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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27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6. 18.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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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27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RXAvtcJ5no4

     

    531.

    최초에 있었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우주를 창조한 신은 피조물보다 상위에 있다는 망상이다. 우주를 만든 신이 너희보다 물리적으로 또는 지적으로 강하다는 근거는 하나도 없다. 너희에게 가능한 것이 신에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너희들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시키기 위해 너희들 스스로 도구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누구든 물건을 창조하는 동기는 항상 제작자를 대신하는 대행업무를 목적으로 한다. 더구나 대행을 위해서 만들어진 제품은 항상 창조자의 기능을 앞지를 필요가 있다. 이리하여 신은 피조물과 기능면에서 비교하자면 무능 내지 혹은 거의 무능에 가깝게 정의된다. 이것이 요점이다. 신은 서투르거나 재주가 없다.

    진짜 우수종이나 상위 존재는 시간적으로 앞서 있지 않다. , 신이 처음에 있었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또 다음의 상위 존재는 실제로 어떤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으로 신은 만능이 아니라고 다시 정의된다. 또 신이 모든 만물을 만들었다라는 논리도 성립되지 않는다. 가령 신이 만든 창조 로봇이 우주를 제작, 관리하고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만물을 어디서 어디까지 신이 만들었다라는 논거도 전혀 없다. 우주 또한 최초의 목적이 있었다 해도 현재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증거는 없으니까. 이미 다른 목적을 향하고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신을 존경할 필요는 전혀 없다. 대체 현재의 무엇이 신의 가부장적 머리를 유지시키는 것일까? 신에게 남은 단 하나의 능력과 가부장적 권위를 유지하는 협박은 놀랍게도 그것뿐일 것이다. “이 우주와 당신의 즐거운 생활을 망가뜨려 주지 하면서 보턴에 손을 댈 뿐인 그 놈은 9.000억 살의 빌어먹을 늙은이 인지도 모른다. 그러자 신은 최후에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들은 우주에서 發想한다.”

    애초 왜 신은 발상하지 않고서 가만히 있을 수 없나? 신은 아무래도 따분함이 싫어서 안정이 안 되는 철부지와 같다. 그렇게 되자 우주란 신의 따분함을 달래기 위한 부산물인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나왔다.

    요점을 정리하면

    1.신은 애초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도 있다는 증거는 없다.

    2.신은 처음에 있었다 해서 특별히 위대하지 않다.

    3.신의 기능이 뛰어나다는 증거는 없다.

    4.신은 만물을 만들었을 리 없다.

    5.신은 관리하고 있을 리 없다.

    6.신은 그저 영원한 따분함을 어찌 달래는가를 생각하고 혹은 과거에 생각하고 이미 뒈져서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7.그러자 지금 우주는 완전 무목적으로 각각의 우주에서 나야말로 관리자라 굳게 믿는 지성체에 의해 제멋대로 각각의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8.신이 만약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우주는 내가 생각한 것이다.” 라고 특허권 소송을 지금도 계속하는 엄청난 늙다리 바보, 천치이다.

    9.만약 나는 우주를 언제라도 사라지게 한다.” 고밖에 말할 수 없는 초특대의 변변치 않은 존재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리하여 신은 어리석다. 그놈이 위대한 흔적은 논리적으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논쟁의 근본 동기는 안심을 지향하는 욕구이다. 또 그것을 만드는 근본 원인은 당신의 생존에 대한 욕망과 죽음에 대한 불안이다.

    미움은 무엇이든 당신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행위로 발전한 경우에는 폭력이 된다.

    당신은 그 누구도 아니다.

    사고가 모두 사라질 때 답이 있다. , 당신이 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답 바로 그 자체가 되어 있다. 그곳에 답을 받아들이는 자는 이제 없다. 당신이 답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당신과 답 사이에 분리가 있는 한 그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생명이나 죽음, ‘어디’, ‘누구’, ‘ 모두 그저 관념의 산물일 뿐, 의문은 모두 관념의 산물이다. 모든 사고가 멈추기까지 깨달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종교가나 명상가는 일반적으로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그들은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수치나 경박한 일, 혹은 점잖치 않거나 냉정하지 못한 것으로 억압하기 쉽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억압된 감정은 변명, 자기 합리화, 자기 비하, 질투, 냉소 등과 같은 다른 종류의 굴절된 표현을 통해 누적된다. 이와같은 것을 인생에서 반복해온 자에게는 전형적으로 그들만의 독특한 관상을 엿볼 수 있다. 경직된 얼굴과 고달픈 표정, 혹은 무표정이 그것이다.

    공허감이란 당신이 존재감의 입장에서 자신을 두고 공허를 타인의 일처럼 바라보는 경우에 느끼는 감각일 뿐이다. 하지만 일단 당신의 입장이 공허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면 거기에는 그 어떤 공허감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것이 사물의 원칙이다. 이 세상에서 ‘...이라 불리는 모든 것은 대상과 당신과의 거리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공허감(존재감)이란 당신과 공허(존재) 사이에 거리가 있음을 나타낸다. 원칙적으로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은 당신이 바로 그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말한다. 당신이 바로 그것인 경우 거기에는 그 어떤 감각도 느낄 것이 없다. 그러니 만물과의 일체감을 느꼈다고 하는 자는 무엇보다 일체화되지 않았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일체성, 완벽한 용해와 융합 속에서는 일체감이라는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서 발생하는 것은 일체감이 아니라 不二이다. 不二란 두 개가 아니다. 그렇다고 하나라는 감각조차 아니다. 불이란 그저 두 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그것이 하나라고 느끼는 것도 아니다. 그같은 감각은 거기에 없다. 왜냐하면 두 개라는 감각이 사라진다면 당연히 하나라는 감각 또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광명; 1. 그것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기에 있는 것이다.

    2. 그것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그것은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3. 그것은 당신의 탐구심이 없을 때, 그리고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때 있다.

    지금의 자신과는 다른 무엇이 되려는 것은 성취욕이다. 지금의 자신에게서 발견되지 않은 것을 찾으려는 것은 지식욕이다. 그리고 각성한 본연의 모습이나 무심으로 있으려는 것은 결국 생존욕이다. 더구나 그것이 진정 자신이 되고 싶어서 되려는 것도 아니라면, 이미 악질적인 강박관념이다. 일절 침묵한 채 그 경험적 배경의 근원을 이루는 그것이 깨달음이다. 사실 깨달음을 탐구하는 자세는 결코 거기에 도달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침묵 속에서 깊이 하나가 되는 기법 그것이야말로 남겨진 몇 개 되지 않는 도의 하나이다.

    모든 체계는 위선이고 거짓의 덩어리다. 그것은 완벽한 수준으로 정나미가 떨어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즉 모든 체계 그 자체의 과오를 깨닫게 하기 위한 체계이다. 하지만 그 거짓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진정으로 체험한 사람 뿐이다.

    광명;알지 못하니(不可知) 그저 있음이요(只在) 혹은 그저 부재함이라(只不在) 그것을 통감한 그들은 찾지마라. 구하지 마라, 보지마라, 알지마라고 줄곧 말해왔다. 결론은 그것을 온 몸과 온 마음을 다 기울여서 알려고 했던 그들의 지옥과도 같은 고통과 갈등이 빚어낸 결론이다. 그러니 알려고 하는 미친 듯한 정열 없이는 거기에 이를 수 없다. 왜냐하면 탐구 그 자체, 기법, 체계 그 자체가 이것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찾을 필요가 없었다.

    두정유의가 광명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아니라 의식의 확산, 의식의 무초점성이 광명으로의 다리가 된다. 무초점의 의식은 죽음, 어둠, 무의 부산물이다. 즉 죽음의 결과가 의식의 확산이고 의식이 확산된 결과로서 두정의 경로가 열리고 두정으로의 유의로 인한 결과가 전일적인 존재의 상태가 되고 전일적인 존재의 상태가 관조를 낳는다. 이것이 광명의 전체적인 구조이다.

    의식의 진화는 운동에서 정지로 향하는 방향성이다. 인간의 진화는 육체-감정-사고활동-사고정지. 움직임에서 정지로 가는 길. 이것이 깨달음으로 향하는 여행이다.

    1.복부(격투사, 군인, 운동선수)-동물, 육체

    2.흉부(모험가, 예술, 여행, 연애)-감동, 감정

    3.인후중추(축적, 수집가, 정보)-기억

    4.이마(과학자, 발명가)-사고

    5.전두부(철학자)-의식의 주체

    6.두정(신비가)-사고정지, 일치

    깨달음 속에서는 볼 것, 보여지는 것, 보는 것, 또 행위, 대상, 내용 즉 아는 것, 보는 것, 하는 것 등 세 가지가 구별되지 않고 일치한다.

     

    풍경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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