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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14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3. 1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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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14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RbcgpuSIacE

     

    518.

    세계란 지각 속에만 있다.

    우주의 내부에서 죽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주의 내부란 활동과 갈등과 생존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그저 목적없이 살아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우주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다. 완전히 무의미하게 그저, 존속하기 위해서 있을 뿐이다. 실제로 존재의 목적을 탐구한다는 것은 이 우주가 활기에 가득 차 있기 위한 불만을 만들어 내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쥐고 있는 손 그것이다.

    (TAO) 이 뺄셈인 이상, 당신이 분쇄되는 것(에고를 뽑는 것)만이 광명으로 나아가는 열쇠다.

    절대시하는 것은 원래 에고이고 망상이다.

    절대 無意味性이 우주의 유일한 진실이다.

    당신도 그저 있다

    자살은 허무감이라는 비료의 재료가 된다.

    자아를 의식시키기 위해 육체가 만들어졌다. 자기라는 자각의식이 생기며 그 결과 모든 생물은 개체를 보존하려고 한다. 즉 저항력이 생겨 잘 움직이게 된다.

    자동화의 아이디어는 먹이사슬이다.

    인간은 공복을 느끼는 기관이 복부 이외에도 여기저기에 부착된 불행한 생물이다.

    고립감=자아. 자아란 독립성을 낳는 것이다라고 미화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고립감각에 의한 갈등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시스템이다.

    우수하다=갈등 요소 부가의 결과

    어느 차원에서도 벌레처럼 끊임없이 더 괴롭힐 것인가 즉 안정하지 못하고 활동하는 부품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목적으로 인간과 지적생물이라 명명된 것은 창조되고 개량된 것이었다. 그리고 일정수준 이하로 활동이 떨어지면 경고 신호로서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발생하도록 만들어졌다.

    어쨌든 움직여라, 일해라, 쉬지마라, 안정을 취하지 마라, 항상 분발하고 진동하고 있어라, 라는 지령이 유일하게 우주가 당신에게 내린 명령이다. 그리고 란 여기에 역행해서 소립자 이하로 귀환하고자 하는 길이다. 즉 에너지 양산에 게임 오버 또는 脫會를 선언하고, 우주에 있어서는 도움이 안되는 생물로 역행하는 것이다.

    우주는 존재하려는 의지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의지를 가속하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고뇌, 공포, 성취욕...) 모든 생물에게 프로그램(멈추지 마라, 계속 움직이면서 존재하라, 는 되지말라) 시켜 놓는다. 존재에의 의지가 우주의 근거이다. 그러나 그 근거의 원인은 없다. 그저 그럴 뿐이다. 다만 그 존재의 의지에는 상대적인 원인이 있다. 그건 의 영역에의 공포 내지 반발의 힘이다.

    어떤 이치나 진리도, 어떤 경지도 살려는 의지의 노예, 그리고 핑계, 정당화에 불과하다.

    우주의 목적-존속 유지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살려는 의지를 발생하는 일 및 활동 정지의 회피를 영원히 계속하려 하는 일

    모든 이원성(음양)은 창조의 근원(갈등하게 하기 위하여)이다. 그것은 합체로의 갈등 상태에 두면서도 합체할 수 없는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원소도 생물도 남녀도 혹성과 항성도, 모든 것이 분리된 채 활동하며 회전하고 영원히 돌아간다. 이것이 윤회다. 그만둘 수 없는 종식되지 않는 활동 자체 輪廻라고 한다. 그러나 그 활동 자체가 없으면 안되는 이유를 우주는 대답해 주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 정당한 근거도 이유도 진리도 모른채, 그저 생존할 뿐이다. 안타깝게도 영혼은 사라지지 못한 채, 존재를 강요 당하고 있다. 모두는 그저 충동적으로 살고 있을 뿐이다. 인생의 이유는, 전부 그저 생존의 구실이다. 우리들의 사고활동은 그저 미생물의 發光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버린 일들을 꿈과 같다고 할 수 있는 인간이 어찌하여 내일은 꿈이라고 하질 못하는가? 내일이라는 사실 지금 여기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꿈이다. 지난 꿈이라면 적어도 내용이 있었을 것이다. 내일이나 미래 따위는 그 내용 조차 없다. 그렇다고 꿈도 아니다. 그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란 사람들의 한낱 예측, 추측이요 단지 억측이고 기대와 불안의 산물에 불과하다.

    신비체험에 대한 탐욕스런 갈구는 돈이나 성욕에 빠진 사람과 똑같다. 다만 대상이 천국이나, 신비, 오컬트나 깨달음으로 바뀐 것 뿐이다.

    죽음은 병이 아니라 그것은 현상이지 질병은 아니다. 병은 삶의 변조에 속하는 것. 그러나 죽음은 다른 차원의 현상이다. 죽음과 싸운다? 그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다. 그것은 병이나 상처와 싸우고 있다는 의미며 죽는 계기가 되는 삶의 현상면에 불과하다.

    당신은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찾고 있다.

    두 가지 공안;1.존재의 이유와 목적

    2.존재의 자각을 계속 의식하라(불가능함을 체험하라. 그리고 그 끊어지는 존재감의 간격-틈새-에 있는 당신은 무엇인가?)

    근본적인 해답은 우주의 내부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만약 우주 그것의 전부, 만물 전부의 전체를 보고 싶다면, 당신은 그 밖으로 나와야 한다. 전부의 바깥에는 완전한  밖에 없다. 없다는 지각까지도 없다.

    지구는 물리적으로 부자유하지만, 사고의 차원에서는 우주에서도 상당히 자유로운 행성이다.(사고 한 것이 그대로 형상화되지 않는다.)

    우리의 목적은 모든 개인 또는 집단의 생존을 유지하려는 의지로 환원된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죽기위해 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다 살기 위한 것이다.(반대가 되야 한다.)

    우리의 의식은 완전히 정지를 허용할 수 없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즉 살아있는 느낌을 활동에 의해 유지하려 하는 셈이다. 만약 활동으로 자각을 가지려 한다면, 움직임 그것이 환영과 환각을 낳는다.

    신비라는 말의 찐짜 아름다움은 답과 물음이 없는 불확정성이다.

    우주 생물인 한, 깨달음이란 생명에 배반하는 현상이다.

    미망과 깨달음을 숨바꼭질이라 한다. 왜 그 숨바꼭질을 우주가 했는가? 그 동기는 산업이었다. 단지 우주 존속을 위해 필요한 생존욕, 생존 의지의 갈등상태를 전 차원의 영역에 만들어 놓은것, 즉 불안을 지성 속에 프로그램하는 것이었다.

    생을 버리지 않으면 구제 따윈 있을 수 없다.

    우주는 창조병, 활동병, 갈등병, 생존병이다.

    지성체에 있어 불가능이 없다는 그것이 절망의 원인이었다. 왜냐하면 희망이란 불가능이 있어야 비로소 있는 것. 그들은 단 하나의 희망만이 있었다. 그것은 죽는 것. 헌데 우주는 그들을 죽지 못하게 해버렸고, 캄캄한 칠흑 속에 유폐 시켜 버렸다.

    우주는 무한이 아니다. ? 무한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라는 것이 이미 유한하다. 전등 이외의 것을 지각에서 제외해야 당신은 비로소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지각이란, 펼침이 아니라 限定하는 기능이다. 당신이 한정지은 지각의 세계 외에, 당신에게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단지 한정된 지각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각자의 지각 기관에 따라 세계 자체가 저마다(환경까지) 달라진다.

    매우 절망적이지만 어떤 종족이 우리에게 어떤 기관(본성, 불성)을 심어 놓았다. 다만 찾을수록 발견되지 않도록 설계 되었다. 이 교묘한 숨바꼭질에서 인간을 재료로 만들어낸 작자들이 당초 기대했던 것은, 거기에 도달하려는 충동이 인류로부터 나오게 하는 한편, 실상은 거기에 도달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끊임없이 불만과 불안, 그로인한 갈등을 지속시키는 것이었다. 여기에 자비같은 것은 없다. 인간은 자비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오직 괴로워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괴로움의 발생 원인은 삶에의 욕망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우주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에너지는 삶에 대한 집착과 활동이고 그것은 몸부림에 의해 얻어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질의 루슈 곧 생존 의지 에너지가 얻어지고 이 에너지를 다른 우주에 저장, 그것을 팔아서 보수를 얻는다. 결국 인간이든 지성있는 우주 민족이든 우주 전체의 차원에서는 곡물, 가축, 제품 또는 에너지 발생을 위한 기계적 미생물에 불과하다.

    만약 당신이 이른바 우주와 창조자에게 공헌하고 싶다면 지금보다 더욱더 괴로워하면 될 일이다. 만약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면 당신은 우주로부터 무능력자로 판단되어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깨달음이란 바로 이것. 당신이 이란 자로부터 해고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자유임과 동시에 이 세계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과학이란 고통을 회피하는 기술이다.

    고통의 반대어는 없다.

     

    풍경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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