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고나 정보도 만약 우리들이 몇초동안 먹지 않으면 우리들은 죽는다. 우리들은 자각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더라도, 텔레파시 영역의 정보를 매초 100개 이상 늘 신진대사를 하고 있다. 그러니 無心이란 정말 엉터리 같은 말이다. 나도 화상도 선사들도 그것을 언어의 방편으로 삼아 대단히 경솔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가끔씩은 있다. 하지만 사고 자체의 무심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들이 생존하기 위한 음식물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고 차원의 무심은 있을 수 없다. 사고를 사용하는 어떤 노력도 필요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변용이란 명상을 하고 있는 자가 모든 이해와 수법을 버릴 때 일어나고, 하고 있는 자에 대한 뺄셈이며 해체 그 자체이다.

    명상이 배이다. 이 배 덕분에 강을 건널 수 있었다며 아주 소중하게 배를 짊어진 채 다니는 넌센스도 있다. 대기하고 사고의 출현을 기다리면 안된다.

    정지 안에서 앎은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안다는건 정지가 아니라 그곳에서 벗어나 보려는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사고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면 당신은 사고에 사로잡힐 것이다.

    구별하던 그 자체가 죽어버리면 정적과 잡념을 애초부터 보려고 하던 그가 죽은 것이다.

    모든 생명체에게 개념이나 방편 또는 사상은 일종의 음식거리이다.

    의식체라는 것이 사람의 무의식적인 바람을 투영시키는 특징이 있다.

    다른 차원의 각종 파동 건축물의 접착제로서의 사랑과 선망, 의존심과 집착심, 연료로서의 생존욕구와 희망, 열등감과 우월감, 조미료가 되는 질투심, 수치심, 도피, 죄의식, 흥분제와 진정제의 주원료로 사용되는 공포심, 불안, 불만, 갈등, 혐오감, 살의, 성욕, 작물의(다른 차원) 비료로 작용하는 태만, 따분함, 자기혐오, 따분함을 방지하기 위한 마약 원료가 되는 편애, 망상, 고독감, 자살, 바람

    아무리 이상을 말해도 실현되지 않는 이상은 망상에 불과하다.

    자살은 정신의 자살을 말한다.

    진정한 깨달음에는 좋은 것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좋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분별하는 사고가 나쁜 것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지만이 구제의 길이다. 무심함, 무자비, 무명, 무가치, 無力이 에오이즘의 원칙이다. 특정한 사람이나 물체를 스승으로 삼지마라. 아무것도 없는 어둠만이 만인의 스승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무언가(종교, 논리, 기술, )로 해서는 안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닌 채이다.

    당신이 타인으로부터 칭찬(매도, 경멸, 혐오) 받는 경우 당신이 타인의 사고 속에 오해를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두려움을 모를 정도로 강하지는 않다. 단지 두려움을 모를 정도로 무지하다. 생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은 집착을 낳을 뿐이지만 죽음(마음의 죽음)으로의 수용은 집착으로부터의 벗어남을 낳는다.

    당신-당신=제로

    어둠이나 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무와 어둠이 되어야 한다. 무엇을 지각하는 한 아트만의 실현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진실된 자기를 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각 세계를 파괴하고 내면적 관계성을 파괴하라. 당신의 두상에 의식의 거처를 세우는 것 뿐이다.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상관할 것은 없다. 그것은 그저 존재 뿐이다. (스승)을 읽는 당신의 사고가 정적에 있을 수 없다. 일상에서 끊임없이 당신에게 깨달음의 플래쉬 백이 일어난다. 깨달음이란 편안한 것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생사를 초월하는 본성이 우리들의 거처다.

     

    풍경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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