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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13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3. 7.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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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13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ESdcNjlawB8

     

     
    517.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이런 짓을 하는가? 아무 의미도 없이 그저 생존하기 위해서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조차 생존 수단일 뿐이다. 무의미함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무언가 의미있는 것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살기 위해서 억지로 의미를 조작한 것이다.

    고차원 지성체들에게 인간은 에너지로만 관측된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괴로워하고 정신적으로 몰리며 그로인해 투쟁, 혼란 또는 조화, 기쁨 등의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그러면 그들은 즐거워하며 우리의 뇌를 조작한다. 그들에게서 인간의 고통도 쾌락도 아무 것도 인식되지 못한다. 인간에게 에너지를 실험하고 관리하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동식물, 미생물, 광물에 대해 똑같은 짓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주적 규모의 허무에 대한 공포를 탄력삼아 무신경하며 무엇에도 개의치 않는 생존욕, 의식 에너지의 생산과 활동 유지를 위해서 우주는 존재한다. 세계라고 부르던 것은 전부 자기가 가는 곳곳에 자기가 만들어 낸 것이다.

    우주에 의미 같은 것은 없다. 목적은 그저 존재. 그리고 그 존재의 계속을 위해서는 어쨌든 살아라, 움직여라, 생각하라, 고뇌하고 기뻐하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탐구하고 힘써라

    좋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분별하는 사고가 나쁜 것을 낳기 때문이다.

    우주와 신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의 진화, 신과 같은 능력, 만물과의 일체화, 다른 세계의 지식을 얻고자 모두 에고를 만족시켜줄 목적일 뿐,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것들이다.

    마치 서민에게 당신에게도 선거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정치적 전략의 도구로 이용한다. 즉 이러한 종교는 당신에게도 구원 받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대충 말하고 나서는 정치적인 종교활동에 당신을 참가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거기엔 꼭 우월감을 지닌 거만하고 어리석은 자들만 몰려든다.

    많은 종교가들은 탐구도 노력도 아니라 그것은 단순한 도피다. 마음의 죽음, 에고의 죽음으로부터의 도피다.

    무언가를 바라고 베푸는 친절은 자기자신을 망친다. 왜냐하면 여전히 당신은 타산적이니까. 그것은 결국 자기 만족감(중심적)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즉 다른 이를 도와줌으로써 자신이 도움을 받는다는 따위의 치사한 계산이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이다.

    직감이란 에고의 산물이다. 직감이란 말은 자연의 섭리나 영적인 작용과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아주 듣기 좋은 용어다. 당신이 직감에 귀를 기울일 때 이미 거기엔 당신의 사고가 있다.

    이 우주는 계속 존재하려는 충동에 의해 그 모든 차원이 형성되어 있다. 당신이 살고자 하는 충동은 불안이 낳은 산물이다.(모든 것은 자기 의지가 아니라 세뇌된 것이다.)

    기쁨(환희) 역시 단지 자살방지 약에 불과하다.

    우주의 목적과 활동이 오직 하나의 기준 存續 고통회피에만 있다.

    이 우주가 사고와 지각이라는 착각의 산물에 불과하다. 사고의 산물로서 우주는 무수한 사고를 유지하는 근본적인 에너지가 있다. 그것은 생존의지 에너지이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며 생물학적인 충동이다. 즉 생물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하고 고통을 주고 갈등을 겪게하고 불안하게 만듦으로써 더욱더 많은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생존욕에의 집착은 에의 공포다. 어떻게 인간을 괴롭혀야 인간이 괴로워하고 갈등하면서 계속해서 살려는 의지를 키워 나가느냐? 즉 고뇌의 발생을 일으키는 것이 인간이라는 감정 발생 자원으로부터 생존욕이라는 원료를 짜내는 목적이다.

    세상은 의견이 아니라 동의를 구하는 자들 천지다.

    먼저 있었다고()해서 우월하지는 않다. 즉 신이 태초에 있었으니까 위대하다는 근거는 전혀없다.

    사전에 프로그램(욕망) 되었고, 지금도 작동하는 충동의 유지에 중점이 놓여져 있을 뿐이다. 발전해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 발달시키고 있는 것은 생존을 위해 호기심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밖에 되지 못한다. 심심하고 따분한 것을 싫어하도록 설계되어 육체의 정상적 기능, 지성이라고 하는 호기심의 유지, 영성이라는 자기자신을 몰아세우는 기능을 중요한 의무로 짊어지고 살게끔 만들어진 것이고 우주가 존속하려는 본능적인 몸부림의 수단으로 만들어진 무수한 부산물을 자네들의 문명이라고 한다.

    무한이 될 수는 있어도 그걸 볼 수는 없어, 최초의 프로그램은 단순히 어떻게든 움직이지 않으면 편치 않아지도록 설계한 것 뿐이었는데 지금은 스스로 무수한 논리, 오락, 가치관을 생산하고 있다. 인간이야말로 편안해질 줄 모르는 파리들이다.

    존속시키려는 충동을 불러 일으키는 장치를 발명,  사는 것은 즐겁다는 생각이 들게하는 쾌락신호. 우주산업의 극락산업부분에서는 죽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강조해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고통-편치 않은 것의 체험 시스템이 고안된 것이다.

    나는 줄의 맨 끝에 있다. 때문에 누구도 나를 떠밀 수 없다. 최저가 되라.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고자 하거나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또 어떤 존재로 남아 있기를 스스로 강요한다면 영원히 본질로 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해 진다.

    활동이란 몸을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게 아니라 사고활동을 의미한다.

    공포(곤란) 그 자체 외의 공포(곤란) 스러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희망이야말로 절망의 원인이다.

    욕망이 있으면 반드시 이용 당한다.

    도둑은 거지의 집에는 들어가지 않는다.-선의 철학-그곳엔 얻을 것도 어떤 위협도 물질의 유혹도 이해 관계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주인들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 그것은 죽음과 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주에서의 완전 소멸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은 든든한 절대의 어둠, 죽음과 에 뒷받침 되어 있다.

    우주의 모든 것이 둘로 나누어져 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둘로 나누지 않으면 활동이라는 것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주 의식은 시행착오로 뭔가를 지각하고 경험하려 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우주가 스스로를 보려고 한 결과로 인해 마치 우주를 창조하고 있다는 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은 당신의 단순한 존재상태 그대로가 사마디이다. 그리고 그 사마디는 최종단계에서는 그냥 . 거기까지 무가 된다면, 그곳에서 존재로 귀환했을 때, 당신은 벌거숭이로 아무런 걸림없이 존재와 만난다. 그리하면 만물 전부가 광명 그 자체였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완전하게 부정되고, 완전하게 무로 된다는 것은 당신의 영혼도 내던지고 空虛가 되는 것이다.

    당신은 명상할 때마다 무언가를 성숙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욱, 텅 비게 된다. 그냥 무거운 짐이 덜어질 뿐이다. 침착하게, 그저 있을 것. 그러나 정말 그 처럼 존재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전혀 없는 즉 무의미와 무존재. 그저 존재한다라는 의식조차도 사라진 무로 사라지는게 낫다.

    시드는 것을 거부하는 꽃은 하나도 없다. 본시 사랑하는 행위도 쓸모 없는 것. 즉 쓸데없는 일을 하지 말라

    나무를 사랑했던게 아니라 나무를 사랑하고 있는 자기자신(자랑, 칭찬)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밸런스를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무리하게 중도를 보전하려는 자는 항상 저울 양쪽에 있는 접시의 무게(좋다, 나쁘다, 예쁘다, 더럽다, 즐겁다, 괴롭다 등 평판)에 신경이 쓰여 걱정이 끊이질 않는다. 자연 안에서 본래 하나인 생과 사를 둘로 나누는 것은 인간의 사고법이다. 원래부터 하나인 것을 둘로 나누어 놓고는 그것을 또다시 하나로 통합하려 하는 짓이야말로 사서 고생하는 것이다. 中道란 저울의 축 한가운데다. 무엇이든 구하는 자는 본질을 놓치고 말하는 것은 본질을 모르며, 실제 이 세상은 아는 것조차 없으며, 그저 존재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사물을 보는 눈과 방법은 하나의 행위이다.

    불안이라는 것은 언제나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저 이름없이 조용한 본성 속에서 살아라. 그 속에는 어떠한 성냄이나 경멸도 가치도 무가치도 의미도 무의미도 없다. 만약 삶의 목적이나 목표(욕망) 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지도라는 지식을 갖고 여기저기 찾아 헤매며 다른 사람까지도 끌어 들인다. 하지만 헛수고의 연속이다. 즉 심부름이 될 뿐이다. 실제로 도구를 만드는 근저에는 항상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며 원인도 역시 공포와 불안 때문이다. 지성 연명과 안정을 위해 갖가지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따분함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만들어 낸 것이다. 지성의 산물이 아니다. 인간이 만든 예술, 종교, 논리, 철학, 과학, 사회, 언어 무엇 하나 만족시키는 것 없다. 모든 의미에서 인간은 굶주려 있다. 그 굶주림은 먹을 것이 아니라 정보와 사고하는 일이다. 인간은 술, 수다, 오락, 스포츠, 작은 전쟁(언쟁), 큰 전쟁(살육)으로 공허함, 허무함, 따분함, 공포, 불안, 불만을 때우고자 한다. 그리고 삶은 이것들의 끝없는 악순환이다.

     

    풍경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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