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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사상과 철학 112 (교재 공개)
    패러다임/철학 2023. 3. 1.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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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112

     

    영상 강의 링크 : https://youtu.be/evjNy6dx9HM

     

    516.

    손바닥을 위로하고 손가락을 펴는 것이 TAO(). 무언가를 잡으려고 얻으려고 하지마라. 자기는 열려 있다고 외치면서 무언가 받아들이려고 준비하는 손이 돼서는 안된다. 그것은 탐욕스러움의 또 다른 표현이다. TAO의 초점은 언제나 손에 있지 당신의 의식에 찾아오는 대상물에 있지 않다. 문제의 본질은 당신의 손(의식) 그 자체의 모습이다. 즉 무노력, 무목적, 무기대, 무위(자연의 상태), 무심(), 깨달음은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가장 먼저 떼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명상이나 좌선을 갖고서 깨닫고자, 붙잡고자, 알고자, 체험하고자 하는 모든 기대, 조작, 인식, 자각, 목적의식 이런 것들은 모두 어렵사리 찾아온 나비를 손에 쥐고 뭉개는 행위다. 만약 당신이 나비가 날아와도 잡지 않는다면 점차로 더 많은 나비가 당신의 손에 날아 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의 손이 안전하다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깨달음 조차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가르침 받는 것을 맹신하지 마라. 스스로 의심하고 모든 측면에서 생각하라.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최고의 염불이란 절대적인 침묵이다. 실현되지 않는 법에 마음을 기대는 것은 의존과 집착일 뿐이다.

    들판의 백합을 보라. 그들은 염불을 하지 않는다. 피어 있는 일, 그리고 거스르는 일 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자체가 그들의 끊임없는, 춤 공양이요, 노래 공양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지구 자체가 한 개의 거대한 정신병동인 것을. 진짜 불교는 결코 자기를 불교라고 말하지 않는다. 동물들 누구도 자기를 불교도라 말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

    만족시키는 것은 당신 한 사람으로 족하다. 그 당신 안에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타인을 밖에 있다고 믿는데서 포교라는 환상이 생겨난다. 깨달음에 대한 희망이 있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 기대와 희망이야말로 사고를 만들고 선악을 만들고 佛性의 생태를 위반하는 것이다. 수행이라는 에고를 전부 버려라.

    사람은 깨달음이 될 수 없다. 깨달음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말 명상적인 공간이란 비종교적인 공간이다.

    실력으로 타인을 이기지 못하면 놀랍게도 고민의 크기도 누군가를 이기려 든다. 이른바 자기를 비하시키는 거만이다.

    스스로 를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혼자의 길을 가야지 스승이나 단체, 조직 등 이미 누군가 혹은 사회가 보증한 노선에 편승하는 손쉬운 길을 선택하지 마라. 그것은 자기가 분명히 살아 있다는 실감, 당신도 살 의미가 있다고 말해주는 타인과 가르침, 그리고 자기가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해 주는 것. 자기의 존재가 무시 당하지 않는 환경. 고군분투해서 힘이 생기고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과제를 제시하는 가르침 등 종교적 상술일 뿐이다.

    를 하나의 가르침으로 세속적 숭배 대상으로 만들지 마라.

    나는 단순히 당신일 뿐이다.

    옳은 길 찾기 컬렉션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고를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일에서는 벗어나고 만다.

    긍정이나 부정을 넘어서라

    존재로부터의 완전 소멸

    무엇이 필요한지가 아니라 무엇이 신의 현현을 방해하고 있는 가?’에 대한 이해이다.

    존재 자체가 존재 자체를 보는 일 바로 이것이 환희다. 논리적으로 눈이 눈 그 자체를 보는 것은 있을 수 없지만 인간 안에서 신(의식)이 신을 자기 인식하는 체험이 가능하다. 그 불가능한 일이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게 불가사의한 환희의 원인이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하나되는 순간이다.(주객체의 일치)

    장렬한 고에 대한 실감과 죽음에 직면한 끝에 평안에 이르는 것이 불교()의 길이다. 깨달음은 육체적 고행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대오(광명)와 해탈(정적)은 평행하는 두 개의 다른 차원이다.

    행법이 당신을 이끄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이끄는 것은 고의 절실함이다.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해탈이라면 당신이 나서서 자기 자아의 죽음을 절실히 바라는 것이어야 한다.

    질문이 틀리면 대답도 모두 틀릴 수 밖에 없다. 이 있지도 않은 답을 찾는 패들이 만들어 내는 파동 덕택에 우주는 꽤 살아남을 수 있었다. 즉 시대마다 만들어지는 답의 믿음으로 삶의 보람과 사랑과 증오, 고통과 쾌락을 생산하면서 우주에 크게 기여해왔다.

    우주에서의 온갖 의문은 생존 에너지를 생산하는 목적의 출구라는 속임수이다. 우주의 근본적인 고통이란 무의미나 를 의식하는 일, 정체와 정지 상태라고 정의된다. 즉 이 우주 법칙의 밖(우주의 외측, 어둠)으로 뛰어 나가는 기법

    우주나 그곳의 생물들에게 최종적인 편안함이란 존재를 계속하는 것이며 또 계속 움직이는 것과 변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는 그저 의미없이 변화하면서 존재를 계속할 뿐인 의미밖에 없다. 우주도 고차원도 신들도 그저 생존이라는 일치된 목적으로 살아 있을 뿐이다. 그것도 존재들이 공통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이며 무의미의 의식이며, 또 움직이지 않는 정체다.

    심령적인 영역은 어떤 고통이든 어디까지나 이 우주의 내부에서 살고자 하는 창조적 의지가 굴절된 차원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내부는 존재의 의식과 활동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그 외측에는 의식조차 없다. 그 중간 영역에 동결되어 영향을 받는 것에는 무를 본 의식, 무의미의 의식을 내포한 채로 이 세계에 태어날 수 없는 의식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도망가야 할 방향을 나타내는 경고의 표식 그 자체가 된 자들이다. 어쩌면 존재한다는 것은 환각이어서 본질적으로는 우주도 아무 것도 없을 지 모른다는 것이다. 전우주의 존재 이유는 이 무의미의 어둠(우주의 외측, 그것)에서 멀리 도망치려는 노력이 우주 자체인 것이다. 전 우주의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한다. ‘그것이란 절대 무의미라는 어둠=무의 영역이다. 존재하는 일체의 것은 그것에 대해 절대로 승산이 없다.

    무의 어둠은 언제까지나 우주를 협박한다.

    형태있는 것은 형태없는 것에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우주는 무에 위협당하고 공포로부터 도망치기에 급급한 수레바퀴일 따름이다.

    어둠의 두려운 점은 완전히 빨려 들어갈 경우에는 사라지지만 그와는 따로 이 세계와 어둠 사이에는 심연의 영역이 있어서 만일 이곳으로 걸려들었을 경우는 사라지지도 못하고 의식이 있는 채로 무의미 속에서 영원히 유폐되는 지옥 이상의 영원한 고문과도 같은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무의미의 어둠의 접근으로부터 도망칠 노력을 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동기에 의해서 우주의 모든 물질도 생물도 의식도 살아있는 것 같다.

    지구 인류는 뒤쳐진게 아니라 처음부터 전혀 다른 목적 즉 어둠의 공포를 끌어내어 생존을 지속하기 위한 단위로서 의도적으로 배양된 것이다.

    진화, 성장, 발전, 창조, 우주의 의지, 자연, 죄과, 깨달음, 영혼의 학습, 우주와의 일체화... 모두 가치없는 대답들이다.

    우주는 생존욕 덩어리가 정답이다. 왜 우주가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서 우주가 무엇을 하는가?가 올바른 질문 방법이다.

    우주 존재에는 이유같은 것은 없고 그곳에는 그저 의식이 사라지지 않으려고 충동만이 있었다. 이 우주에서 존재 세계에서는 모든 이유에 최우선하는 목적은 진화가 아니라 생존하려는 의식의 유지에 있다. 이것은 온갖 차원의 의식, 궁극적인 우주 의식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원칙이다. 따라서 온갖 의식체에게 가장 중요한 작업은 생존욕의 감쇠나 소멸을 저지하든가 아니면 끊임없이 생존욕을 확장시키기 위한 탐구다. 움직임 그 자체도 전 우주 의식의 목적이 된다. 단 그 움직임에는 전혀 의미가 없다. 온갖 차원의 시스템과 형태, 변화, 운동, 사고, 감정, 물질은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 생존욕이 프로그램되어 있고, 움직이고, 유지되고, 변화한다. 생존욕을 촉진하는 목적(전쟁, 투쟁, 살육, 사랑, 분리, 고독감, 만족감, 불만, 호기심, 권태감, 파괴, 창조, 죄악감, 열등감, 죄와 카르마의 개념에 따른 갈등, 윤회의 개념으로 어떻게든 자기 의식의 생존욕을 지탱할 것 등)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을 파괴하는 일(움지임의 정체, 정지, 퇴출...)만은 이 우주에서 악으로 취급된다.

    기쁨이란 의문을 잊어버리기 위한 도구이다.

     

    풍경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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